# 136
<귀환무사 136화>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공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오왕조차도 혁련강에게는 그저 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문득 조부에게 수련을 받을 수하들을 떠올리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특히 북궁천소와 왕전, 관산악의 반응을 예상하니 저절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볼만하겠군.’
* * *
꼬박 일 년을 헤어질 거라 여겼던 혁련천후가 생각을 바꿔 돌아오자 누구보다 기뻐한 이는 독고혜였다.
그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얼굴로 요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 못지않게 웃음꽃이 핀 영호수란 역시 그녀를 도와 손에 양념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너무 짜지 않을까?”
“물을 좀 더 부을까요? 그럼 또 너무 싱겁겠죠?”
“역시 우린 안 되겠어. 어설픈 살수 아저씨를 부르는 게 좋겠다.”
둘은 저녁 식사로 만둣국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귀하게만 자라 온 그녀들이라 음식 솜씨는 꽝이었다. 물론 주방을 담당하는 아낙들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혁련천후와 혁련강이 먹을 음식은 손수 해 주고 싶어 앞치마를 두른 것인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자 결국 홍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홍무가 어느새 그녀들의 뒤쪽에 나타났다.
“우리는 안 되겠어요.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두 여인이 주방을 나서자 홍무가 팔을 걷어붙이며 솥 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대체 이게 뭐지?’
솥 안에 만두처럼 보이는 것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가히 만두라고 할 수도 없는 모양들을 하고 있었다.
홍무는 천하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두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역시 공평해.’
* * *
모두가 홍무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만둣국으로 식사를 시작할 무렵, 지난날 청룡단을 이끌고 찾아왔던 정도맹의 호법, 곡영이 다시 장원을 찾았다.
역시 담대소천이 그를 맞았다.
언제부턴가 대외적인 부분은 담대소천이 담당하기 시작했는데 다소 거친 다른 이들보다는 성정이 비교적 중후하고 온화한 편인 그가 적합하다고 여긴 혁련천후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곡영은 직접 혁련천후를 만나지 못하고 한 시진 만에 다시 돌아갔다.
담대소천이 돌아왔을 땐 모두가 식사를 끝내고 찻잔을 기울일 때였다.
“정도맹에서 또 왜 찾아온 거냐?”
왕전이 물었다.
담대소천이 혁련천후를 보며 말했다.
“용성과 빙궁이 병력을 여러 방향으로 나누어 중원을 향해 떠났다고 합니다. 관의 시선을 의식해서 일부러 병력을 나눈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왕전이 다시 물었다. 담대소천은 역시 혁련천후를 보며 말했다.
“그냥 그걸 전해 주려고 왔답니다.”
“여차하면 도와 달라 이 말이군. 하여간에 염치라고는 없는 놈들이라니까.”
왕전이 또 말을 받아 이죽거렸다.
조윤이 혁련천후에게 물었다.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해 오면 어쩌실 겁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혁련천후는 만둣국이 입에 맞았는지 벌써 두 그릇째 비워 가고 있었다.
담대소천이 말하고 나섰다.
“우리도 첩보망을 제대로 운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실 정도맹은 제쳐 두고라도 구파나 오대세가의 정보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인원이 필요하지 않느냐.”
“정식으로 개파를 해서 사람을 모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윤의 말에 혁련강이 슬쩍 끼어들었다.
“지금은 개파를 할 시기가 아니지. 사련과의 전쟁도 그렇고 남북에서 쳐들어온 두 세력으로 인해 세상이 이렇듯 시끄러운데 어찌 한가로이 개파를 선언할 수 있겠느냐.”
혁련강이 나서자 모두는 더 나서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열심히 배를 채우고 있었던 북궁천소가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사련놈들이 의외로 늦습니다. 우리가 먼저 놈들의 본단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망할 놈. 하여간에 싸우다 못해 죽은 귀신이 들렸다니까.”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너보다야 백 번 양반이지, 내가.”
북궁천소와 왕전이 도끼눈을 하고 서로를 노려보자 혁련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하고 나섰다.
“어쩌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 되겠지. 어차피 세상의 전면에 나섰다면 보다 확실하게 존재감을 심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야. 허허허.”
혁련강이 대답했다. 북궁천소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흐! 역시 노주(老主)께선 화끈하십니다.”
“두 분만 가셔도 사련 정도는 작살인데 말입니다.”
왕전이 거들었다. 혁련천후도 듣고 보니 북궁천소의 말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 적 하나를 제거해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탁!
혁련천후가 찻잔을 탁자에 놓더니 혁련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사련을 치겠습니다.”
언제나 머뭇거림이 없는 혁련천후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예에?”
“내일…… 당장 말입니까?”
“주공. 그건 너무 빠르지 않겠습니까.”
“내일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영호수란마저도 뾰족하게 소리치며 나왔다. 독고혜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말이 떨어지면 되돌릴 수 없음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뇌 교주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도움을 청할 생각이냐?”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칠 생각입니다. 저와 이 친구들, 그리고 천마사로와 검마전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강호인들이 들었다면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발언이다. 천하삼세의 하나인 사련을 고작 열댓 명으로 칠 생각을 하다니.
당장 독고혜와 영호수란의 낯빛이 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음식 수발을 들던 홍무는 아예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서 혁련천후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수련 중인 화산의 제자들과 신마각의 무사들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혁련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고 빠지는 식의 유격전이 좋겠지?”
“적은 인원으로 대적을 상대할 때 그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혁련강이 한껏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서 독고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 늙은이도 밥값은 해야지 않겠느냐.”
수심이 가득했던 독고혜의 낯빛이 비로소 살짝 밝아졌다. 당대의 최강자인 혁련강이 함께한다면 그만큼 혁련천후의 안전이 확고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모두가 서로를 돌아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혜처럼 대부분이 표정이 밝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하나같이 무공광인 그들로서는 혁련강의 무공을 코앞에서 겪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무심결에 그들을 쳐다본 영호수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뒷산의 산적들을 잡으러 가는 것처럼 여기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다른 강호인들도 지금 이들의 표정을 보았다면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왜 대답이 없느냐. 할아비가 함께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아닙니다. 허면 함께 가시지요.”
대답을 한 혁련천후가 담대소천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사련을 친다는 것을 미리 알리도록 해.”
“대놓고 과시를 할 생각이십니까?”
“목적이 그거니까.”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백어산 곳곳에서 전서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시게 될 겁니다.”
“죽치고 있던 놈들을 모조리 죽이시지 않았습니까?”
북궁천소가 의아한 듯 물었다. 대답은 담대소천이 대신 했다.
“다른 곳에서도 우리를 살피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도맹의 비영전도 있을 수 있겠지.”
“정도맹이 감히 우리를 감시한단 말이냐?”
“아직 우리는 정과 마, 그 어느 쪽도 표방하지 않았다. 용성과의 전쟁을 도운 것과 청룡단이 우리에게서 수련을 받는 것만으로는 정도맹도 절대 안심하지 못할 거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겠지. 모르긴 몰라도 개방이나 하오문처럼 정보로 먹고사는 집단들도 백어산 곳곳에서 눈에 불을 켜고 숨어 있겠지.”
모두가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혁련강과 혁련천후가 몸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 출발한다. 미리 준비를 해 두도록.”
“예!”
자리가 파했다.
모두는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당장 사련을 치러가는 마당임에도 누구 하나 긴장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과연 담대소천의 말처럼 백어산의 곳곳에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그중엔 거대한 전서응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발견한 혁련강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전신이 붉은 깃털로 뒤덮인 독수리는 묵련이 사용하는 전서응이었다.
‘또 다른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혁련천후의 손에 모조리 다 죽었다고 했는데 다른 자들이 또 있었던 모양이었다. 혁련천후도 전서응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놈들이 첩보망을 여럿 가동하는 모양입니다.”
“치밀한 놈들이니 당연히 그럴 게다. 그건 그렇고 마교 쪽은 어찌 되었느냐?”
“저기 나오고 있습니다.”
마교의 인물들이 머무는 곳에서 천마사로와 장용백이 막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뒤쪽에 뇌어양과 다른 고수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혁련천후가 뇌어양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괜한 도움을 청하여 심기를 어지럽힌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뇌어양이 웃으며 손을 젓는다.
“허허! 신세를 지고 있으니 갚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이 늙은이가 함께하지 못함이 미안할 따름이오.”
“사련의 졸자들을 때려잡는 데 우리만으로 충분하오!”
살로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자 뇌어양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표정이나 말투는 쌀쌀맞기 그지없지만 그 모든 게 자신과 교를 위한 충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늦었네.”
“네놈이 늦잠을 자서 그렇잖아.”
왕전과 북궁천소등이 밖으로 나오면서 신마성의 정문에 최강의 정예가 집결했다.
면면을 보면 가히 천하제일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그야말로 최강의 소수 정예라 할 수 있었다.
“조심하세요.”
혁련천후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는 독고혜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담대소천이 다가왔다.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주공.”
“출발하지.”
배웅을 나선 모두의 근심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그들은 빠르게 사련의 본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갈무극은 자신의 거처에서 신마성을 쓸어버릴 계획을 수립하느라 수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틀 밤을 그냥 날로 샜다.
사요승이 머리에서 나온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일거에 쓸어버릴 전면전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방도가 나오지를 않아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게 하루를 더 날밤을 새웠으나 역시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하고는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갈무극이 차로 목을 축인 다음에 분통을 터뜨렸다.
“나 갈무극이 고작 그따위 놈들에게 발목을 잡히다니!”
신마성과의 일전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 제조한 생강시를 스무 기 가까이 잃었다. 게다가 호숙아 같은 정상급의 고수들도 수십 명이 죽었다.
사요승이 좋은 말로 갈무극을 위로했다.
“비록 손실은 컸지만 상대의 전력을 보다 상세하게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차후 다시 그들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땐 정 반대의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요승이 그렇게 나오자 갈무극이 분을 삭였다.
“천하에 생강시를 한꺼번에 열 구 이상을 쓸어버릴 놈이 있었다니 당하고도 믿지 못하겠구나! 혹, 놈이 무슨 사술을 쓴 것은 아니더냐?”
“당시 현장엔 거대한 폭발이 있었습니다. 결코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필시 상당한 파괴력을 지닌 군의 포탄을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사요승의 대답에 갈무극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나타냈다. 사실 갈무극뿐만이 아니라 사련의 모든 고수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생강시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없는 강력한 신체를 지녔다.
천하제일이라는 일존 견오도 하나씩 처치하는 것은 가능해도 한꺼번에 여럿을 처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군을 이용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의 위력이라면 섬서성의 관군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게 확실합니다. 황제가 바뀐 어수선한 시기인지라 군의 단속이 꽤나 삼엄하다고 들었습니다. 적당한 선을 통해 놈들이 군의 화약을 대량 보유하고 있다고 찌르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서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신을 천으로 두른 괴량이었다.
신마성과의 격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서 생환을 한 그는 누구보다 강렬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괴량의 의견에 갈무극이 귀를 솔깃 하는 반응을 보이자 사요승이 고개를 저었다.
“군을 끌어들여선 곤란합니다. 당장은 도움이 되겠지만 차후, 우리까지 엮여들 수도 있으니 그 방법은 하책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엮일 게 뭐 있소!”
괴량이 다소 불만 어린 투로 되물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신마성을 조사하던 도중에 빙궁이나 용성의 침공 때문에 수천이 죽어 나간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땐 전무림이 관군의 살벌한 눈초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오. 혹, 새롭게 황위에 올라선 영락제에게 그 소식이 과장되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땐 어쩌시겠소?”
“황제가 할 일 없이 무림에 신경을 쓰겠소?”
잔뜩 미간을 좁힌 괴량을 보며 사용승이 혀를 찼다.
“이보시오! 황제가 바뀐 지 이제 고작 수개월이 지났소. 집권 초기의 민심수습을 목적으로 황군을 몰아 내려오면 그때 괴 전주가 다 막아 주시겠소?”
“끙!”
괴량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제아무리 하늘을 날고 천근거석을 부순다는 무림인이라도 나라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순 없는 노릇이다. 갈무극의 눈썹이 역팔 자로 휘어졌다.
“관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본 대제의 자존심에도 용납되지 못한다. 놈들을 쓸어버려 천하에 본 사련의 강함을 증명하겠다. 더 이상 다른 소릴랑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