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귀환무사 123화>
“결코 이름 없는 자는 아닌 듯, 한데 뉘시오? 아! 본인은 마교의 장로 장용백이라 하오.”
‘폭뢰도!’
흑야는 한 자루 도를 쥐면 뇌전처럼 몰아친다는 폭뢰도의 소문을 떠올렸다. 그 소문의 임자가 자신에게 자신의 신분을 물어오고 있다.
“신마성의 무사라오.”
“신마성!”
흑야의 말에 모두가 나지막이 부르짖으며 놀랐다.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구자겸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신마성의 거처가 섬서에 있음을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교의 세작들에게 받아 왔던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다급한 자신들의 처지에 그만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다.
뇌어양이 물었다.
“산악이 이곳에 있소?”
“곧 올 것이오.”
“관대주, 놈이 이곳에 있단 말씀이오?”
살로가 물었다.
“보고에 그렇게 적혀 있었소.”
살로가 고개를 들어 흑야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아이는 언제 오는가?”
하대였으나 흑야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들어가던 수저를 놓고 느릿하게 마교의 수뇌들을 돌아봤다. 다시 보니 뇌어양의 주변에 앉은 노인들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넷 모두가 뇌어양 못지않은 고수로 느껴졌다.
“소식에 이틀 후면 도착한다고 들었소. 아마 당신들을 찾아갈 생각인 듯했소.”
“우리들을?”
“놈이 아직 마교를 잊지 못하고 있더군. 악승, 그놈도 그렇고…….”
“악승도 이곳에 있었단 말이오?”
장용백이 놀라 다시 물었다.
그들은 악승과 흑영대가 이곳에 몸을 담은 것은 모르고 있었다. 아직 그것까지는 보고가 들어가지 않았던 탓이다.
고개를 끄덕인 흑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몸을 돌려 문으로 걸음을 놓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산악, 놈이 올 때까지 이곳에서 머무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당신들을 그냥 보냈다고 하면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 테니…….”
그 말을 남기고 흑야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허! 산악을 보고 가야지 않겠소.”
뇌어양은 관산악이 올 때까지 장원에 머무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가 자신을 떠나게 만든 그의 주인이라는 자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관산악과 흑영대 전체를 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마교의 수뇌들은 뜻밖의 상황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뇌어양의 속내를 짐작하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또한 죽은 자의 육신은 서서히 대지의 양분으로 돌아가 윤회를 시작한다.
그 누구도 자연의 그러한 법칙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만고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그것이 깨어지고 있었다.
목이 잘려 죽어 버린 당률이 죽은 그 자리에서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이미 잘린 머리는 육신을 찾아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느릿하게 일어서는 당률의 육신 또한 온기를 되찾고 있었다.
“크흐…….”
당률의 입에서 괴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뿌드득!
목을 돌리자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주변을 울렸다.
고금에 없을 괴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 죽었던 자가 회생할 수 있단 말인가.
떨어졌던 머리가 어떻게 다시 붙을 수 있단 말인가.
“크흐! 이런 날을 대비해 멸혼공(滅魂攻)을 익혀 두기 잘했군.”
당률이 전신을 돌아보며 괴소를 흘렸다.
평소의 백발에서 청발로 바뀌어 버린 그의 전신에서 지독한 사기(邪氣)가 넘쳐흘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북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놈이, 살아 돌아왔을 줄이야. 놈의 정체를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멸혼공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지금쯤 부패를 시작하는 시체에 불과했을 몸, 그는 육신을 베고 지나가던 그의 검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이내 지독한 사기로 지워 냈다.
당률의 두 눈이 시퍼런 안광을 뿜어냈다.
“멸혼공을 펼친 덕분에 독의 조종이라는 선조의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육신으로 사람의 삶은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었으나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 이제 천하에 나의 손에 살아날 자, 아무도 없으리라! 크하하!”
당률이 고개를 젖히고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시퍼런 독연이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 버렸다. 바닥을 기던 벌레들도,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들도 모조리 시커멓게 죽어 갔다. 마음을 먹으면 저절로 독공을 펼쳐 낸다는 무극의 경지에 당률이 올라선 것이다.
* * *
일행들은 벌써 섬서의 초입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모용미와 모용세가의 무사들도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당분간 위험한 사천을 떠나 장원에서 함께하기로 혁련천후가 수락한 것이다.
강자들에겐 그다지 힘든 속도가 아니었으나 모용미를 비롯한 젊은 무사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에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힘든 속도였다.
이미 대부분이 지쳐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였다.
“조금 쉬었다 가요. 지쳤어요.”
독고혜가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더 달렸다간 심장이 터져 죽을 듯 보이자 혁련천후는 할 수 없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일각을 쉬었다 간다!”
북궁천소의 말에 무사들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일각이라니.
그 짧은 시간에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순 없었다. 그들의 속내를 짐작한 모용단승이 차갑게 말했다.
“수련이라고 생각해!”
지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가를 피해 도망가는 세가의 처지에 그는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자신 혼자로서 어떻게 할 방법은 전무했다. 그나마 혁련천후가 당가 최강의 고수라는 독제 당률의 목을 벤 것이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당가와는 엄청난 전력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장원으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일정 기간 수련을 하면서 힘을 키우는 것이 좋겠다는 가짜 사부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모용단승, 그 역시도 그것이 최선이라 여기고 있었다.
혁련천후와 독고혜는 백랑과 놀기 바쁜 영호수란을 쳐다보며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독고혜가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귀엽지 않아요?”
“백랑?”
“아뇨, 란 매 말이에요.”
“글쎄…….”
“좋은 사람이에요. 착하고 순수하고 때론 상당히 열정적이기도 하고요. 저 나이 때 난, 저러지 못했는데…….”
혁련천후가 그녀를 돌아봤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훗! 사람들만 없으면 안기고 싶어요.”
“당신 외에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
뜬금없는 그의 말에 독고혜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의 말뜻을 충분히 짐작한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영호수란을 돌아봤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는 독고혜가 영호수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 그것을 미리 못 박아 두는 것이다. 독고혜가 가는 숨을 내쉬었다.
“후! 그게 말이나 이성처럼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인연이란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것, 당신의 마음이야 제겐 무척 고마운 것이지만 장담하진 마세요. 사랑이란 언제 어떻게 생겨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난 예외다.”
“풋! 장담하지 말라니까요.”
“내가 꼭 다른 여인을 더 취했으면 좋겠나? 그런 뜻으로 들리는군.”
독고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냥 장담하지 말라는 소리예요.”
캉!
백랑이 훌쩍 독고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영호수란이 바람처럼 날아왔다.
“쳇! 깨가 쏟아지시네.”
그녀는 백랑의 꼬리를 잡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죄 없는 백랑이 영호수란에게 몇 대 맞으며 비명을 질렀다.
눈을 부라리고 달려드는 북궁천소와 지지 않고 백랑을 휙 던져 버리는 영호수란을 보며 혁련천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귀여움의 기준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적어도 자신의 눈에 영호수란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잠시 후, 일행들은 빠르게 이동을 다시 시작했다.
* * *
흑야는 진천, 사공진무와 함께 장원의 이 층에서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했다.
연무장에 마교의 수뇌들이 모여 있었다.
“천하의 마교주가 저렇게 평범한 자일 줄은 정말 몰랐네.”
“그것보다는 얻어먹은 밥값을 하겠다고 저러는 것이 난 당최 이해되질 않는다.
저러니 빙궁에 잡아먹힌 것은 아닐까?”
진천과 사공진무가 마교의 수뇌들을 보며 머쓱한 표정들을 했다. 흑야가 그들을 나무랐다.
“사람은 소문으로만 판단해선 안 돼. 그런 식이라면 난 벌써 지옥에 갔어야지.”
“그런가요? 쩝! 하여튼 이해되질 않는군요. 그냥 쉬고 있어도 아무 말 않을 텐데 저 난리라니.”
지금 뇌어양과 마교의 수뇌들은 신세를 갚는다고 연무장 주변에 둘러져 있는 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곳에서 장원의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파인 고랑에 농작물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
뇌어양는 팔을 걷고서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연신 실수를 하는 천마사로에게 핀잔을 주는 그를 보며 초로의 노인이 연신 웃어 댔다.
“칼을 물고 자결을 해도 시원찮을 일을 당하고도 저런 여유를 보일 수 있다니 확실히 큰 인물이군요.”
“괜히 마교의 주인이냐?”
“듣기로 빙궁에 패하기는 했어도 전력은 대부분 보전되었다고 하던데, 다른 고수들은 어디 적당한 곳에 세력을 키우고 있겠군요.”
사공진무가 육포를 씹으며 물었다. 진천이 대답했다.
“저들이 싸움을 포기하고 교를 버렸다는 것은 그쪽에 엄청난 강자들이 출현했다고 봐야겠지. 적어도 뇌교주나 저 늙은이들조차 감당하기 힘든 그 정도의 강자들 말이지.”
진천이 천마사로를 가리켰다.
흑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뇌어양보다 그들이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특히 차갑기 그지없는 살로는 자신이 보아 온 자들 중, 가장 날카로운 예기를 지닌 듯 보였다.
“진천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강자들이 있었다면 뇌교주가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봐야지. 집단전에서 강자의 수가 부족한 쪽은 소수를 제외한 전원이 몰살당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확실히 저자는 큰 인물이다.”
“그렇지요. 저 정도의 위치에서 스스로 후퇴를 결정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사공진무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흑야가 몸을 일으켰다. 진천이 그를 보며 물었다.
“같이 일하시게요?”
“홍무 가르치러 간다.”
그가 이 층에서 내려가자 진천이 재빨리 흑야가 앉았던 안락한 의자에 몸을 얹었다. 노려보는 사공진무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인 그는 육포를 뜯어 입으러 가져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간 있을 때 죽이는 영단이나 좀 만들어 봐. 한 알 먹으면 내공이 쭉 올라가는 그런 것 말이야.”
“만들어도 네놈은 안 준다.”
“나야 뭐,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지. 환술이 딱히 내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환술 부리는 놈은 칼 맞으면 안 죽냐?”
“칼을 안 맞지, 자식아!”
“지랄, 당장 시험 한번 해 볼까? 맞는지 안 맞는지.”
진천이 몸을 돌렸다.
“귀찮다. 아! 날씨 좋다.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야겠다. 방해하지 마라!”
“팔자가 완전 개 팔자군, 자식아! 장원 주변에 설치한 진법이나 둘러봐! 곧 있으면 주공이 돌아오실 텐데, 왕전 형님한테 넌 죽었어.”
진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벌써 잠인 든 것이다. 인상을 그린 사공진무는 발로 머리를 밟는 시늉을 하고는 이 층을 내려갔다.
* * *
“허허! 먹을 줄이나 알았지 지금껏 이것이 이토록 고된 작업인 줄은 처음 알았군.”
뇌어양이 허리를 펴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제법 넓은 밭에 모종을 끝낸 그들은 밭을 내려와 식당으로 향했다.
촌부가 그들을 안내했다. 조금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는 천마사로를 향해 뇌어양이 말했다.
“허허! 신세를 졌으니 당연히 갚아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인상들 피고 웃으시오!”
“금덩어리 몇 개만 쥐여 주면 될 일을…….”
검로가 불만을 표시했다.
“그건 이들의 인정을 모독하는 것이오. 우리에게 처음 따뜻한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오. 비록 패도를 추구하는 우리들이지만 그 본성은 사람처럼 지녀야 하지 않겠소. 많은 것을 잃어 보니 조그마한 것이 무척 소중하다는 교훈을 얻었다오. 노부나 그대들이나 앞으로는 새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오.”
검로가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