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귀환무사 125화>
철무옥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어렸다.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꽤 난감했다. 제아무리 세상의 지탄을 받는 사련일지라도 자신에겐 나고 자란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여기서 자신이 하기에 따라서 사련과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이 걱정이었다.
물론 두려워서가 아니다. 자신 때문에 신마성이 곤란해질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진천이 괴량을 보며 히죽 웃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하셨군. 감히 신마성의 멸문을 운운하다니, 반대로 너희 사련이 거지 신세가 될 수도 있음은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군.”
“어린 새끼가 주둥이만 살았구나. 곱게 죽여 주려고 했더니 그 주둥이 때문에 사지가 잘리는 고통을 맛보며 죽을 것이다.”
괴량의 옆에 섰던 장한이 험악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양어깨에 대부를 교차 멘 그는 사련에서 꽤 유명한 고수였다. 물론 철무옥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함에 얼굴이 굳어진 철무옥이 흑야를 돌아봤다.
“미안합니다. 형님!”
“네 뜻을 확실히 저놈들에게 보여 줘라.”
“알겠소!”
괴량을 비롯한 사련의 고수들이 다소 놀란 표정들을 했다. 철무옥의 자존심은 련주 갈무극도 어쩌지 못했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철무옥이 호리호리한 흑야더러 형님이란다. 사련에서의 철무옥을 떠올리면 상상이 안 가는 일이었다.
“개가 되었군. 철무옥!”
괴량이 비웃었다. 다른 자들의 얼굴에도 같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발끈한 것은 홍무였다.
“젠장! 주변이 온통 쓰레기 냄새뿐이군. 에이 재수 없어! 퉤!”
놀라운 발전이었다.
어쩌면 흑야와의 수련을 통해 발전된 실력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표출일 수도 있었다. 괴량의 얼굴에 살기가 드리웠다.
“네놈을 가장 먼저 죽여 주지. 쳐라!”
다짜고짜 명령을 내린 괴량은 자신도 검을 뽑아 들고 몸을 날렸다. 진천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사라지며 한풀 서리가 끼었다.
그가 손을 들어 좌우로 펼치는 시늉을 하자 주변의 돌과 나무들이 사련과 자신들의 가운데 장벽으로 둘러졌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바위들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자 달려들던 사련의 고수들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 내려섰다.
“생각 잘해라. 너희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련이 통째로 지옥불에 처박힐 수도 있다.”
진천의 경고성 발언에 괴량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고작 환술 따위에 걸음을 물리다니, 어서 놈들을 썰어 내지 못할까!”
사련의 고수들이 재차 몸을 날렸다. 흑야의 미간에 잔주름이 생겨났다. 생각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특히 수장으로 보이는 괴량과 청포를 걸친 자들은 꽤 묘한 분위기를 풍겨 내고 있었다. 그들이 몸을 움직일 때 주변 공기의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그 정도의 수준이라면 자신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옥 말고 노리는 것이 또 있었나?’
단순히 무옥을 잡아 가기 위해 온 것이라고 보기엔 이들의 전력이 지나치게 강했다. 흑야는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육신을 향해 떨어지는 강맹한 공세를 피해 뒤쪽으로 미끄러진 그는 검을 뽑아 들고 바닥을 찼다.
깡!
그의 일 검이 괴량의 검에 막혔다. 예상대로 상당한 강자였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진천과 사공진무가 전장에 뛰어들었다. 홍무도 피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고 맹렬하게 돌진해 들어갔다.
* * *
“싸움이 일었습니다!”
장원의 뒤쪽 밭에서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장용백이 눈을 가늘게 하고서 중얼거렸다. 그들과 함께 밭일을 하던 장원의 사람들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상당한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파생된 기운들은 비록 상당한 거리 밖이라도 일반인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살벌하고 강력했다.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용백이 뇌어양을 보며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뇌어양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도와주는 것이야 별게 없었지만 자칫 자신들의 신분이 탄로 날 것이 염려되었다. 보아하니 장원의 인물들과 싸우는 자들은 사련의 고수들로 보였다.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꽤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평소 자신을 노렸던 수많은 적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수도 있다. 뇌어양은 그 부분이 가장 걱정이었다.
살로가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다.
“얼굴을 바꾸고 적당히 도와주는 것이 좋겠소.”
좋은 방법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공만으로 얼굴의 골격을 조정할 수 있는 축골공을 시전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들, 전혀 다른 얼굴로 나선다면 신분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좋소. 단, 기본적인 무공을 사용하는 것으로 합시다. 자칫 천하에 우리가 여기 있음을 알릴 수도 있으니 말이오.”
말을 하는 검로의 얼굴은 이미 자신들과 밭일을 하던 노인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 광경에 두려움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귀신을 본 것처럼 몸을 떨었다. 뇌어양이 일어섰다.
“모두 나설 필요는 없으니 열 명 정도만 도와주시게.”
“쉬고 계십시오!”
장용백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천마사로 중 검로와 광로가 다른 고수들과 함께 장원의 지붕을 넘어 날아갔다. 뇌어양이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들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그대들의 은혜에 보답코자 하는 것이니 너무 두려워들 마시오. 자! 우리는 저쪽으로 가서 쉬는 것이 좋겠소.”
그가 싸움이 보이지 않는 장소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이들에게 보여 줄 순 없었다. 그런 뇌어양을 살로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볍게 고개를 저은 그도 몸을 일으켰다.
“봐서 좋을 게 없으니 저쪽으로들 가시게.”
스스로도 자신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 살로였다.
* * *
청명과 청진은 식사 준비를 하던 도중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소리에 재빨리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어!”
놀란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강가를 쳐다봤다. 가짜 사부들과 홍무가 상당수의 인물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명이 재빨리 뒤돌아가 검을 들고 왔다. 청진의 검을 그에게 던져 준 청명이 대뜸 몸을 날렸다.
“엉!”
엉겁결에 검을 받아 쥔 청진이 멀뚱거린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신도 몸을 날려 청명의 뒤를 쫓았다. 둘의 머리 위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청명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광이 할아범!”
밭을 일구고 농작을 하던 할아범이 보기에도 살벌한 검을 쥐고 있었다. 검로가 고개를 돌려 청명을 쳐다봤다.
“우리가 도울 것이니 그대들은 빠지는 것이 좋겠군.”
사람을 질식시킬 듯 살벌한 목소리에 청명은 그제야 그들이 마교의 인물들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함께 싸워야지요.”
청명이 앞을 달려가자 묘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던 검로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큭!
사련의 고수 하나가 사공진무의 검에 목이 날아갔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최초의 죽음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사련이 꽤 강한 자들을 보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확실히 뭔가 다른 뜻이 있었어. 이 정도면 어지간한 문파는 그냥 쓸어버릴 전력, 뭔가? 우리에게 노리는 다른 것이 있단 말인가?’
흑야는 최초 품었던 의구심에 확신을 더했다. 괴량의 공세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흑야 하나를 상대로 쉴 틈 없이 몰아쳤다. 망설였던 철무옥은 어느새 사련의 고수들과 손을 섞고 있었다.
‘놀랍군. 오왕이 빠져나간 전력이 이 정도였다니, 확실히 이놈들을 사전에 제거해 두는 것이 좋겠군. 두면 꽤나 골치 아픈 놈들이 될 것이 확실하다.’
괴량은 내심 이들의 전력에 놀라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끌고 온 자들은 강자들만 추려서 온 그야말로 사련의 핵심 전력이다.
추살전주를 지냈던 철무옥조차도 이겨낼 고수들이 즐비했는데, 싸움의 양상은 박빙으로 흐르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상대하는 차가운 사내와 금발 청년, 그리고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 미청년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시 못할 철무옥과 다소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상당한 쾌검을 구사하는 청년 역시 까다로운 상대였다.
쾅!
진천의 강력한 장법에 괴량의 뒤쪽에서 움직이던 사련의 고수 하나가 휘청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의 머리 위로 홍무의 검이 떨어졌다.
퍽!
피가 튀며 머리가 터져나갔다.
두 번째 사망자 역시 사련에서 나온 것이다. 괴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흑야에게 전력을 퍼부은 그는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괴량이 흑야를 보며 살기가 충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놀라운 놈들이군. 그 정도면 이름 없는 무지렁이는 아닐 터,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목적이 뭐지?”
흑야가 엉뚱하게 물었다. 괴량이 대답을 않자 다시 물었다.
“무옥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 신마성을 노리고 온 것이냐?”
“흐흐! 둘 다라고 하면 옳겠지.”
“신마성이 왜 너희들의 공격을 받아야 하지?”
“대제께선 뭣도 아닌 네놈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것을 무척 싫어하신다. 그리고 저 배신자 놈을 거둔 것에도 상당히 분노하고 계시지. 그냥 본 사련의 눈에 걸려든 것을 재수 없다고 여겨라. 물론 남쪽에 가 있는 네놈들의 성주와 오왕, 놈들도 조만간 너희들의 뒤를 따라 염부로 갈 것이니 먼저 가서 좋은 자리를 잡아 놓는 것이 수하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흑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신마성을 치러 온 것이다. 이 말인가?”
“흐흐! 그냥 싹수없는 놈들을 사전에 밟아 주려는 것이라 생각해라!”
괴량은 자신감이 넘쳤다. 비록 이들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 겪어서 알고 있었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은 여전했다. 그때 묵직한 음성이 장원 쪽에서 들려왔다.
“사련의 잡놈이 여긴 어인 일이냐?”
괴량의 시선이 흑야의 뒤쪽으로 던져졌다.
평범한 용모의 노인들과 화산 무복을 걸친 청년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괴량은 선두에서 걸어오는 노인을 쳐다봤다. 장대한 체구를 지녔지만 얼굴은 주름이 가득한 평범한 촌부의 그것과 같았다.
보통의 노인으로 변장을 한 검로였다.
당연히 괴량이 그를 알아볼 리 없었다. 검로가 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도 괴량은 모를 것이다.
천마사로는 오직 마교의 인물들만이 알고 있는 극강의 고수들, 흑야조차도 그를 마교의 지위 높은 고수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검로가 흑야를 보며 말했다.
“얻어먹은 밥값은 갚아야지.”
“밭일로 충분히 갚았소만…….”
“그럼 며칠 더 얻어먹을 밥값을 미리 지불한다고 생각하시게. 고리타분한 저 양반이 꼭 그러라고 시키더군.”
얕잡아 봤던 괴량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분위기가 생긴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작 지척에서 기세를 드러내자 하나하나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눈앞의 주름투성이 노인은 자신의 오감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었다.
검로의 뒤쪽에서 사람 하나가 나섰다. 역시 시커먼 촌부로 변장한 장용백이 손에 잡은 곡괭이를 흔들며 차갑게 웃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밭일을 하는 사람들, 곡괭이가 흙 대신 네놈들의 골통을 빠개고 싶다고 하는군. 자! 어떤 놈부터 조져 줄까?”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곡괭이를 보며 사련의 고수들은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을 닫았다.
마교 고수들의 기운에 잠시 긴장했던 괴량도 이내 지독한 살기를 드리웠다.
천하에 곡괭이를 무기로 사용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자들도 하나같이 농기구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낫을 든 자, 그리고 삽과 고랑을 고르는 삼지창처럼 생겨먹은 요상한 농기구까지 각양각색의 농기구가 괴량의 눈을 어지럽혔다.
‘내가 예민했었군. 빌어먹을 새끼들! 하기야 어차피 이 아이들이 있으니 천하의 오성이 오더라도 승리는 우리 것이다.’
괴량은 자신의 뒤쪽에 선 청포인들을 믿었다. 다른 고수들과는 달리 그들은 모두 열 명이다. 당장은 별다른 성과를 내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싸움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하나하나가 오성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할 엄청난 무력의 소유자들이다.
내공의 소모도, 체력의 고갈도 모르는 그들은 사련의 비밀 무기들이며 괴량,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줄 든든한 호위였다. 괴량이 섬뜩한 빛을 발하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모조리 쓸어버려라!”
사련의 고수들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