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귀환무사 122화>
* * *
늦은 밤까지 홍무는 수련에 열중했다.
흑야의 지도로 일취월장, 경지가 상승 중인 것에 홍무는 힘든 것도 몰랐다.
지금도 모두가 자는 야밤에 홀로 연무장에 나와 쾌검을 다듬고 있었다.
슉! 슉!
홍무의 손에 쥐어진 검이 날카로운 소음을 울리며 밤하늘을 갈랐다. 주변을 날던 날파리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상승검학이 홍무의 손에서 펼쳐졌다.
“훅!”
홍무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에 한 시진을 쉬지 않고 수련을 한 덕분에 그의 육신은 후끈한 열기를 발산했다.
“이제 어느 정도 쾌검은 경지에 올랐다. 흑야 님께 은신술과 일격필살의 수법만 배우게 되면…….”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홍무는 전신을 짜릿하게 타고 흐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홍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치고 덥혀진 육신을 식히는 데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장소가 강이었다.
홍무는 걸어가면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을 벗어 버리자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무척이나 상쾌하게 해 주었다.
멈칫!
기분 좋게 강에 몸을 던지려던 홍무가 흠칫하더니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인물이 홍무의 눈에 보였다. 오감을 자극하는 기운이 다가오는 인물에게서 느껴졌다.
그 인물은 자신과 상극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살수와 가장 상극의 인물들은 바로 패도를 추구하는 마인들이다.
섬세하고 극쾌를 중시하는 살수와 묵직하고 파괴적인 것을 추구하는 마인들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부류라 할 수 있었다.
“누구냐!”
홍무가 검을 들어 올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늦은 밤, 결례를 좀 범하겠소이다.”
묵직한 음성이 인물에게서 흘러나왔다. 순간 홍무는 긴장을 풀었다.
상대의 음성에서 전혀 적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홍무의 코앞까지 다가와 가볍게 두 주먹을 마주 잡아 보였다.
“지나가던 길손인데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해서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귀장을 찾았소. 하룻밤 묵어갈 은혜를 부디 베풀어 주신다면 그 감사함을 절대 잊지 않겠소.”
장용백이 정중하게 부탁했다.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지금, 장용백은 오직 자신의 주군이 밤을 보낼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명감뿐이었다.
그것이 잠시나마 장용백에게서 패도적인 마인의 기질조차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홍무가 장용백의 전신을 살폈다. 커다란 덩치에 제법 사나운 인상을 지녔지만 정중한 태도에 마음이 흘깃한 홍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았소. 그깟 방 하나 내어 주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어서 들어오시오.”
“저기, 일행들이 있소만…….”
“아! 모두 함께 들어오시오.”
홍무가 짐짓 호탕하게 허락을 해 버렸다. 장용백이 거듭 고마움을 표하고 빠르게 되돌아갔다.
잠시 후, 홍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젠장! 뭐가 저렇게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무려 서른에 가까운 그림자가 시커멓게 홍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홍무는 철무옥을 떠올렸다.
그에게 야단을 맞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홍무는 힘없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 * *
장원에 갑작스럽게 소란이 일었다.
오밤중에 길손들이 무려 서른이나 찾았으니 당연했다.
잠을 자던 철무옥과 진천이 밖으로 나왔다.
홍무에게 사정을 들은 철무옥이 의외로 흔쾌히 머리를 끄덕이자 홍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른 명이 잘 공간이야 남아돌았다.
늘어날 문도들을 대비해 상당한 규모의 건물을 지어 놨기 때문이다.
홍무의 안내로 뇌어양 일행은 아직 송진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새 건물에서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
그래도 장원을 찾은 길손이라 아침이라도 대접할 요량에 뇌어양 일행을 찾은 홍무는 가장 먼저 마당에 나와 있던 천마사로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들에게서 죽음의 기운을 느낀 홍무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살수의 예민함에 천마사로의 기운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살로가 홍무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덕분에 밤이슬을 피할 수 있었네.”
다른 셋이 놀란 눈으로 살로를 돌아봤다.
살로의 그 같은 행동과 말은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들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홍무에게 사내답지 못하다고 두들겨 팼을 살로였다.
홍무가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변변한 음식이나마 조반을 준비해 놓았으니 모두들 오시라는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기세에 눌린 홍무의 어조는 무척이나 정중했다.
마침 건물을 나서던 뇌어양에게 살로가 말했다.
“아침을 하고 출발을 하십시다.”
“허허! 밤에 소란을 피운 것도 모자라 아침까지, 이거 우리가 지나친 폐를 끼치는구나. 참으로 고맙소이다.”
뇌어양은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이야 원래 아침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하들 때문에 염치 불구하고 홍무의 배려를 대번에 받아들였다. 건물을 돌아 커다란 식당에 모두가 들어섰다.
한참 식사를 준비 중인 사람들을 보며 장용백이 중얼거렸다.
“저들은 평범한 백성들이군요.”
“지금은 우리의 배를 채워 주는 은인들일세. 중원에 들어와 처음으로 받아 보는 인정이 이토록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네.”
장로 구자겸의 말에 모두의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천하만마의 위에서 오연하게 굽어보던 그들이 이런 신세가 될 줄은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뇌어양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가 부덕한 자신의 산물이라 여겼다.
“먹음직스럽습니다. 한 수저 드시지요.”
장용백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그릇을 뇌어양의 앞에 놓았다.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는 것이 꽤 먹음직스러웠지만 뇌어양은 그것을 장용백에게 밀어 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내가 원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을 알지 않느냐? 이건 그대가 드시게. 누구보다 많이 뛰고 움직여야 할 그대이니 든든히 배를 채워 놓게나.”
그런다고 선뜻 국그릇을 받을 장용백이 아니다.
그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뇌어양의 말에 재빨리 숙수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뛰어갔다. 잠시 후, 장용백이 손에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하하! 이거 이곳에서 직접 재배한 야채로 만든 거랍니다.”
야채볶음과 야채를 섞어 만든 국수였다.
“허어, 자꾸 민폐만 늘어 가는군.”
장용백이 그렇게 나오자 뇌어양은 쓴 입맛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젓가락을 집어 갔다.
천하진미라도 지금 그의 입에 맛이 느껴질 리 없었다.
그러나 뇌어양은 내색을 않고 국수와 야채볶음을 모조리 비워버렸다.
서른에 달하는 마교의 고수들은 지나가던 과객이 받기엔 과한 푸짐한 아침상으로 배를 채웠다.
뭔가 대접을 하려고 뇌어양이 품속에 손을 넣었지만 잡히는 것이라곤 고작 은자 한 냥, 그의 노안이 순간 아련한 슬픔과도 같은 빛으로 물들었다.
“이 정도면 크게 부족하지는 않을 게다.”
광로가 조그마한 은덩어리를 품속에서 꺼내며 장용백에게 건넸다.
비록 세공이 되지 않은 투박한 상태였지만 한 끼 식사 값으론 과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마침 그들의 식사를 준비했던 사람들 중, 중년 여인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차를 들고 온 것이다.
중원인들은 식사 후에 반드시 차를 마신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이 대부분이었기에 차를 마시지 않으면 장에 탁기가 빨리 찬다.
그것을 막기 위해 예로부터 차는 없어선 안 될 주요 식품의 하나였다.
“이곳의 주인은 어떤 분이신가?”
구자겸이 중년 여인에게 물었다.
일일이 찻잔에 뜨거운 물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던 여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들을 살려 주신 분이십니다.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주인님을 그저 하늘에서 내려 준 성인이라 여기고 살아간답니다.”
“그대들을 살려 줬단 말인가?”
“그렇습지요. 관리들에게 핍박과 착취를 당해 더 이상 살아갈 길을 잃은 저희들을 거두어 주신 분이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지요.”
그녀의 얼굴엔 감사함이 절절 묻어났다. 장로 구자겸이 물었다.
“지금 이 장원에 계시는가?”
“일이 있어 먼 곳에 가셨다고 합니다. 자! 차가 다 되었으니 한 잔씩들 드세요.”
뇌어양이 자신의 앞에 놓아진 찻잔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듯 조금은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차를 따라 준 여인이 물러가자 뇌어양은 모두를 돌아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저 여인을 보고 뭔가 느낀 것들이 없는가?”
뜬금없는 질문에 모두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인정이 좋은 사람이라도 저렇듯 연고 없는 길손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법, 저 여인은 주인을 모시는 법을 알고 있는 듯 보이는군. 객을 정성껏 모셔 주인을 빛나게 하는 저것이 바로 진정한 충성이 아니겠나?”
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뜨거운 차를 입에 가져간 뇌어양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곧 이곳의 주인이 저들에게 마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지. 나라면 저런 평범한 여인네의 진심을 끌어낼 자신이 없다네. 그것은 곧 내가 무능력했다는 것과 상통하지.”
“교주!”
살로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허허! 천하만마의 종주니 뭐니 하면서 안위한 생활을 해 온 내 스스로가 저 여인을 보니 그저 초라한 졸자의 삶처럼 느껴지는구려. 그대들처럼 좋은 사람들을 두고도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능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오.”
“또 그런 나약함을 보이시오? 아직 우리는 힘이 있지 않소. 중원 곳곳에 퍼져 있는 제자들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소교주가 있소. 그들을 한데 모아 잘만 이끌면 다시 일어설 수 있소이다!”
뇌어양이 고개를 지으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약해진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연함을 잃지 않았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지켜보던 모두는 슬픔보다는 빙궁에 대한 분노로 가슴을 채워 놓고 있었다.
“정도맹으로 우선 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빙궁의 전력과 상세한 정보를 내어 주고 당분간 연합 작전을 구사하는 것만이 놈들에게 빚을 갚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자겸이 붉어진 눈으로 격하게 말했다.
장용백이 거들었다.
“옳습니다! 제자들을 모으고 힘을 길러 복수를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숨이 가빠질 만큼의 분노로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으니 당장 정도맹과 손을 잡고 놈들을 몰아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장용백,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울분이 복받친 장용백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뇌어양을 제외하면 가장 배분이 높은 천마사로가 지금은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었다.
뇌어양이 구자겸과 장용백을 보며 그들의 심정을 어루만졌다.
“허허!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흘러도 늦지 않는 법, 서두르지 말게나. 내겐 복수만큼이나 그대들의 목숨도 소중하다네.”
탁!
문을 닫는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격한 감정을 드러냈던 장용백과 구자겸이 빠르게 안색을 고쳤다.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흑야였다.
‘뇌어양!’
흑야가 뇌어양을 몰라볼 리 없었다.
그리고 그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을 흑야도 못 되었다. 그저 지나가던 자들이라 해서 별생각 없이 내려왔던 그는 서른에 달하는 마교의 고수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눈이 제대로 삔 놈이군.’
그는 홍무와 철무옥의 눈을 의심했다.
저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비록 그 기세를 느낄 수 없다고 해도 분위기만으로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
특히 철무옥의 수준이면 당연히 알아봤어야 했다.
“이곳에 계신 분이시오?”
장용백이 물었다. 흑야는 그저 고개만을 끄덕이고 입구의 탁자에 앉았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그의 태도에 장용백의 얼굴이 슬쩍 구겨졌다.
[경거망동 마시게.]
뇌어양이 전음으로 그의 속을 달랬다.
“언제 떠날 생각들이오?”
흑야가 물었다. 대답은 구자겸이 했다.
“지금 곧 떠날 참이오. 덕분에 밤이슬을 피하고 주린 배를 채웠소이다.”
“가실 데는 있소?”
“우리를 아시오?”
“당연히…….”
흑야의 대답에 마교의 수뇌들은 제법 놀랐다. 자신들을 알면서도 저렇듯 태연자약할 수 있다는 것에 뇌어양의 눈이 반짝였다. 장용백이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