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귀환무사 135화>
* * *
‘예사롭지 않은 놈들이 따라붙었군.’
혁련천후는 자신을 쫓아 움직이던 두 개의 기운들 중에 하나의 기운이 일시에 사라짐을 느꼈다.
고른 기척으로 보아 소멸된 기운들보다 훨씬 강한 고수들이 분명했다.
그는 전방을 살폈다.
제법 높은 암석이 질주하는 방향의 가운데를 막아선 채 솟아나 있었다. 그는 섬전처럼 몸을 날려 암석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날카롭게 주변을 쓸어 보던 자가 외쳤다.
“저쪽이다!”
먼 곳에서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곳에 혁련천후가 있을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적포인들은 일제히 방향을 틀어 몸을 날렸다. 하지만 한 명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강력한 기운이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적포인의 몸을 옭아매었다. 놀란 적포인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자 두 눈을 부릅떴다.
이미 동료들은 저만치 앞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 적포인의 앞에 혁련천후가 나타났다. 그는 재빨리 복면을 벗겨내었다.
혈광이 일렁이는 적포인의 눈동자는 관산악에게서 들었던 자들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광승 무요의 진경을 익히면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저 많은 놈들이 다 광승의 마공을 익혔다면…….’
사실이라면 진정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혈마에 이어 광승의 진경이 나타났다. 하나만 나타나도 천하를 혼란으로 몰아갈 수 있는 희대의 마공이 둘이나 나타났다.
천하의 혁련천후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 온 누구냐?”
그는 적포인의 아혈을 풀어 주고서 물었다.
혹시나 소리를 지를 것에 대비하여 이미 주변은 강력한 호신강기로 두른 상태였다. 적포인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아혈이 풀렸음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답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적포인을 향해 싸늘하게 웃어 보인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제뇌심공이라고 들어 봤나? 뇌를 제압해 이지를 상실하게 만든 후, 정보를 캐내는 수법이지. 물론 당한 사람은 평생 백치로 살아가야 하지. 이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겠지?”
순간, 혈광이 일렁이던 적포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지금 혁련천후가 거론한 수법은 바로 자신이 익힌 광승 무요의 진경에 들어 있는 최악의 고문 수법이다.
당연히 그 후유증과 고통이 어떤지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다면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묻겠다. 묵련에서 나를 쫓고 있느냐?”
묵련은 조부에게서 들었던 암중 세력의 이름이다. 해서 혹시나 해서 그곳을 거론하며 물었는데, 적포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제대로 물었다 싶었다.
“네놈이 어찌 묵련을 아느냐? 설마…… 혁련가의 놈이냐!”
스스로 시인을 한 꼴이 되어 버렸다.
혁련천후의 눈빛이 더욱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네놈들이 싫어하는 그 혁련가라면 맞겠지.”
“죽여라!”
순식간에 적포인의 두 눈이 적개심으로 채워졌다.
혁련천후는 내심 탄식을 쏟아 냈다. 대체 어떻게 세뇌를 해왔기에 혁련가라는 것을 듣기가 무섭게 이토록 강렬한 적개심을 품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군.”
혁련천후의 손이 적포인의 백회열을 슬쩍 건드렸다. 동시에 그의 눈에 지독한 혈광이 생겨나며 적포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제뇌심공을 펼친 것이다. 제뇌심공에 제압당한 적포인이 그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데는 일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 * *
광승 무요의 진경을 이은자들임을 확인한 혁련천후는 스스로 다른 적포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뒤늦게 동료 하나가 사라진 것을 깨닫고 되돌아오던 적포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혁련천후를 에워쌌다.
혁련천후는 그저 무심하게 물었다.
“나를 쫓고 있었다고 들었다.”
“……허면 네놈이”
적포인들은 혁련천후가 감쪽같이 사라진 동료와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혁련천후는 담담히 시인했다.
“곱게 죽지는 못했다.”
혁련천후는 적포인들의 한가운데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그때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싸늘히 물었다.
“스스로 모습을 나타냈다면 우리를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이지.”
“혹시 신마성주?”
“알고 쫓아온 것이 아니었나?”
스르릉!
혁련천후는 검을 뽑았다.
아무런 기운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적포인들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혁련천후는 한 인물을 직시하며 물었다.
“네가 우두머리로군. 묵련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당연히 죽은 수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겠군.”
“미친놈! 네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우리 전부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
“말했잖아. 자신이 있어서 스스로 나타났다고. 아! 하나 미리 말해 둘 게 있는데……. 나 역시 광승 무요의 진경을 익혔다. 그렇다면 그 안에 제뇌심공보다 더한 수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 직접 그 고통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는 것이 좋을 것이다.”
“쳐라!”
두고 볼 것 없다는 듯, 명령을 내리자 적포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달려든 것은 좌측에서 움직이던 자들이었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 역시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쐐액!
끝이 완만하게 휘어진 반월도(半月刀)가 혁련천후의 어깨를 향해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들었다.
동시에 다른 자들의 검이 허리와 다리를 쓸어 왔다.
반월도와 검이 몸에 닿기 직전에 혁련천후는 환영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형환위의 수법이었다.
꽝!
좌측에서 굉음이 일었다. 혁련천후의 검을 정면으로 막아 낸 자가 놀랍게도 고작 두세 걸음을 밀려서더니 자세를 잡고 다시 검을 겨누었다.
이미 그자의 전신은 은은한 혈광으로 어려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자들 역시 같았다.
‘역시 강한 놈들은 혈광의 정도가 더 짙군.’
사로잡았던 자와는 확연히 혈광의 농도가 짙었다.
그때였다. 모든 혈광이 한 무리로 이어진 것을 본 혁련천후는 적포인들이 진법을 펼친 것을 알고는 내심 가볍게 놀랐다.
짧은 시간에 비하면 상당히 신속한 반응이었다.
파파팍!
그가 섰던 자리에 강력한 강기 다발이 덮쳤다. 땅에 기다란 구덩이가 파이며 치솟아 오른 흙과 돌덩이가 허공을 덮었다.
말미잘이 입을 오므리듯 좁혀들었던 적포인들이 빠르게 넓은 원형으로 퍼졌다. 철저한 수련을 거친 듯, 그들의 동작은 한 치의 빈틈조차 없었다.
‘여럿의 힘을 한 번에 모아서 격발시키는 수법이군.’
그렇다면 정면충돌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제아무리 그가 절대를 넘어선 고수라고 해도 하나하나가 절정을 넘어선 적포인들의 힘이 응축된 합격을 정통으로 받아 낸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다.
문제는 적포인들의 주변을 두른 혈광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엄청나군.’
광승 무요의 진경은 그 수준이 혈광의 짙고 옅음으로 결정된다.
지금 적포인들이 보여 주는 혈광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혁련천후로서는 어쩔 수 없이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천살강기를 끌어 올려야 했다. 천살강기만이 해답이었다.
‘극성까지만 끌어 올리지만 않으면 문제 될 건 없다.’
치르륵!
순간 혁련천후는 적포인들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천살강기를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도 짐작은 하겠지?”
“흥! 그래 봤자 소용없다!”
“글쎄 그거야 두고 봐야 알겠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혁련천후는 가장 가까운 곳을 점하고 섰던 적포인들을 향해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눈가가 쭉 찢어졌다.
‘이제 보니 무모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군.’
제아무리 천살강기라도 자신들, 모두가 동시에 발출하는 힘과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다. 그것은 그저 짚단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 정면을 들이칠 듯, 보였던 혁련천후가 교묘한 방위로 몸을 틀어 적포인들의 가장자리를 노렸다.
퍽!
“크악!”
좌측을 담당했던 자의 목이 날아갔다. 가진 능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혁련천후의 공격 궤적을 멋대로 판단을 하고 대처한 결과였다.
한명이 죽어 나가자 진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대부분 합격진의 단점은 완벽에 흠집이 났을 때, 급속도로 무너진다는 점이다.
지금 적포인들이 그랬다. 하나가 무너지자 그토록 완벽했던 공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무뎌졌다.
“크악!”
이번에는 두 명의 목이 날아갔다.
제아무리 마요의 진경을 익혔더라도 일대일로는 혁련천후의 천살강기에게 깜냥도 되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단 둘만을 남기고 모조리 고혼이 되어 버렸다.
적포인들로서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우두머리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지더니 괴성을 지르며 육탄으로 달려들었다.
“크아아!”
“너는 조금 더 살아야 한다.”
쾅!
혁련천후의 우장이 날아든 자의 가슴을 강타했다. 허공에서 지푸라기처럼 돌아버린 적포인의 육신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잠시 물고기처럼 몸을 꿈틀대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졸지에 혼자가 되어 버린 적포인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혁련천후가 그를 향해 싸늘히 말했다.
“돌아가서 전해라. 너희들이 원하는 상대인 혁련가의 후예가 이곳, 신마성에 있다고 말이다.”
“……나를 살려 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놈!”
“꺼져. 마음이 바뀌기 전에.”
휘익!
멈칫거리던 적포인이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꽤 높은 위치에 있었다면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군.”
그는 혼절을 한 자를 끌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숲을 헤치며 나왔다. 그런데 그 표정이 들어갈 때와는 달리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는 잠시 북쪽 하늘을 응시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이 금역은 포기를 해야겠군.”
중얼거리고 돌아서더니 신마성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 * *
“그래서 돌아왔단 말이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혁련강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혁련천후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묵련이 움직일 시기가 임박했다고 한다. 해서 금역에 오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정작 묵련이 움직였을 때 자리를 비우게 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어서 그냥 장원에서 수련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었다.
“흠! 가문의 수련장에 깃든 선조들의 정기와 금역 전체를 흐르는 마기의 도움이 없으면 천살강기를 극성까지 익힐 수가 없단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냐.”
“제게는 구룡삼세라는 무공이 있습니다.”
“구룡삼세? 혹시 화산의 무공이더냐?”
“예.”
혁련천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천살강기와 구룡삼세를 이용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미미한 단계라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이룬다면 천살강기를 극성까지 익힌 것만큼이나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혁련강이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천살강기는 세상의 그 어떤 무공과도 섞이지 않는 본 가문만의 비전절예인데 그것이 섞이더란 말이냐?”
“아직 완벽한 단계는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원하는 대로만 되어 준다면 지금의 저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듯합니다.”
“허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이지?”
“어쩌면 초절정의 초입에 이른 고수라도 일 초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성공을 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초절정의 고수를 일초에 제압할 무공이 있단 말인가.
누가 들었다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고도 남을 발언을 혁련천후는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놀람은 혁련강의 뒷말이 더했다.
“광승, 혈마, 그리고 철갑신마의 진경을 극성으로 익힌 자가 있다면 그 정도론 안 될 것이다. 마교주의 말을 들어 보면 빙궁의 덩치 큰 아이들은 철갑신마의 진경을 이은 것이 확실한 것 같더구나. 하지만 마교의 천마사로를 죽이지 못했다면 그들도 극성의 경지까지 익히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허나, 분명 어딘가에 세 마공을 극성으로 이은자들이 실존한다고 가정하면 너 역시 반드시 그들의 수준까지 올라서야 한다. 그래야 싸움이 될 터이니…….”
혁련강의 말에도 혁련천후는 담담했다.
혁련강의 눈에 이채가 살짝 나타났다.
“허어! 네 얼굴을 보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런 것이냐?”
“제가 원하는 수준까지만 된다면 적어도 일대일로 붙어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허허! 그래? 과연 혁련가의 후예답도다. 오냐. 그렇다면 너를 한번 믿어 보마. 뭐, 정 안 되면 중원을 제쳐 두고 금역으로 돌아가 수련을 하면 될 터이니…….”
“불현듯 떠오른 생각인데, 어쩌면 지금쯤 금역도 놈들이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혁련가의 후예가 조부님과 저, 둘뿐임을 그들이 모르니 언젠가 나타날 가문의 후예를 찾기 위해서라도 그곳을 지키고 섰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 말이 옳구나. 하지만 네가 신분을 드러냈으니 어쩌면 놈들이 이곳부터 쳐들어올 수도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보면 금역으로 가지 않은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허허허.”
혁련강은 혁련천후가 대견스러워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식어 버린 찻잔을 마저 비우고는 일어섰다.
“차라리 잘되었구나. 따로 놈들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우린 준비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 놈들이 준동할 시간이 제법 남았으니 그동안 아이들의 무공을 다듬어 줘야겠어.”
“아이들이라면……?”
“너를 쫄쫄 따라다니는 그 여덟 놈 말이다. 개중 다섯은 오왕이라고 했지? 쯧쯧! 그 정도 수준으로 감히 별호에 왕자를 달다니, 강호의 인심이 너무 후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