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귀환무사 127화>
“뒤쪽으로 물러서 있어.”
검후와 일행들을 뒤로 물린 그가 말없이 검을 뽑아 갔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그의 행동을 호숙아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털썩!
검집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켜보던 진유가 크게 놀랐다. 칼집을 버린다는 것은 상대를 모조리 베어 버리기 전에는 칼을 거두지 않는다는 무사들만의 철칙이었다.
혁련천후의 시선이 호숙아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저들과 같은 편이라면 이곳을 넘어가지 못한다.”
“웃기는 놈이군. 네놈이 신마성의 성주라도 된단 말이냐!”
치르륵!
혁련천후의 검 끝에 청광이 일어나며 검의 전신을 두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바로 신마성주다.”
“……!”
* * *
콰직!
마교주 뇌어양의 우장이 생강시의 가슴을 그대로 통타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뼈가 으스러져 즉사를 면치 못할 강력한 공세에도 생강시는 잠시 기우뚱거렸을 뿐, 이내 뇌어양을 향해 폭풍처럼 달려들었다.
“진정, 마물이로구나!”
뇌어양의 얼굴이 불신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뇌어양이 어이가 없어 잠시 손을 놓을 정도였다.
검을 사용하는 검노의 검이 생강시의 어깨를 베었지만 옷이 날아갔을 뿐, 살갗엔 약간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었다. 베어진 살갗조차 금방 회복이 되니 상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생강시를 제외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괴량과 다른 고수들 둘뿐이었다.
생강시들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하나 둘 죽어 나가고 만 것이었다. 마교의 고수들이 강했던 탓도 있지만 워낙에 집요하게 생강시를 피해 공격을 집중한 까닭이었다.
괴량도 자신에게 집중되는 공세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강시가 아니었다면 벌써 황천길을 수십 번은 더 갔을 그였다.
주변을 돌아본 뇌어양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 문제로구나.”
생강시를 피해 사련의 고수들을 죽이던 고수들이 서서히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생강시의 공세를 피해 가며 사련의 고수들을 베어 넘기는 것은 배의 체력을 요구했다. 어지간한 장용백조차도 숨이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하라!”
뇌어양의 외침에 마교의 고수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괴량이 뒤늦게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이를 갈았다.
“마교의 놈들이 어떻게 이곳을…….”
처음엔 몰랐던 괴량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무공을 보고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는 빙궁과의 싸움에서 멸망을 당한 마교의 고수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아해함과 동시에 호숙아가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괴량은 주변을 돌아봤다.
“엇!”
강의 뒤쪽 산을 돌아보던 괴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번쩍이는 검강이 산의 능선을 뒤덮고 있었다.
“뭐지? 설마 호숙아의 부대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벌써 올 시간이 지났건만 호숙아는 오지 않고 있었다면 저곳에서 누군가와 맞닥뜨렸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괴량은 안력을 돋우어 능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교의 고수들과 흑야를 비롯한 장원의 인물들도 지금에서야 발견한 듯, 모두가 백어산의 능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같은 곳을 응시하던 흑야의 입가에 미소가 얼핏 걸렸다.
“주공께서 오셨군.”
“……진정 신마성주가 오셨소?”
“그렇소.”
그 와중에도 섬광은 계속해서 번뜩이고 있었다.
흑야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장원의 좌측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수림 사이로 벗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두에 전신에 병기를 두른 북궁천소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흑야의 입가에 더욱더 진한 미소가 번져갔다.
한편, 바람처럼 달려가는 북궁천소는 강가에 몰려 있는 마교의 고수들과 사련의 고수들, 모두를 싸잡아 거칠게 노려봤다.
“뭐야, 저놈들은.”
방향을 잘못 잡은 탓에 그들은 장원의 뒤쪽 능선을 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덕분에 도착시간이 꽤나 걸려 버렸다.
조윤이 능선을 나지막이 외쳤다.
“소천과 왕전은 저곳으로 가라.”
그는 능선에서 번뜩이는 섬광만으로 혁련천후가 싸우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전과 소천은 이미 강을 넘어서고 있었다. 북궁천소가 유성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흑야의 곁에 내려섰다.
“뭐 하는 새끼들이냐?”
“사련.”
“사련? 저놈들이 왜 여기 와서 설치는 거냐.”
“신마성을 세상에서 지워 주겠다고 왔다는군. 그리고 저들은 마교주와 그의 수하들이다. 어쩌다 보니 한편이 되었다.”
“한편이라니.”
“나중에 말해 주마.”
북궁천소와 조윤이 가볍게 놀랐다.
뇌어양은 그들도 경시 못할 거물이다.
조윤이 흑야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장원을 보라고 맡겨 놨더니 애물단지를 들여놨군.”
“어쩌다 보니 그랬게 됐다니까.”
“흐흐! 어쩌고저쩌고 간에 일단 쳐들어온 놈들을 그냥 살려 보내선 곤란하지. 사련이라고 했지. 개새끼들! 잘 걸렸다.”
북궁천소가 대부를 꺼내 들려고 하자 흑야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굉혈도를 쓰는 것이 좋을 거다. 저놈들, 생강시라고 하는데 꽤 강해.”
“생강시? 그게 정말이냐?”
천하의 북궁천소도 생강시라는 말에는 놀라는 기색을 비쳤다.
흑야가 검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다시 시작을 해 봐야겠지.”
“꼬맹이들은 왜 안 보이는 거냐.”
“안에서 쉬고 있다.”
진천과 사공진무는 장원으로 들어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북궁천소가 침을 뱉으며 굉혈도를 뽑았다.
스르릉!
“퉤! 생강시라면 제대로 싸워 볼 수 있겠군.”
“너무 설치지 마라. 그러다 머리통 날아간다.”
“네놈이나 조심해라. 망할.”
조윤과 북궁천소는 흑야의 뒤를 따라 강가로 걸어갔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을 의아한빛으로 응시하던 마교의 고수들이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흙먼지가 일며 모습을 드러내는 일단의 무리들.
그 선두에 관산악이 대도를 뽑아 들고 폭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뇌어양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관대주가 아닌가.”
“맞습니다. 틀림없는 관대주입니다.”
대답을 하는 장용백도 크게 놀란 표정으로 관산악을 응시했다.
관산악의 뒤에 악승과 지금은 신마각의 무사들로 입장이 바뀐 흑영대가 따르고 있었다.
“산악이 교주를 뵙소이다!”
관산악은 달려오는 그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대뜸 방향을 틀어 사련의 고수들을 덮쳤다.
“성질하고는…….”
북궁천소가 투덜거리고는 굉혈도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조윤의 창은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우리도 도와야지 않겠습니까.”
장용백의 물음에 뇌어양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가 바람처럼 날아가자 마교의 고수들도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 * *
퍽!
“크악!”
잘려진 수급이 뱅글뱅글 돌면서 피를 사방으로 뿌리고는 수풀 속으로 떨어졌다.
사련의 고수들은 혁련천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검으로 막으면 검과 사람이 통째로 잘려 날아가니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호숙아의 두 눈은 이미 경악으로 흔들린 지 오래였다.
“도대체 저런 무지막지한 자가 강호에 있었단 말이냐?”
어지간한 구파의 하나와 대등한 전력이 그 하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더구나 꽤 강해 보이는 화산의 제자들은 지금껏 손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으니 호숙아는 눈알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퍽 퍽!
혁련천후는 적포를 걸친 자들은 제쳐 두고 철저히 다른 자들만 노렸다. 죽이는 속도와 횟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늦어지고 줄어들었다.
비록 자신 하나를 당해 내지는 못했지만 그들도 꽤나 강한 고수들이었다.
특히 간혹 자신을 베어 드는 적포인들의 공세는 중검(重劍)을 연상시키듯 무겁고 파괴적이었다.
검과 검이 정면으로 부딪히면 묵직한 무게감이 손목을 울릴 정도였다.
“무조건 놈을 잡아라!”
호숙아는 전의를 다지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껏 다소 방관적이었던 적포인들이 동료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자 비로소 혁련천후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다른 생강시들이었다.
설마설마 했던 호숙아는 짧은 시간에 상당한 사상자를 내고서야 본격적으로 생강시를 투입했다. 그로서는 뼈아픈 실책이라 할 수 있었다.
크으으…….
괴이한 신음이 적포인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혁련천후의 눈빛이 조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련이 어떻게 이들을 제조했단 말인가?’
그는 처음부터 생강시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해서 일부러 산자들을 노려 최대한 그 숫자를 줄여 놓은 것이다. 생강시의 존재는 금역 안에도 있었다. 물론 생강시를 최초로 제조했던 자의 주검이다.
그가 죽으면서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생강시가 떡하니 자신을 노리고 검을 겨누고 있었다.
혈마의 흔적에 이어 또 다른 흔적을 하나 발견하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내 두 눈은 예의 싸늘함으로 덮여갔다.
치르륵!
검이 새파란 검강을 뿜어냈다.
얼핏 보면 검강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천살강기였다.
천살강기를 검에 둘러 공세를 펼치면 배의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내공의 소모가 극심했기에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만큼 생강시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혁련천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극성의 천살강기를 끌어 올리자 그의 주변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몰아쳤다.
콰우우!
치솟은 흙먼지가 마치 거꾸로 흐르는 폭포수처럼 펼쳐졌다.
[모두 멀리 물러서!]
독고혜와 영호수란,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이 다소 머뭇거렸다.
그들도 싸우고 싶었다.
[끼어들면 방해만 된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속내를 짐작한 혁련천후가 확고히 못을 박았다. 그 전음에 모두는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그들의 머리 위쪽에서 왕전과 소천이 떨어져 내렸다.
“저희들이 왔습니다.”
“죽입니까?”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예!”
혁련천후의 지극히 간단한 말에 둘은 지체 없이 사련의 고수들, 한가운데로 짓쳐 들어갔다.
[극성에 이르기 전에는 천살강기를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된다!]
혁련천후는 순간 혁련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뭔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애써 떨쳐 내고는 검을 휘둘렀다.
번쩍!
퍽!
호숙아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혁련천후의 공격이 갑자기 더 강력해졌다. 수하 두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설마 힘을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놀람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새롭게 나타난 담대소천과 왕전. 그들의 파괴력도 결코 혁련천후에 못지않았다.
“위험하다…….”
호숙아의 머릿속이 불안감으로 젖어가는 순간이었다.
* * *
섬서의 외곽 지역,
제법 울창한 수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사련의 주축 부대가 잠시 이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백 명이 훨씬 넘어가는 자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식사와 술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생강시로 추정되는 적포인들은 그 자리에 선 채, 아무런 음식도 들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이 둥그렇게 둘러싼 풀밭에 전신을 불타는 듯 시뻘건 전포를 걸친 갈무극이 비단을 깔고 그 위에 앉아 수하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수하들을 노려보는 갈무극의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괴량과 호숙아가 아직 합류를 하지 않고 있어서였다.
“합류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설마 신마성에 발목을 잡힌 것은 아니겠지?”
“괴량과 호숙아가 거느린 생강시만 무려 이십여 기가 됩니다. 그 정도면 소림도 쓸어버릴 전력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한 전력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껏 합류하질 않느냐, 이 말이 아니냐!”
“아이를 보냈으니 곧 소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갈무극의 호통에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사련은 전력의 상당부분을 용성과의 전쟁에 쏟아부은 구파와 오대세가를 치기 위해 서둘러 강호로 나왔다.
그것은 용성과의 계약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갈무극, 본인도 평소 눈에 가시 같았던 구파와 오대세가를 이번 기회에 무참히 밟아 줄 작정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에 앞서 신흥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던 신마성을 쓸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자 했던 갈무극은 상당한 전력이 투입되고도 지금껏 소식이 감감하자 초조함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당연히 압승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그것은 사련의 모든 인물들도 다 같은 마음이었다. 한데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합류를 하지 않고 있자 슬그머니 불안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신마성주와 그 휘하의 무적 고수들을 잠시 떠올린 갈무극이 수하들에게 물었다.
“설마 놈들이 그 시간에 섬서로 돌아온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습니다. 밤을 낮 삼아 달렸다고 해도 시간이 허락지 않는 거리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설사 삼왕이 돌아왔다고 해도 괴량과 호숙아의 전력이면 신마성 쯤은 반시진 안에 잿더미로 만들고도 충분합니다.”
갈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괴량과 호숙아보다 생강시를 믿었다.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백 년에 걸쳐 제조했던 생강시다. 하나가 자신과 맞먹은 괴력을 지닌 생강시, 비록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능력은 없지만 무한한 내공과 금강불괴에 이른 신체 능력은 그 어떤 수하들보다 확실한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을 주고 제조한 생강시다. 그들이 나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랬다.
비록 지금은 용성과 협력 관계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그의 최종목표는 천하제패다. 그 선봉에 생강시가 서 준다면 능히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펑!
북쪽 상공에서 터진 신호탄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하늘로 올라갔다.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호숙아의 적색탄입니다!”
“뭣이! 적색탄!”
갈무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적색탄이면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알리는 신호였다. 괴량의 지원 요청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련의 인물들은 호숙아의 위기 신호에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느냐? 생강시 스물이 투입되고도 위기 신호를 보내다니!”
“대제! 저희들이 다녀오겠습니다!”
각전의 전주들과 대주들이 병기를 추스르며 앞으로 나섰다.
갈무극이 외쳤다.
“가서 놈들의 머리를 가지고 오너라!”
갈무극의 섬뜩한 명을 받은 자들이 빠르게 신호가 터진 곳으로 질주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련 최강의 고수들이라 단 하나의 생강시도 대동하지 않은 그들은 이내 갈무극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