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귀환무사 121화>
모용단승이 분함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뒷말이야 더 들어 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혁련천후가 물었다.
“산악이 감당할 수 없는 자가 온 것이오?”
“독제, 당률 그자가 직접 왔습니다.”
모용미의 대답에 혁련천후의 눈가에 지독한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
‘잠시 잊었었군. 그자를…….’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에 오른 자가 당률이다.
용성과의 전쟁통에 그만 깜박하고 만 것이다.
혁련천후가 물었다.
“여기서 당가와는 거리가 어떻게 되지?”
“쉬지 않고 달리면 나흘이면 가능한 거리입니다.”
혁련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모용단승이 이를 지그시 깨물며 그를 응시했다.
내심 그가 도와주기를 기대했다. 가능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당가와 이어진 악연의 고리를 끊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직접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아니다. 미안할 나름일 뿐이었다.
그때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을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해 고정되었다.
동시에 전신에서 강렬한 기운이 풀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그가 향한 시선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발을 바람에 날리며 자신들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노인이 모두의 눈에 보였다.
독제 당률이었다.
이들을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리라.
“헉!”
“가, 가주님!”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놈은 어디 있느냐?”
당률이 대뜸 모용미를 보며 살벌하게 물었다.
관산악을 찾는 것이다.
모용미가 대답하기 전에 북궁천소가 성큼 앞으로 나서려다 혁련천후의 제지로 멈추었다.
당률이 모두를 천천히 쓸어 보고는 북궁천소에게서 시선이 멈추었다.
그저 담담한 빛으로 기를 드러내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투기로 이글거리는 북궁천소에게서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자 당률은 눈빛을 바꾸었다.
“노부는 당가의 인물, 모용세가와 빛이 있어 그러니 그대들은 잠시 비켜 주시게.”
“그러지 못하겠다면?”
“……뭐?”
북궁천소가 살벌하게 나오자 당률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그때였다.
당률은 뒤쪽에서 전해지는 싸늘한 기운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혁련천후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나를 아는 자인가?”
“알다마다. 너무 잘 알아서 찾아갈까 생각 중이었다. 당률.”
“이놈! 주둥이를 다물지 못할까!”
당률의 뒤에 섰던 중년인이 고함을 질렀지만 혁련천후의 시선은 오직 당률을 향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당률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어렸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대뜸 하대로 말을 걸어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혁련천후는 전음으로 모든 이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당률에게 전음을 보냈다.
[오랜만이군. 직접 찾아가려는 수고를 덜어 줬으니 깨끗하게 죽여 주는 것으로 보답하지.]
[네놈은 누구냐?]
[후후! 고작 십 년이 지났건만 나를 잊었단 말이냐. 역시 배부른 놈들은 쉽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뭣이!”
그제야 당률이 흠칫했다.
십 년 전이라는 말에 뭔가를 강하게 느낀 당률은 눈을 가늘게 하고서 혁련천후의 얼굴을 살폈다.
달랐다. 자신이 떠올렸던 십 년 전의 그 사내와 눈앞의 혁련천후는 다른 자였다.
당률이 입가를 실룩거리며 입을 열어 갈 때, 혁련천후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금역으로 떨어질 때, 네놈이 던졌던 암기가 육신을 파고들 때의 그 고통을 잊지 않고 있다, 당률.]
“허, 허면 네놈은!”
스슥!
크게 놀란 당률이 혁련천후를 향해 쌍장을 펼쳤다. 혁련천후도 그 자리에서 빛살처럼 움직여 당률을 베어 갔다.
쾅!
둘의 육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흡!”
당률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재빨리 독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혁련천후가 더 빨랐다.
서걱!
“크윽!”
당률의 오른팔이 삭둑 잘려 날아갔다.
혁련천후의 정체를 늦게 파악한 것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그 바람에 주 무기인 독공을 펼칠 시간을 벌지 못한 까닭에 혁련천후에게 선기를 내주고 말았다.
번쩍!
독공이 아니면 혁련천후에게 상대가 되지 못하는 당률이기에 재차 날아든 검을 피하지 못했다.
서걱!
섬뜩한 소리가 들리며 당률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고맙군. 공식적으로 죽일 명분을 만들어 줘서…….]
진심이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자였지만 당가의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자신이 먼저 검을 뽑기는 싫었다. 물론 그들을 모조리 죽이면 그 비밀을 보전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살인마가 아니다.
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당률에게 암시를 해 그가 선제공격을 하기를 노린 것이 적중하는 바람에 마음 편하게 그의 목을 벨 수 있었다.
세상엔 자신의 정당방위로 소문이 돌 것이다. 물론 당률이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덤벼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조님!”
“크흑!”
당가의 고수들은 망연자실, 넋을 놓았다.
당률의 명성을 감안하면 어이없는 시간에 승부가 나버리고 말았다.
당가, 최강의 고수가 고작 몇 수만에 목이 잘린 시체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북궁천소가 혁련천후를 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 단, 그렇게 할 생각이라면 천하에 당씨 성을 지닌 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살려 줍니까? 주공.”
“보내 줘.”
삶을 구원해 줄 동아줄을 혁련천후가 내밀자 당가의 고수들은 빠르게 사천 쪽으로 내달렸다.
당률의 죽음은 독고혜와 영호수란,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에게 상당한 놀람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엄연한 정파의 전대 고수이다.
비록 당가의 악독함이 사파에 못지않음을 천하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지만 그래도 그는 정파의 기둥, 오대세가의 한축을 밟고 있는 사천당가의 전대 가주라는 신분을 지닌 거물이었다.
그런 당률을 혁련천후가 목을 벤 것이다.
모두의 속내를 짐작한 혁련천후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파의 무리들보다 더 간악한 자였다. 앞으로도 정파에 저런 자가 또 나타난다면 그때도 망설임 없이 죽일 것이다.”
혁련천후는 먼저 이동을 재개했다.
모두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달랐다.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던 사천당가의 최고 고수가 죽어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향한 모용단승의 눈빛이 전에 없이 반짝거렸다.
제10장 마교, 신마성에 들다
사련의 성문이 열렸다.
이백에 육박하는 고수들이 성문을 통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 암흑대제 갈무극과 사련 최강의 고수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자신의 앞을 도열한 고수들을 보며 갈무극이 입을 열었다.
“나를 따를 준비가 되었느냐!”
“모두 대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를 마쳤습니다. 명만 내려 주십시오!”
“좋다! 그들과 계약을 한 것 때문이 아니라 본련과 본좌의 야망을 실현할 가장 좋은 적기를 놓칠 순 없다. 이 전쟁이 끝나면 강호는 본 사련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있을 것이다!”
“와아아!”
사련의 고수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군사 사요승이 다가와 갈무극에게 그의 칼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칼을 잡아 든 갈무극이 모두를 향해 명을 내렸다.
“계획대로 모두 움직여야 한다. 괴량!”
“예! 대제!”
날카롭게 생긴 초로의 인물이 허리를 굽히며 갈무극의 앞에 섰다.
“넌 아이들을 끌고 가 신마성이라는 곳을 쓸어버려라! 장차 본련이 가는 길에 장애가 될 놈들이다. 오왕이 남쪽에서 돌아오기 전에 개미 새끼 하나라도 남겨선 안 될 것이다! 동맹을 맺은 기념으로 그들을 애먹인 신마성을 예물로 삼을 것이다. 가라!”
괴량이라 불린 자가 마흔에 달하는 고수들을 이끌고 빠르게 북상했다.
갈무극이 이번엔 다른 자를 호명했다.
장대한 체구에 엄청난 대도를 두른 장한이 나섰다. 철무옥과 더불어 사련 최고의 싸움꾼이라 불리던 자였다.
“호숙아! 너는 괴량의 뒤를 쫓아라. 신마성을 쓸어버리고 난 뒤, 합류하여 정도맹의 북부지부로 곧장 달려가 그곳을 점령하라!”
호숙아라 불린 자 역시 쉰에 달하는 고수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갈무극의 명령은 이어졌다.
세 곳으로 백 오십에 달하는 고수들이 출발했다.
그리고 남은 오십여 명은 갈무극,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먼저 출발한 부대들의 중간 지역을 이동하며 그들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마교는 무너졌고 정도맹은 양면에서 적을 맞이했다. 이처럼 절호의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오겠느냐!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본 사련이 천하 최강의 집단으로 올라서야 한다.”
갈무극이 야망으로 눈을 빛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마교가 무너지자 거침없이 행보를 시작했다.
재빠르게 용성과 동맹을 맺고 빙궁과는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그였다.
조건은 적당한 지역을 분할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의 속내는 그것에 한하지 않았다.
강호일통!
그 원대한 야망을 위해 사련의 최고 고수들이 남김없이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백 년을 축적한 사련의 강대한 힘은 가장 먼저 신마성을 향해 그 칼끝을 돌린 것이다. 갈무극의 눈이 청포를 걸친 자들에게 고정되었다.
‘흐흐! 저 아이들이 나를 천하제일의 권자에 올려 줄 것이다.’
세상이 모르는 힘을 청포를 걸친 자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갈무극은 그 힘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 *
작렬하는 폭염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어 놓은 팔월의 어느 날 밤, 섬서의 경계를 가로지른 산을 넘어 빠르게 이동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우거진 수림을 질주함에도 미세한 소리만을 남긴 그들은 모두 서른, 선두에서 달리던 인물이 손을 들자 모두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손을 들었던 자가 재빨리 뒤로 돌아와 허리를 굽혔다.
그의 예를 받은 자는 다름 아닌 마교주 뇌어양이었다.
장용맥이 말하고 나섰다.
“조금을 더 들어가면 정도맹의 구역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정도맹주를 곧장 만나러 가시겠습니까?”
“야심한 시각에 찾아갈 순 없으니 당장은 머물 곳부터 찾도록 하자꾸나.”
“주변을 찾아보면 민가나 객잔이 있을 테니, 그곳에서 밤이슬을 피하시지요. 교주께서 노숙이라니요. 아니 될 말씀이오.”
천마사로의 살로가 고개를 흔들며 탁한 목소리를 냈다.
“교를 잃어버린 내겐 밤이슬도 과하다오. 야밤에 괜한 소란일랑 떨지 말고 그저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을 찾아보게.”
살로의 말에 쓴웃음을 지어 보인 뇌어양이 장용백을 보며 지시를 내렸으나 살로가 다시 만류하며 나섰다.
“지금 우리에겐 자존심, 하나만이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오. 그 자존심이 없었다면 교가 무너지던 그날, 모조리 자진을 하고서라도 죽었을 것이오. 피눈물을 흘리며 절치부심, 복수의 그날만을 노리는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교주께선 당당하셔야 하오. 아시겠소?”
살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뇌어양이 그런 살로를 보며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다. 잠시 말없이 그 자리에 섰던 뇌어양이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 그동안 사사건건 반대하고 나서는 그대들이 무척 미웠다오. 괜히 봉인을 풀어 그대들을 세상에 내어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도 했었소. 오늘 살로의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 부족했던 교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구려. 허허! 그럽시다. 이 무능한 뇌어양이 형제들을 위해 당신들 말처럼 그렇게 살리다. 허허.”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피눈물보다 더한 고통에서 나오는 것임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숙연해지려던 분위기를 살로가 깼다.
“뭣들 하느냐? 교주께서 휴식을 취할 곳을 찾아보지 않고!”
장용백을 비롯한 몇 명의 고수들이 재빨리 산개하며 사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남은 자들은 그 자리에 잠시 몸을 앉혀 휴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