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귀환무사 133화>
* * *
거칠 것이 없었던 용성이 제대로 발목을 잡혔다.
용성의 지배자, 손유는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폭풍전마대의 몰살이 가져다준 충격이었다.
손유가 화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분통을 터뜨렸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주력이 빠진 신마성조차 무너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대패를 하고 물러났다니, 고작 그따위로 본 성과 손을 잡고 천하 제패를 입에 담았단 말인가!”
애꿎은 갈무극이 손유의 원망 대상으로 올랐다.
옆에 서 있던 손무가 조심스럽게 말하고 나섰다.
“싸움의 막바지에 신마성주와 오왕이 끼어들었다고 합니다. 놈들이 그토록 빠른 시간에 섬서까지 돌아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허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본 갈무극은 이대로 물러설 위인이 아닙니다. 조만간에 다시 병력을 이끌고 신마성을 향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야지. 이대로 멍청하게 꼬리를 말고 있으면 동맹을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어떻게든 사련의 손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적당히 구슬려 그들로 하여금 신마성을 치게 해야 합니다. 설사 사련이 이기지 못하더라도 신마성의 전력만 갉아 놓는다면 그 자체로 우리에겐 크나큰 득이 될 것입니다.”
손무의 그와 같은 말에 손유의 붉어진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기분이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버럭 화를 냈다.
“놈은 도대체 어딜 가서 지금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돌아오실 기한이 지났습니다만…….”
“돌아오면 당장 내게 들르라고 전해라! 정신 나간 그 늙은이도 함께 끌고 와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손무는 머리를 조아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폭풍전마대의 몰살로 인해 한번 평정심을 잃어버린 손유가 좀처럼 냉철함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그는 냉정하고 치밀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좀처럼 삭이질 못하는 단점이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손유가 언성을 높였다.
“부상막의 막주에게 전하라. 원하는 모든 것을 줄 테니, 그들의 숨은 전력을 내놓으라고 말이다. 안 되면 네 딸이라도 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
손무의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어졌다.
딸을 주라니. 그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지만 내색을 할 수가 없어 슬그머니 머리를 조아려서 굳어진 표정을 감추었다.
손유는 야망을 위해서는 혈육의 목을 베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인물임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해서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부당한 경우를 당해도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만 쉬어야겠다!”
“편히 쉬십시오.”
손유가 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섰다. 간신히 숨통이 트인 손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그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역시 저 분에게 나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인가.”
용성의 꾀주머니라 불리는 손무가 제 딸을 내놓으라는 손유의 말 한마디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새빨간 죽립에 적색 장포를 걸친 인물들이 정도맹의 남부 지부의 외곽을 두르며 솟아오른 산의 정상에 서서 중원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적포인의 옆에는 칠흑처럼 짙은 흑포를 걸친 자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놈들에겐 소식이 없느냐?”
적포인의 물음에 한 인물이 공손히 대답하고 나섰다.
“전서가 끊긴 지가 열흘이 지났습니다. 유소를 죽인 자를 죽이기 전에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으니 기다리지 않으시는 것이…….”
“유소를 죽인 놈이 도왕 북궁천소임이 밝혀졌다. 게다가 창왕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무조건 돌아왔어야지. 제깟 놈들의 실력으로 그 둘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겼단 말인가.”
작은 목소리였지만 은은한 노기가 배어 있었다.
흑포인이 조심스럽게 말하고 나섰다.
“인자술을 이용하여 암습을 한다면 제아무리 오왕이라도 충분히 죽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놈들! 오왕 중에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
“살왕 흑야의 감각을 뚫어 낼 자신이 있다면 어디 너도 한번 가 보아라!”
적포인의 말에 뒤쪽에 늘어선 자들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고금 최강의 자객이라는 살왕 흑야의 감각을 뚫어낼 자, 단연코 당대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음일까.
다섯의 눈빛이 동시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적포인의 죽립이 가볍게 흔들렸다.
“서둘러 아이를 보내어 놈들을 데려오너라.”
“예!”
“폭풍전마대의 몰살 때문에 용성주, 그자가 멸천조의 투입을 요구해 올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이번 기회에 우리의 몫을 복건성까지 넓혀 놓아야 한다. 알겠느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흑포인들의 기계적인 대답에 적포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죽립 사이로 얼핏 드러난 머리는 특이하게도 변발에 가까웠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얇은 입술은 사악함을 풀풀 풍겼는데, 이자가 바로 인자들의 제왕이라 불리는 동영 부상막의 주인이다.
여색을 밥보다 좋아하는 위인으로 쾌검의 달인이기도 하다.
유소의 복수를 하러 북궁천소와 조윤을 찾아 떠난 수하들 때문에 낯빛이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여인을 취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멸천조를 보러 가겠다.”
“예!”
* * *
타칭 어설픈 살수, 홍무가 꽤나 분주했다.
사공진무가 허리에 손을 얹고서 뭘 찾느라 정신이 없는 홍무에게 눈을 부라렸다.
“자식이 정신머리하고는, 그 중요한 걸 어디 둔지도 모르다니! 쯧쯧!”
“분명 여기 두었는데…….”
“혹시. 네가 슬쩍 해 먹은 것 아니냐?”
홍무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미쳤다고 그걸 먹습니까? 어차피 먹어봐야 제겐 효과도 없는데…….”
“그렇지. 넌 먹어 봐야 고작 보약 먹은 효과 정도밖엔 안 될 테니, 그렇다면 누가…… 혹시 형님들이?”
사공진무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음침하게 웃고 있는 왕전과 북궁천소의 얼굴이 떠오르자 사공진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지금 자신이 일전에 담근 술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온갖 진귀한 약초를 넣어 만든 그 술은 혁련천후를 위해 특별히 담근 것인데 그게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공진무는 왕전 등을 의심했다.
아니 확신했다.
“이 양반들이 어쩐지 요즘 힘이 넘치더라니까!”
사공진무가 홱 몸을 돌려 식당을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앉아서 쉬려던 홍무다 다시 벌떡 일어섰다.
“일단 가진 것 중 최고급이 금존청이지? 그거 몇 병이나 있어?”
“열 병 정도 있습니다. 일단 그거라도 드릴까요?”
“주공께서 고기를 좋아하시니 안주는 알아서 만들어, 그리고 혹시 모자랄 수도 있으니 애들 시켜서 술 몇 병 더 사 놓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사공진무가 나가 버리자 홍무는 돼지고기와 온갖 채소, 양념들을 만드느라 분주를 떨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살수를 꿈꾸는 홍무의 칼질이 지금은 요리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 분께 직접 음식을 만들어 드리는 게 얼마만이냐?”
홍무는 신이 났다.
혁련천후와 혁련강에게 갖다 줄 술상이다. 흑야가 이상이라면 혁련천후는 꿈이다. 그를 위해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일단 며칠째 밤샘을 하셨으니 죽으로 속을 달래야지. 그렇다면 잣죽이 최고지! 그리고 고기를 좋아하시니 돼지고기보단 쇠고기를 날로 구워 깨를 볶아 뽑은 기름을 찍어서…… 크으!”
치이익!
커다란 솥에서 연신 김이 올라왔다.
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요리를 하느라 정신줄을 놓아버린 홍무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설픈 살수 아저씨 뭐 해요?”
뒤에서 들려온 아름다운 목소리에 홍무가 고개를 돌렸다.
영호수란이 고개를 빠끔 내밀고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익어 가는 솥 안의 요리를 보고 있었다. 순간 홍무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술 냄새…… 그렇다면 그 술을 이분이…….’
그랬다.
영호수란에게서 제법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그때 홍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영호수란의 손에 쥐어진 술병, 사공진무가 눈에 불을 켜고서 찾았던 바로 그 술병이었다.
“헉! 그걸 드신 겁니까?”
“왜? 마시면 안 되는 독주라도 돼요? 아니면 아까워서? 에이, 어설픈 살수 아저씨, 이제 보니 엄청 쫀쫀한 사람이네.”
“그, 그게 아니라…….”
“쳇! 됐어요! 안주나 한 접시 줘요. 앞으로 내가 사 놓은 금존청, 마시기만 해 봐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됐어요! 흥!”
홍무가 엉겁결에 내밀은 접시를 낚아챈 영호수란이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그 술은 여자가 마시면 안 되는 걸로 아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영호수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홍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다시 본업에 충실했다.
치이익!
고기가 익어가면서 점점 더 구수한 냄새가 실내를 가득 덮어 갔다.
“그나저나 무슨 대화를 이렇게 오래 하실까?”
혁련천후와 혁련강은 아직도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잠시 후, 요리가 완성되자 홍무는 조심스럽게 접시에 담아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향한 곳은 혁련천후의 거처였다.
혁련강과 함께 거처에 들어간 지, 오늘로써 딱 나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홍무는 다시 주방으로 뛰어가야 했다.
술상이 금방 비워진 탓이었다.
잠시 후, 상당한 양의 술과 음식이 또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흘러갔다.
그때까지도 혁련천후는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독고혜조차도 부르지 않았다.
장원의 모든 사람들은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또다시 상당한 양의 술과 음식이 들어갔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난 다음 날 아침에 혁련천후와 혁련강이 드디어 거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붉게 충혈이 된 눈동자와 허옇게 뜬 안색은 그야말로 술에 찌들 대로 찌든 모습이었다.
왕전을 비롯한 모두가 멀뚱한 모습으로 둘을 응시했다.
“속을 달래셔야죠.”
독고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녀는 혁련천후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물론 자신을 볼 때면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성질의 따뜻함이었다.
“속을 풀만한 국을 곧 준비하겠습니다.”
홍무가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갔다. 혁련강이 주변을 둘러싼 모두를 느릿하게 둘러보며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허허!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구나.”
“제겐 과분한 친구들입니다.”
혁련천후의 말투가 무척이나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혁련강의 시선이 마교의 고수들이 기거하는 거처에 머물렀다. 잠시 눈빛을 가라앉히더니 돌연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마기를 지닌 자들이 꽤 있는데. 함께하는 사람들이냐?”
오왕을 비롯한 모두가 크게 놀랐다.
여기서 마교의 고수들이 머무는 곳과는 꽤 거리가 있다. 한데 마기를 느끼다니. 게다가 지금 그들은 건물 안에 머물고 있지 않는가.
혁련천후조차도 혁련강의 경지에 새삼 감탄했다.
천하제일인 일존 견오, 괜히 천하제일이라는 호칭이 붙었을까.
‘나와 싸울 때…… 어쩌면 전력을 다하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높겠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북궁천소와 관산악은 투기로 일렁이는 눈빛을 혁련강에게 고정시켰다. 강자를 보면 일단은 싸우고 싶어 하는 그들이다.
그들의 속내를 짐작한 혁련천후가 피식 웃고는 전음을 날렸다.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예.]
혁련천후가 검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칠 주야를 굶었더니 매우 시장한데…….”
“주방으로 가세요.”
“가시지요.”
“그러자꾸나.”
혁련천후와 혁련강이 앞서 걷고 그 뒤에 독고혜가 따랐다. 서로의 눈치를 살펴보던 다른 이들도 이내 뒤를 쫓아 걸었다.
그때 혁련강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뒤를 따르던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당분간 일존 견오는 잊어 주게.”
“……예?”
“다른 이들에게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이네.”
“아! 알겠습니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투기를 드러내었던 관산악과 북궁천소가 가장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인 견오, 아니 혁련강이라는 존재의 크기는 천하의 그 누구보다 크고도 높은 것, 그가 이곳에 있음이 알려지면 세상의 모든 이목이 자신들에게로 쏠릴 것이 뻔했다. 확실히 혁련강을 대하는 혁련천후의 태도는 바뀌어 있었다. 말투나 태도, 눈빛, 모든 것이 그랬다.
식사는 매우 간단하게 끝났다.
모두는 독고혜와 영호수란이 내어온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간간이 독고혜와 영호수란을 보며 연신 흡족한 미소를 짓는 혁련강, 그런 그를 보며 눈을 반짝이던 영호수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뭔가 특별한 사이가 분명해. 나를 보는 저 눈빛은 분명 내가 마음에 드신 눈치야. 그렇다면…….’
영호수란이 모종의 결심을 하는 순간이었다.
혁련천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혁련강을 응시했다.
“수련을 해야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대략 일 년 정도 걸릴 듯합니다. 그동안 이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고작 일 년만을 부탁하는 것이냐?”
“원하시면…….”
“내가 등을 밀어도 떠날 생각이 없으니 그리 알아라.”
독고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말을 들어 보면 일 년 동안 이곳을 떠나겠다는 것이 아닌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늘이 드리운 건 영호수란도 마찬가지였다.
막 뭔가를 하겠다며 결심을 했는데 이곳을 떠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