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귀환무사 131화>
* * *
혁련강은 강가에서 멱을 감으며 고함을 지르는 신마각의 무사들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리고 서 있었다. 그는 시선을 장원으로 던졌다.
주변산세와 절묘하게 이루어진 건물들의 배치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장원 주변을 두르고 있는 기묘한 절진은 천문에 통달한 그로서도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대단한 아이들이 모였군. 허허! 그래야지. 혁련세가의 후예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혁련천후를 떠올리자 씁쓸한 미소가 얼굴로 번져갔다.
자신을 보며 한에 맺힌 울분을 토해 내던 그 얼굴이 그날 이후로 한시도 가슴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장원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문이 열리며 혁련천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옆에 섰던 진천이 슬그머니 안으로 사라졌다.
“천살강기로 인해 화를 입었던 모양이구나.”
혁련천후의 전신을 쓸어 보던 혁련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혁련천후는 대답 없이 그를 보고만 있었다. 또다시 가슴이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하자 가슴 가득 공기를 끌어들여 호흡을 다듬었다.
혁련강이 말을 이었다.
“네게 전할 것이 있어서 왔단다. 물론 너와 상관이 있는 것이고 천하의 안녕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지.”
“……!”
“허허! 차라도 한 잔 대접하지 않겠느냐? 네가 원한다면 전할 말만 건네고 곧 물러가마.”
혁련강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조금은 쓸쓸함이 묻어났다.
여전히 손자는 자신을 적을 대하듯 노려보고 섰다. 그것이 그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듯 아프게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공!”
멱을 감던 관산악이 혁련천후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둘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서 웃통도 벗은 채, 손에 대도를 쥐고 있었다.
관산악이 혁련강을 쳐다보며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그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삼 층으로 모셔라.”
그 말을 남기고 혁련천후가 장원으로 들어갔다. 혁련강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박대를 예상하고 온 그였다. 비록 차갑게 대하는 손자였지만 일단 자신을 만나겠다는 뜻을 전하자 그것만으로 그는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들어오슈!”
관산악이 매우 불량한 자세로 혁련강을 안내했다.
혁련강이 가까이 다가오자 관산악은 저절로 솟아나는 소름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검을 잡은 손이 축축해졌다. 강물이 아닌 분명한 땀이었다.
‘젠장! 내가 뭘 잘못 먹었나.’
용기와 본능은 다르다.
아무리 용기를 내어 거칠게 대해 보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손바닥을 적신 땀이 그 증거였다.
* * *
탁!
술잔을 놓는 혁련천후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부정하려고 그토록 애를 썼던 혈육이었건만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마주 앉자 떨리는 심장은 어쩔 수 없었다.
“허허!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었구나.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군.”
“……!”
여전히 혁련천후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라 봐야 했다.
술잔을 잡아 가는 혁련강의 손을 보며 그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절대 고수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왜소하고 가냘파 보이는 혁련강의 손은 온통 주름투성 이였다.
“궁금하지 않느냐.”
뜬금없는 물음에 혁련천후는 혁련강을 직시했다.
혁련강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네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말해 주마.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지금 와서 알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갑게 내뱉은 말이지만 어조는 전과 달리 바뀌어 있었다.
물론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혁련강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확실히 달라졌다고 그는 느꼈다. 그 조금의 변화가 그는 무척이나 기뻤다.
“네겐 그저 미안하단 말밖엔 할 말이 없다만 나름 이유가 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천하를 들먹여 네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만, 천하와 엮여 함께 가는 것이 우리 혁련가의 숙명이란다.”
“지금도 충분히 엮여 있습니다.”
“허허! 그것이 우연이라고 보느냐? 네가 지금 사련과 싸우고 신마성이라는 단체를 설립한 것이…….”
“오직 내 뜻이었습니다.”
혁련강이 고개를 저었다.
“신마의 전설을 알고 있겠지? 천하 모든 무사들의 꿈과 우상인 그 전설을 말이다.”
“신마의 전설 따위는 믿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신마성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있단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너와 네게 씌워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천 년을 두고 이어진 가문의 숙명이지.”
혁련천후의 시선이 혁련강의 두 눈을 똑바로 향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혁련강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혁련강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침묵은 깨어졌다.
아주 먼 옛날부터 천산을 넘어가는 대평원의 끝자락엔 깊이를 추정할 수 없는 천장 단애가 존재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곳을 산자의 걸음이 허용되지 않는 천년금역이라 부르기 시작하며 발길을 꺼렸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눈으로 뒤덮여 있는 그곳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을 지닌 동토였다.
하지만 그 단애 밑은 세상이 모르는 존재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는데, 위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그곳은 천계를 연상시키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혁련세가!
말 그대로 혁련을 성으로 쓰는 사람들의 터전이 그곳이었고 그들의 신분은 강호인들이 안다면 경악을 하고도 남을 엄청난 존재들이었다.
신마!
바로 언제부턴가 강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신마의 전설, 그 신마의 주인공이 바로 혁련세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절대 과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뒤집을 힘을 지니고도 절대, 강호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아는 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였던가, 그들은 강호인들이 모르게 강호의 일에 관여를 해야만 했다. 그것이 삼백 년 전이다.
당시 강호는 삼 인의 대마두로 인해 하루에도 수백이 죽어 나가는 혈겁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그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잔악성은 고금에 남을 정도로 포악했다.
그들을 잡고자 산문을 열었던 소림이 피의 제물로 바쳐졌으며 검의 조종이라 불리는 무당의 산문이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보다 못한 강호는 모든 세력을 모아 그들과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벌였지만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때 죽어 간 강호의 고수들이 천을 넘어갔으며 그들이 흘린 피가 요란평원의 대지를 축축하게 적실 정도였다. 그나마 천의 죽음으로 삼 인의 대마두에게 중상을 입힌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평원에 오연하게 선 삼 인의 대마두는 강호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다시 돌아오는 그날이 강호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평원의 끝자락으로 사라졌다. 사라졌던 그들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한 강호는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지의 차이는 단시간에 극복할 수 없는 것, 천하는 멸망의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란평원에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을 경계하던 정도맹의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보다 못한 마교의 고수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지만 교주를 비롯한 장로들 모두가 그들의 칼날 아래 한 줌 고혼으로 사라졌다.
“강호는 멸망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비롯된 그 말이 바람을 타고 천하를 흐르기 시작할 무렵, 흑발을 휘날리며 검을 든 사내가 대마두들의 앞에 나타났다.
중원을 향하려던 세 마두의 앞을 막아선 그 사내는 고작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청년, 그는 감히 세 마두와 겨루고자 했다.
그리고 시작된 싸움, 사람이 사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가공했던 싸움은 지금껏 없었다. 요란평원의 대지가 흔들렸다.
하늘도 인간의 능력에 두려움을 갖고 비를 쏟아 냈다. 삼 대 일의 대격돌은 칠주야를 이어졌고 여덟 번째 해가 뜨던 그날 아침에 넷의 모습은 요란평원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숨어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볼 수 없었다.
번쩍 하는 빛의 폭발과 함께 넷의 육신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대마두들이 돌아올 것을 염려하던 사람들은 서서히 그들을 잊어 갔다. 흑발 사내에 대한 고마움도, 그가 누군가에 대한 의문도, 사람들의 대마두들에 대한 공포보다는 못했다.
일 년이 흐르고 십 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백 년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어 이백 년이 더 흐른 지금은 그날을 기억하는 자, 아무도 없었다.
“그분이 본가의 칠대 가주이셨던 선조님이셨지. 그들과 양패구상을 하시어 금역으로 떨어진 그분은 결국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단다.”
오랜 시간, 가문의 비사를 말했던 혁련강은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놀랍기만 한 전대의 비사에 혁련천후는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냉담할 뿐이었다.
혁련강이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경고하셨단다. 삼 인의 대마두가 언젠가는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고, 그들이 떨어진 곳은 너도 알다시피 금역의 혈지(血池)였지. 생명체는 들어서지 못하는 그곳에 그들의 육신이 떨어졌음에도 그분은 그들의 재림을 두려워하시고 경계하셨단다. 그러던 어느 날 세가의 시종들 중, 여인 몇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지. 흔적을 쫓던 선조들은 혈지에서 여인들의 마지막 발자국을 보았다고 하는구나.”
“혹시, 그 여인들이 셋의 후예를 낳아 길렀습니까?”
혁련천후의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한 말투에 혁련강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손자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이 이토록 작은 변화에도 크게 반응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 지금 내가 수십 년을 쫓았던 흔적이 바로 그 삼 인의 후예들이지. 생명체가 서식하지 못하는 혈지에서 어떻게 후손을 이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만 그들의 후예가 중원의 모처에 있음은 확실하단다. 다만 어디에 어느 정도의 세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만, 마공의 진경을 이었다면 지금 중원을 침공한 용성, 빙궁 따윈 조족지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혁련강의 얼굴이 다소 굳어졌다.
“용성과 부상막에도 혈마의 진경을 이은 자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그들은 아니다. 비록 혈마의 진경을 익히고는 있었다만 고작 그 정도로 후예라 할 수는 없지. 어떻게 그들에게 흘러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철저히 놈들의 발호에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게다.”
“아직 그곳의 성주라는 자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그자가 진정한 혈마의 후예라면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두르지 말거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드러났을 때, 움직이는 것이 가장 최선이야. 어찌 됐든 혈마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조만간 다른 자들의 마공도 나타날 게다. 우린 그날을 준비하면 되는 게지.”
우리라는 말에 혁련천후는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기분이 일었다.
“고수들의 추격을 받을 때,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본능이 그곳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 내며 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이었다니, 우습군요. 하나만 묻겠습니다. 저를 화산으로 보내야 했던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러나 미미한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가볍게 숨을 내쉰 혁련강이 말을 이었다.
“백 년 전이구나. 네 증조부이자 나의 부친께선 가문을 봉문하셨단다. 그분께선 삼 인의 후예가 중원으로 흘러들었다고 확신을 가지신 것 같더구나. 해서 가문을 호위하던 고수들 다섯을 중원으로 보내셨지.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그들을 찾으라고 보내신 것이지. 그것이 수십 년 후든, 수백 년 후든 대를 이어 가며 그 임무를 그들에게 맡기셨단다. 그들이 중원에 나간 지 칠십 년이 채 안 된 어느 날, 다섯 모두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더구나. 물론 그들의 사인은 삼 인의 마공에 의한 것이었지. 그때 네 애비의 나이가 스물둘이었다. 그 누구보다 혈기가 왕성했던 네 애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서 중원으로 나섰단다. 그때 네가 막 태어났을 때였지. 하지만 그 아이도 결국은…….”
혁련강이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혁련천후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네, 어미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심장에 병을 얻어 애비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지.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단다. 신분을 감추고 중원을 드나들 때, 사귀었던 친구에게 너를 맡기고는 나도 그들을 쫓아야만 했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기억에 없던 오 년의 세월이 드러났다.
죽는 날까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그 모든 것이 이렇게 드러났다. 혁련천후는 심장이 뜨겁게 요동침을 느꼈다. 분노였다.
“힘을 아꼈다가 천천히 처리해도 될 일이 아닙니까?”
“너 때문이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힘으로 놈들을 찾아가서 죽임을 당하셨단 말입니까?”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묻자 혁련강의 얼굴이 비감으로 물들었다.
“네 아버지는 천살강기를 극성까지 연마했었다. 하지만 일부를 네게 심어 주었지. 그 때문에 놈들과 싸울 때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제게 심어 주다니요? 고작 갓 태어난 제게 왜…….”
“네 신체가 가문의 천살강기를 익히기엔 다소 허약했었단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껏 모를 일이다만 아무튼 정화된 천살강기를 심어 준 뒤에는 완벽한 신체로 거듭날 수 있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넌 영원히 천살강기를 익히지 못했을 게야.”
굳게 다문 입술이 뜨거운 선혈을 흘려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