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귀환무사 124화>
앞을 걷던 촌부에게 장용백이 물었다.
“이곳의 주인이 무척 좋은 분인가 보오?”
촌부가 몸을 돌려 환하게 웃었다.
“아직 그분을 직접 뵙지는 못했습지요. 하지만 좋은 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보지도 않은 사람을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가?”
구자겸이 묻자 촌부가 다시 대답했다.
“그분의 수족을 자처하는 분들의 태도를 보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지요. 비록 무섭게 생기신 분들이나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무지렁이들을 인간적으로 대해 주시는 것을 보면 그 주인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
순간, 뇌어양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천마사로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먼 곳을 응시했다. 촌부의 말이 그들 모두에게 뭔가를 느끼게 해 주었다.
장용백이 안타까운 기색으로 뇌어양를 흘긋거렸다.
‘우리가 잘했다면 이런 치욕을 당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장용백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식당으로 들어선 그들은 잔뜩 차려진 음식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아침의 중년 여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뇌어양이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평소에도 이렇듯 식사를 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손님들이 오셨을 때만 이러지요. 평소엔 아주 검소한 식단으로 꾸립니다.”
“허허! 당연하지요. 제아무리 떠오르는 신흥 세력 신마성이라도 천하의 교주님께 함부로 할 순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도 사실 과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구자겸이 호탕하게 웃었다.
중년 여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저희들이 이곳에 왔을 때도 이런 대접을 받았습지요. 그땐 처음 먹어 보는 기름진 음식에 며칠 동안 배앓이를 하며 무척 고생했지요. 호호!”
구자겸의 얼굴이 머쓱하게 변했다.
“식습니다. 어서 식사들 하세요. 부족한 것이 있으면 저를 부르시면 된답니다.”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가자 식사는 시작되었다.
“허허! 그동안 내가 살았던 삶이 부끄럽구먼.”
“무슨 말씀이오?”
“생각들 해 보시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우리 처지가 옛날과 같았다면 저 평범한 민초들을 쳐다보기나 했겠소? 아마 교에서 기르던 짐승들과 같이 여겼을 것이오. 하지만 이곳 신마성의 성주는 저들을 우리와 같이 대했소. 아마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황제가 이곳에 들러도 아마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지 않을까 싶소이다.”
뇌어양이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입 먹으며 큰 소리를 냈다.
“참으로 맛있는 국이로다!”
그는 진정으로 기쁜 얼굴을 했다.
천하만마의 종주로서 군림하며 살았던 자신의 그 오연했던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일개 범부들에게서 느낀 것이다.
그런 범부들이 공경하는 신마성주, 얼굴조차 보지 못한 그를 위해 밭을 일구고 행동 하나, 말 하나에 정성을 쏟는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신마성주가 무척 보고 싶었다.
“허허! 그 덕 하나만으로 오왕을 부릴 자격이 있도다!”
뇌어양이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영문을 모르는 수뇌부들은 그저 말없이 식사를 하고만 있었다.
* * *
스스슥!
관산악과 신마각의 무사들은 빠르게 산악을 돌파했다. 일단 장원에 들러 진천에게 도움을 받기로 생각한 관산악은 밤을 낮 삼아 달린 끝에 백어산의 초입에 다다라 있었다.
이제 백어산만 넘어서면 장원이다.
“후! 엄청나게 달렸군. 조금 쉬었다 가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악승이 다가왔다.
“조금만 더 가면 장원입니다. 그냥 그곳에서 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별 차이 없어. 목이나 축이고 가자.”
무사 하나가 술병을 내밀자 단숨에 한 병을 마셔 버린 관산악은 입가를 훔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후! 그나저나 어디서 찾는단 말이냐?”
“중원의 곳곳에 암약하는 교의 인물들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분명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암호가 한 달 주기로 바뀐다. 너와 내가 교를 나온 것이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암호를 모른 채 점조직으로 구성된 그들을 어떻게 찾는단 말이냐?”
그 말에 악승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급한 마음에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관산악이 악승을 달랬다.
“진천, 놈에게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이니 너무 걱정 마라. 기상천외한 재주를 지닌 놈이니 분명 교주를 찾을 방도를 내놓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악승을 보며 관산악이 혀를 찼다.
“그럴 놈이 뭣 한다고 교를 나섰냐? 쯧쯧!”
“그거와 이건 다릅니다.”
“다르긴 개뿔! 그만 출발하자.”
관산악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백어산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계절 탓에 백어산은 울창한 수림으로 변해 있었다.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사람의 발길이 흔한 탓에 수풀은 그 밀도가 무척이나 높았다.
당연히 속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걸리는 수풀을 모조리 베어 가며 전진했다.
관산악의 칼질 한 번에 상당한 넓이의 길이 생겨났다. 주변의 무사들은 그 기세가 두려워 감히 접근조차 못했다.
“시간이 되면 네놈들 수련을 좀 강화해야겠어. 저번 용성처럼 허접한 새끼들과 싸워 죽는다면 내가 용서 못한다. 알았나!”
“예!”
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이야 관산악에게 수련을 받는 것이 꿈이었다. 갑자기 무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악승이 관산악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죽을 때까지 헤어나지 못하겠지. 그래도 좋다!’
그를 보면 그냥 좋았다. 자신이 그랬고 무사들도 그랬다. 저 듬직한 등판을 쫓아 얼마를 헤맸던 자신들인가. 악승은 어금니를 깨물며 칼질에 박차를 가했다.
“대주님, 아, 각주님! 수상한 자들이 앞쪽에 있습니다.”
무사 하나가 재빨리 돌아와 관산악에게 보고했다. 눈을 빛낸 관산악이 무사와 함께 전방으로 달려갔다. 서른이 넘어가는 무림인들이 백어산의 능선에 모여 있었다.
‘저놈들은……?’
관산악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하나같이 적색 무복을 걸친 그들은 바로 사련의 고수들이었다. 가슴팍에 사(邪) 자를 노골적으로 새겨 넣고 다니는 자들은 오직 사련뿐이다.
관산악이 수하들에게 기척을 죽이라는 시늉을 하고는 몰래 그들의 가까이로 스며들었다.
‘흠! 놈들이 이곳엔 어쩐 일이지. 정도맹의 코앞에서 놀 만큼 간덩이가 부은 것인가?’
이곳은 정도맹의 지척이다. 평소의 사련이라면 얼씬도 하지 못하는 곳이 이곳인데 떼거리로 몰려든 것이 의문이었다.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피던 관산악의 얼굴이 조금은 굳어졌다.
‘제법 강한 놈들이군.’
그랬다.
사련의 고수들 모두가 상당한 고수들로 여겨졌다. 하나같이 태양혈이 불끈 솟아 나온 것으로 보아 결코 신마각의 아래가 아닌 듯 보였다.
그는 순간 갈등했다.
우회해서 돌아가면 저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니 은근슬쩍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이곳은 장원의 코앞이 아닌가.
‘젠장! 혼자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용성과의 싸움에서 몇이 죽은 신마각이다.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관산악은 우회해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가 빠르게 되돌아와 수하들을 우측 능선으로 이동시켰다.
‘젠장! 두 시진은 더 걸리게 생겼군. 다음에 걸리면 모조리 몰살이다. 새끼들!’
내심 사련의 고수들에게 이를 간 그는 빠르게 산을 타고 장원을 향했다.
* * *
흑야는 홍무에게 정적인 상태에서 상대의 심장을 일격에 가격할 수 있는 검법을 지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홍무의 자질이 뛰어났다. 그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에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는데, 흑야는 그런 홍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홍무를 붙잡고 온갖 기술을 전수하기 바빴다.
그들의 옆에서는 철무옥이 세상 편한 자세로 구경하고 있었다.
“자식아! 그 정도밖에 못하냐!”
철무옥이 홍무를 보며 짐짓 호통을 쳤다. 흑야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그는 히죽거리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심심하면 가서 누구라도 붙잡고 한판 붙어!”
“마교주와 한판 뜨자고 해 볼까요?”
“그러든지. 대신 멀리 가서 붙어라. 장원이 네놈이 흘린 피로 더럽혀지는 꼴은 못 보겠다.”
“흐흐! 천하의 마교주라도 나를 죽일 수는 없소. 물론 나를 이길 수는 있겠지만.”
흑야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날카롭게 쏘아 댔다.
“그 주둥이는 천하 최강임을 인정하마. 조금 쉬었다 하자.”
철무옥의 방해에 재미를 잃어버린 흑야가 술병을 빼앗아 입으로 가져갔다.
홍무가 땀을 훔치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력이 바닥이 날 때까지 수련을 했건만 홍무의 얼굴은 싱글벙글하다.
웃옷을 벗어 버린 홍무는 강으로 걸어갔다. 혹독한 수련 뒤에 강물에서 몸을 식히는 것은 어느덧 홍무의 일과가 되어 버렸다.
시원한 물줄기에 그대로 몸을 던지려던 홍무가 강의 건너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젠장! 강에만 오면 사람들이 나타나네.”
건너편에서 상당수의 인물들이 장원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짜증스러운 빛을 보였던 홍무의 얼굴이 다소 굳어졌다.
“뭐야? 좋은 놈들이 아니잖아!”
인물들의 기세는 확실히 사기가 넘쳤다. 여타 무림인들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닌 홍무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틀림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흑야를 부르려고 했지만 이미 그 옆에 흑야와 진천이 서 있었다.
“사련 놈들이 이곳엔 어쩐 일이지?”
“표정들을 보니 좋은 뜻으로 온 것은 아니군. 뭐야? 무옥의 배신 때문인가?”
“어쩌면…….”
흑야와 진천이 사련의 인물들을 보며 미간을 좁힐 즈음, 이미 마흔에 육박하는 사련의 고수들은 강 건너편에 도달해 있었다.
가운데 선 초로의 노인이 그들을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곳에 철무옥, 놈이 있다고 들었다. 맞나?”
“무슨 일인가?”
흑야가 하대로 물었다.
사련이 괜히 사파의 종주이겠나. 대번에 흑야의 하대에 발끈한 자들이 다짜고짜 살벌한 빛을 품으며 강을 뛰어올랐다.
흑야와 진천은 이 장 앞에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사련의 고수들을 보면서도 표정의 변화라곤 조금도 없었다. 무옥의 존재를 물었던 자가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신마성의 무사들이냐?”
“알면서 묻기는…….”
진천이 이죽거렸다.
달려들려는 고수들을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얼굴을 슬쩍 실룩거린 노인이 흑야를 똑바로 쳐다봤다.
“철무옥을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 주마. 단, 발뺌을 한다거나 수작을 부리면 오늘부로 너희 신마성은 잿더미로 변할 줄 알아라.”
물론 살려 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흑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신마성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제대로 돌아 버린 늙은이군.”
“흐흐! 오왕이 있는 신마성을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느냐.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광동에 있으니 우리들이면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고 보는데?”
노인은 사련의 무력 단체 암흑전의 전주 괴량이란 인물이었다. 련주 갈무극의 명령으로 신마성을 작살내러 온 괴량은 무서운 존재들이 없음을 알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오왕이 없으면 제아무리 천하를 떨어 울리기 시작한 신마성인들 두려울 것 없었다.
그때 장원에서 사공진무와 철무옥이 모습을 보였다.
사련의 고수들을 본 철무옥이 굳은 얼굴로 흑야의 옆에 섰다. 괴량의 눈에 사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고작 이따위에 몸을 담으려고 배신을 했더냐?”
“배신이 아니오. 그저 련주와 계약이 끝났을 뿐이오.”
“닥쳐라! 그동안 네게 베푼 련주의 은혜가 결코 작지 않건만 괘씸한 놈!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네놈과 이곳은 오늘로서 세상에서 사라질 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