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귀환무사 134화>
왕전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수련을 하실 계획입니까?”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망설임 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영문을 모르는 독고혜와 영호수란이 혁련천후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혁련강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빠를수록 좋겠지.”
“당장 내일 아침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허허! 그렇게 하려무나.”
독고혜가 더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혼자 가실 건가요?”
목소리에서 불안감이 묻어났다.
혁련천후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동안 헤어진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어쩌면 그녀가 더 힘들어할 것이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해 보지.”
결국 혼자 가겠다는 말에 독고혜의 표정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영호수란은 끼어들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혁련강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두 여인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그동안 이 할아비의 말동무가 되어 주면 어떻겠느냐?”
“……!”
“조부님이시다.”
짤막한 혁련천후의 한마디에 모두의 낯빛이 급변했다.
특별한 관계일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조부였을 줄이야.
혁련천후는 독고혜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잠시 떨어져 있는 것쯤은 참아야지.”
“알았어요.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독고혜는 애써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허나 그 속내를 어찌 모를까.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혁련강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곳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안내를 좀 부탁해도 되겠는가.”
“제가 모시지요.”
혁련천후가 나서려다가 혁련강의 눈총을 받고는 뒤로 물러섰다.
혁련강이 모두를 향해 껄껄 웃었다.
“허허허! 이런 사람들하고는. 어째 그렇게 눈치라고는 없는 겐가.”
담대소천이 비로소 혁련강의 뜻을 알아채고는 모두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자! 자! 다들 들어가자고.”
모두가 머리를 긁적이며 거처로 돌아갔다.
왕전의 손에 이끌려 거처로 돌아가는 영호수란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혁련천후와 독고혜는 장원의 지붕에서 나란히 만월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으면 무척이나 운치 있을 광경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특히 독고혜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변명 같지만 당신과 오랫동안 함께하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고 여겨 줬으면 좋겠다. 그동안 조부님과 함께하며 몸속의 내공을 완벽하게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조부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테지.”
“그럴게요.”
힘없이 대답하는 독고혜.
혁련천후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항상 생각하고 있다. 언젠가는 당신과 단둘이서 산속에 틀어박혀 살 거라고.”
“그럼 지금 둘이서 산으로 들어가요.”
“…….”
“농담이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혁련천후는 독고혜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턱을 들어 올렸다.
“내겐 네가 전부다.”
“사랑해요…….”
뜨거운 입맞춤은 만월의 질투를 받으며 한동안 이어졌다.
그때 그들이 선 지붕의 반대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움찔거렸다.
영호수란이었다. 만월 아래에서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둘을 보며 그녀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커다랗게 떠진 눈에선 이미 두 줄기 액체가 뺨을 타고 흐르는 중이었다.
‘바보같이 왜 나와 가지고선…….’
잠을 이루지 못해 지붕 위로 올라왔는데 설마 저들이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둘의 관계를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사랑을 나누는 광경을 목도하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돌아섰다.
탁!
고개를 숙이며 몸을 돌리려던 그녀의 발에 지붕의 기와가 걸려 밑으로 떨어졌다.
순간 주변 공기가 가볍게 흔들리며 그녀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혁련천후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재빨리 눈물을 옷소매로 훔친 영호수란이 조금은 당황한 투로 대답했다.
“달, 달 보러 나왔어요.”
황급히 둘러대는 영호수란.
그런 그녀를 응시하던 혁련천후가 이채를 머금었다.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뾰족하게 쏘아 댔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독고혜가 혁련천후의 옆에 내려섰다.
영호수란임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먼저 들어가세요.]
혁련천후가 독고혜를 돌아보았다.
더 있고 싶은데 벌써 들어가라니, 라는 눈빛에 독고혜가 얼른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혁련천후는 어쩔 수 없이 거처로 돌아갔다.
그가 일언반구 없이 내려가자 영호수란은 서러움에 울컥했다.
간신히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쉴 틈 없이 흘러내렸다. 독고혜 앞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독고혜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울지 마. 난 십 년을 기다렸던 사랑이야. 고작 이 정도로 힘들어하고 아파할 거면 나도 란 매 편이 되어 줄 수 없어.”
“죄송해요. 제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독고혜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영호수란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흘린 눈물이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오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사랑이 어디 원하는 대로 되고 말고 하겠어. 그냥 그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변함없이 저이를 전처럼 대해 줘. 그러다 보면 언젠가 란 매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거야. 물론 난, 란 매 편이 되어 줄 거야. 알았지?”
영호수란이 서럽게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혜가 만월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에 혁련천후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아주 씁쓸한 그런 미소였다.
‘혼자 차지하기엔 너무 큰 사람이야. 그 사람은…….’
그래도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사내의 심장에 자신이 깃들어 있음을 새삼 확인했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었다.
캉!
백홍의 울음이 들렸다.
건너편 지붕에서 훌쩍 솟아오른 백홍이 독고혜의 어깨에 내려섰다.
끙! 끙!
울고 있는 영호수란을 앞발로 구르며 안절부절못하는 백홍. 만월에 비친 셋의 그림자는 구름이 밀려와 만월을 덮을 때까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제4장 광승의 흔적
장원의 전방을 두르고 솟아 있는 백어산의 곳곳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눈들이 번뜩거렸다.
가장 은밀한 장소엔 어김없이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모두가 신마성의 동태를 살피려고 각 문파들이 보낸 세작들이거나 첩보를 담당하는 자들이었다.
신마성이 천하가 주목하는 중심세력으로 올라섰음을 반증하는 광경이었다.
백어산의 가장 깊숙한 지점은 상당히 높은 암벽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열 명에 이르는 자들이 장원을 내려다보며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사련의 고수들이었다.
“마교놈들이 전혀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않는군요.”
“한시도 게을리하지 말고 살펴야 한다.”
“대제의 진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합니다. 곧 모든 전력을 모아 이곳으로 오신다고 하니 그 안에 철저히 놈들의 허점을 찾아내야만 문책을 면할 수 있습니다. 자칫 대제의 마음에 들 만한 정보를 찾아내지 못하면…….”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하고 눈에 힘이나 줘라!”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지막이 호통을 치고는 분을 못 이긴 듯, 거칠게 침을 뱉었다.
금양(金陽)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는 사련, 첩보 부대의 수장으로 과거 정도맹에서도 몸을 담았던 전력이 있다.
첫 번째 격돌에서 무참한 패배를 당한 갈무극이 대대적인 총공세를 퍼붓기 전에 신마성의 조그마한 허점이라도 찾아낼 요량으로 이들을 사전에 보낸 것인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자 금양으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이곳에 온 지 닷새가 지나갔건만 첩보는 고사하고 허송세월만 보냈으니 금양은 초조함과 더불어 화마저 치밀었다.
“어떻게 된 것이 밖으로 나가는 놈은 하나도 없고 들어가는 놈들만 있단 말이냐.”
그때였다.
“어! 누가 나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정문을 통해 누군가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칠흑 같은 흑발에 역시 흑포를 걸친 것을 보고는 누군가 나지막이 외쳤다.
“신마성주라는 자와 닮았습니다!”
“멍청한 놈! 흑발에 흑포만 걸치면 다 신마성주냐. 호들갑 떨지 말고 다른 놈들이 더 나올 수도 있으니 놓치지 말고 지켜보도록!”
“예.”
안광을 번뜩이며 쳐다보던 금양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신마성주는 아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저자가 신마성주라면 당연히 배웅을 하는 놈들이 있어야지 않느냐. 저것 봐라. 단 한 명도 없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흑포인의 뒤를 따라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성주라면 결코 저럴 수는 없는 법이다.
“너희 두 명은 저놈의 뒤를 쫓아라.”
“예!”
좌측에 섰던 둘이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금양은 북쪽으로 걸어가는 흑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다시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정문이 닫혔다.
“저 안에 꼭꼭 틀어박혀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 * *
혁련천후는 일부러 산과 가까운 곳에 나있는 길을 이용했다.
걸어가면서 기감을 열어 주변을 살폈다. 역시 곳곳에서 사람의 호흡이 느껴졌다.
‘고생들이 많군. 후후후.’
이미 정체불명의 인문들이 여기를 감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해서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짐작하지 못하게 사람들의 배웅을 말렸다. 쓸어버리자는 수하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은 것은 그만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용성과 빙궁일까?’
기운이 전해지는 곳은 모두 세 곳. 하나같이 은신하기 좋은 위치였다.
혁련천후는 사련을 제외하면 용성과 빙궁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확신을 할 순 없었다.
의외의 세력이 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정도맹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겠지.’
그들이 교류의 손짓으로 청룡단을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정도맹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고 있다. 과거의 앙금은 쉽사리 씻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사련이나 용성만큼이나 정도맹도 신마성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평화가 찾아오면 그땐 신마성이 정도맹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테니까.
‘일단 걸려드는 놈들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북쪽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지만 혁련강을 믿었다. 조부의 능력이라면 자신이 없어도 능히 신마성을 이끌고 갈 수 있으리라.
‘나의 대에서 악연의 끝을 봐야 한다.’
마경과 마공을 이은 것으로 추측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제압하려면 천살강기와 구룡삼세(九龍三細)의 완성이 시급했다. 그러자면 금역으로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천살강기의 사나움을 억제하면서 수련을 하자면 금역의 특별한 기운에 의지해야 한다. 물론 굳이 금역이 아니더라도 가능하지만 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하자면 역시 금역이 최고의 장소다.
‘과연 그들도 나를 주시하고 있을까? 혁련이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조부의 말로는 천하에 그들의 세력이 점조직으로 퍼져 있다고 했다. 희귀 성인 혁련 씨를 쓰는 자신의 출현에 그들이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을 터, 지금껏 겪었던 사건들 중에서 몇 건 정도는 그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 지금까지는 개입이 없었다고 해도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지금 천하는 혁련천후라는 자신의 이름을 오성과 동등하게 올려놓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들이 그 소문을 모를 리 없으니 분명 자신의 정체를 캐보기 위해서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달려들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고달픈 삶이 되겠군.’
씁쓸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번거로울 줄 알았다면 차라리 화산의 석수, 돌아온 화산의 제자로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끼악!
독수리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 위, 상공을 맴돌았다. 상념을 거둔 그는 슬쩍 주변을 흘긋거렸다.
‘나를 쫓아오는 건가?’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팍!
순간 그의 육신이 벼락처럼 앞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 * *
“놈이 갑자기 내달립니다!”
“멍청한 놈들이 은밀하게 뒤를 밟으라고 했더니 들킨 모양이구나. 모두 함께 저놈을 쫓는다!”
느닷없이 속도를 내는 혁련천후를 보며 금양은 먼저 보낸 수하들을 믿지 못하여 직접 몸을 날렸다.
모두가 잠행을 풀고 경공을 펼쳤다.
하나같이 상당한 수준의 경공술이었다. 짧은 시간에 거리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혁련천후가 일부러 적당한 속도로 달리고 있음을 금양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금양은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들켰다면 굳이 뒤를 밟을 필요 없이 사로잡아 족치면 된다고 여겼다.
그때였다.
“엇!”
금양이 흠칫하며 경공을 중단했다.
자신들이 쫓던 사내와 자신들의 가운데로 모습을 나타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미처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금양의 수하들이 뒤늦게 멈추려고 했지만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번쩍!
“크악!”
한 줄기 섬광이 일었다.
동시에 금양의 수하들 중 네 명의 목이 뎅강 잘려 날아갔다.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결과에 금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할 말을 잃었다.
“여기는 네놈들이 설칠 곳이 못 된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 소름 끼치는 음성이 금양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흘러내린 선혈들이 태양빛에 반사되어 뜨거운 김을 피워내는 참혹한 현장의 중심에서 자신을 향해 싸늘히 노려보는 적포인들.
금양은 수천 개의 칼날이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착각을 일으켰다.
‘헉!’
진짜 칼이 날아들었다.
피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금양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때, 목에 한 줄기 혈선이 생겨났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금양의 육신이 머리와 분리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콱!
적포인 하나가 금양의 머리를 사정없이 밟으며 싸늘히 중얼거렸다.
“사련의 개 따위가 우리의 사냥감을 노리다니…….”
퍼석!
금양과 그 수하들을 무참히 도륙한 적포인들은 멀어져 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유령처럼 노려보다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