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귀환무사 132화>
“물론 그 천살강기 덕분에 네가 천하의 추격을 받을 때, 본능이 그곳으로 너를 이끌었을 게다. 아니었다면 절대 찾아갈 수 없는 곳이 그곳이지. 어쨌든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누구라도 그 상황에선 그렇게 했을 테니까. 부모란 원래 다 그런 법이지.”
“제 아버지께서는…… 강했습니까?”
“지금의 너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게 모든 것의 원인이 되었지. 그 정도 능력이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여겼을 테니까.”
혁련강의 노안이 회한으로 물들었다.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제 아버지와 가문의 호위들을 죽일 정도로 강한 놈들이 왜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의 무력이라면 당시의 정도맹 정도는 쉽게 쓸어버리고도 남을 전력이 아닙니까.”
“허허! 나 때문이란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쉽게 세상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야. 삼백 년 전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리고 당시 정도맹주였던 기우량이라는 자의 역할도 컸지.”
“기우량이라면…….”
“그는 정도맹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자였다. 가진 무공이나 지혜는 가히 하늘에 닿았다고 알려진 위인이었지. 어쩌면 당시의 나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을 만큼 그는 절대강자였단다. 그라는 존재 때문에라도 그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야.”
“그는 사라진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만…….”
“확실치는 않다만 은퇴를 하고서 정도맹의 모처에서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 물론 추정일 뿐이야.”
혁련천후는 기우량의 존재가 거론되자 자신도 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돋아남을 느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속을 채워 왔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죽여야 할 존재를 떠올렸다.
기운이 사라져 버린 그가 이 시점에서 떠오른다는 것이 의문이었지만 이내 혁련강을 쳐다봤다.
차를 한 모금 머금은 혁련강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마공을 이은 자들 만큼 그의 행방 또한 중요하단다. 그가 갑자기 왜 은퇴를 했는지 알고 있는 자, 아무도 없더군. 그 정도의 위치라면 필시 세 마두의 후예들이 발호할 것쯤은 예상하고 준비했어야 했지. 아무튼 뭔가 있는 작자야. 그 기우량이라는 자…….”
혁련천후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혁련강의 어깨를 향했다. 저 넓은 어깨가 지금 천하의 안녕을 지켜 내고 있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살아 있다면 꽤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건 그렇고 네가 들었던 곳은 혁련가의 핏줄 앞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가문의 성지란다. 내 도움 없이도 가문의 무공을 익혔다니 실로 대단하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본능에 의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무공을 연마할 때 대부분은 무의식중에 이루어졌으니까요.”
“허허! 그게 혁련가의 핏줄이 지닌 효능이란다. 네가 익힌 천살강기는 혁련가의 핏줄이 흐르지 않으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감히 익히지 못하는 것이지. 다만 놀라운 것은 그 아이가 그 기운을 지니고도 멀쩡하다는 것이지. 허허! 천생연분이 아마 그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혁련강은 독고혜를 거론했다. 물론 혁련천후도 그것을 짐작했다.
그는 영호수란도 있다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천생연분이라는 말에 영호수란이 연결되자 왠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혁련강이 다른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내가 그동안 알아냈던 놈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말해 주마.”
“천하를 위해서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가문을 위해서, 죽은 네 애비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들어야겠지.”
“말씀하십시오.”
혁련강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 * *
“주공과 그자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진천이 사공진무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딱딱한 자리가 싫어 일부러 밖에 나와 있던 둘은 찾아온 혁련강과 혁련천후의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둘의 관계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사실 모두는 혁련강이 혁련천후의 조부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혁련천후가 말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진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형님들 말로는 소문보다 더 강했다고 하던데. 역시 괜히 천하제일인은 아닌가 봐.”
“주공보다 강할까?”
“글쎄…….”
사공진무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라면 당연히 혁련천후의 손을 들어줬겠지만 상대가 당대의 최강자인 천하제일인 견오(혁련강)이니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진천이 삼 층을 흘긋거리며 기지개를 쭉 폈다.
“일전에 무리했더니 후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군. 빌어먹을 새끼들! 이번에 다시 쳐들어오면 이번에는 깡그리 통구이로 만들어 줄 테다.”
“그때야 설마 놈들이 그렇게 불시에 몰려올지를 몰라 방심을 했었다만 지금은 다르지. 사련이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저 강을 넘어서지 못할 거야. 내 머릿속에 든 진법에 대한 모든 것을 펼쳐 놨으니 아마 꽤나 볼만할 거다.”
“뒤쪽도 신경 써야지.”
진천이 손가락으로 장원의 뒷산을 가리켰다. 사공진무가 눈을 가늘게 하고 째려보며 답했다.
“걱정되면 네가 한번 뚫어보지그래.”
“됐다. 내가 미쳤다고 사서 고생을 하냐.”
“큭큭! 하여간 덕분에 나태함을 떨쳐 내고 심기일전을 할 수가 있어서 나름 좋지 않으냐.”
“그렇긴 하지.”
둘이 각자 가장 편안 자세로 몸을 바꾸었다. 해가 떨어지고 장원을 찾았던 호법 곡영이 돌아갈 때까지도 혁련천후는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깜박 잠이 든 진천과 사공진무의 옆으로 향긋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사르륵!
옷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에 눈을 뜬 둘은 독고혜를 보고는 벌떡 일어섰다.
“엇! 주모님!”
“제가 방해가 되었군요.”
“아, 아닙니다. 한데 여긴 어쩐 일로…….”
독고혜가 삼 층을 올려다보고는 물었다.
“아직 대화 중이신가요?”
“벌써 반나절 동안 저러고 계십니다. 꽤 중요한 분 같기는 한데…….”
독고혜는 지난날, 혁련강이 자신에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그 아이를 네가 잘 보살펴 주렴.’
그 아이란 말이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거기에 한없이 따뜻한 눈빛과 어조는 마치 친할아버지 같다는 느낌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혁련천후와의 관계가 궁금했다.
‘혹시 혈육일까? 아니야. 지금껏 가족에 대한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녀에게조차 혁련강의 신분에 대해 말을 아낀 혁련천후였다. 문득 독고혜는 자신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화산에 입문한 이후의 모든 것이 전부였다.
가볍게 숨을 고른 그녀는 둘을 돌아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우리 술 한잔 할까요?”
“좋습니다!”
“제가 최상급 안주를 만들어 놓으라고 어설픈 살수에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사공진무가 재빨리 일 층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영호수란이 내려왔다.
“저도 같이 마실래요.”
“그러지 않아도 데리러 갈려고 했어. 얼른 가.”
두 여인이 밖으로 향하자 머리를 긁적이며 쳐다보던 진천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식당엔 때 아닌 술판이 벌어졌다. 각자 수련 중이던 오왕이 모두 몰려들었다.
화산의 제자들도 술 냄새를 맡고 끼어들자 악승과 신마각의 조장들도 질세라 한자리를 차지하며 끼어들었다.
술판은 밤을 새워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물론 독고혜와 영호수란은 새벽녘에 올라갔다. 해가 떠올라 하늘의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에도 혁련천후와 혁련강은 내려오지 않았다.
진천이 말했다.
“설마 대판 싸우고 양패구상을…….”
퍽!
“망할 놈이 못하는 말이 없네.”
진천이 왕전의 주먹을 한 대 얻어맞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때린 왕전도 막 그 생각을 하던 터였다. 거칠기만 한 두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제3장 화해
정도맹주 나백의 거처를 찾은 육승이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분이 사라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육승이 몇 마디를 더 건네자 나백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보았는가.”
“시간을 두고 네 번에 걸쳐 거처를 찾았는데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일언반구도 없이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사라지신 것도 놀랍지만 비영전의 이목을 속였다는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그곳을 경호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나백이 침중한 기색으로 육승을 쳐다봤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곧장 맹주께 달려오는 길입니다.”
“무조건 함구하게나.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절대 이 사실이 알려져선 곤란해.”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백은 식은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절대로 맹을 벗어나서는 안 될 존재가 사라졌다. 그는 오래 전, 화산파가 배출한 불세출의 청년 고수 석수를 제거할 때 선봉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때 그와 함께했던 영백의 죽음이 석수의 복수라 여긴 나백은 노파심에 그를 보다 안전한 곳에 머물게 했다.
그런데 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이토록 어지러운 상황에 그까지 속을 섞이다니…….’
나백이 입술을 곱씹었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강호의 정세 때문에 골치가 썩어 나는 마당이 아닌가.
“육 전주!”
“예! 맹주님!”
“은밀히 그의 행방을 찾아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목이 타오자 물을 한사발이나 마셔 버린 나백이 미간을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육승이 그런 나백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지금 천하에서 가장 골머리를 섞고 있는 사람이 맹주 나백이라 할 수 있다.
빙궁과 용성의 침략보다 더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거기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석수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나백의 피로는 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만에 하나 석수가 대놓고 복수행을 시작하면 천하는 점점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나백이 다소 힘 빠진 어조로 물었다.
“사련의 움직임은 어떤가.”
“당초 북쪽으로 갈 것이라 짐작되었던 그들이 신마성과의 결전에서 대패를 한 다음 곧장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허나 갈무극의 성정으로 보아 조만간 대대적으로 신마성을 치기 위해 다시 병력을 몰고 나올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마성을 친 목적을 알아야 하네. 이토록 천하가 어지러운 때 아무런 명분 없이 그냥 신마성을 칠 만큼 어리석고 무모한 갈무극이 아니지. 필시 노린 뜻이 있을 것이네.”
육승이 눈을 빛냈다.
“사련의 사절단이 용성과 접촉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두 세력 간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음이 의심됩니다. 만약 그들이 목적을 가지고 힘을 합했다면 중원의 후방을 뒤흔들 목적으로 신마성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련의 머리라는 사요승이 직접 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자가 직접 움직였다면 거의 동맹에 가까운 협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정도 사안이 아니면 이인자인 그자가 직접 움직일 리 없으니까요. 어쨌든 사요승이 복귀를 한 직후 곧장 신마성을 공격한 것을 보면 전장을 확대시켜 우리의 시선과 힘을 분산시킬 목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육승의 예측은 실로 정확했다.
왜 그를 정도맹과 적의 관계에 놓여 있는 모든 세력들이 척살 일순위에 올려놓는지 쉽게 짐작이 갔다.
나백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도맹을 흔들려는 수작으로 신마성을 쳤다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아닙니다. 용성과의 전투에서 신마성은 엄청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용성의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았던 그들이니 동맹의 조건으로 갈무극에게 신마성을 칠 것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갈무극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선뜻 수락을 했을 것입니다. 당대천하에 가장 큰 화제를 몰며 부상하는 신마성을 무너뜨린다면 갈무극, 본인은 물론이고 사련의 이름값이 하루아침에 천하의 중심에 설 거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추측은 사련과 용성이 손을 잡았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육승의 말투는 저절로 믿게 하는 마력 같은 것이 존재했다.
나백도 이내 그의 말에 수긍하고 나섰다.
“자네 예측대로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았을 것이네. 만에 하나 사련이 그러한 목적으로 신마성을 쳤다면 우리로선 신마성에게 또 한 번의 크나큰 신세를 졌다고 봐야겠지. 덕분에 사련, 놈들의 기세가 꺾여도 제대로 꺾였지 않은가. 어쨌든 청룡단을 신마성으로 보낸 것은 참으로 좋은 선택이었네.”
청룡단을 신마성으로 보내자고 한 사람은 바로 육승이었다.
나백의 칭찬에 육승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네 같은 사람이 맹을 이끌어 가야 하는데…….”
“맹주님!”
육승이 당황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백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허허! 그냥 해 본 말일세. 그건 그렇고 마교주는 당분간 그곳에 있겠다고 했다지?”
“곡호법이 보내온 전서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신마성에 있다는 것이 꺼림칙합니다.”
“두 세력이 하나로 합칠까 봐 그러는 겐가?”
육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신마성의 비위를 거슬러선 안 된다며 맹의 수뇌부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청룡단을 그곳으로 보낸 것도 그들을 매개체로 하여 우의를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만에 하나 신마성과 마교가 하나로 뭉쳐진다면 살련과 빙궁, 그리고 용성에 버금가는, 어쩌면 더 강력한 문파가 탄생한다고 봐야 한다.
나백이 육승의 속내를 달랬다.
“그럴 일이야 있겠는가. 비록 빙궁에 패했다고는 하나, 뇌 교주의 자존심을 가볍게 여겨선 아니 되네. 쓰러진 마교의 부흥을 위해 언젠가는 다시 신강으로 돌아갈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예.”
나백이 몸을 일으켰다.
“가세나. 일단 빙궁이 비록 움직이지 않고는 있다지만 북쪽을 경계할 고수들의 편성을 서둘러 끝내고 출진 준비를 해 놓는 것이 좋겠지.”
“누구를 보낼 건지 생각은 해 두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허나 나중에 수뇌부들을 모아 다시 한 번 논의는 해 봐야지 않겠는가.”
둘은 거처를 빠져나와 맹의 연무장으로 향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곳엔 각파에서 추가적으로 차출된 고수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