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귀환무사 120화>
“일단 부상막과 용성이 혈마의 아수라진경과 관련이 있음을 밝혀냈으니 놈들에 대한 처리부터 강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만약 진경을 극성에 이르도록 연마한 자가 있다면 상당한 골칫거리가 됩니다. 천하에 그를 당할 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겠지.”
예상대로 부상막뿐만이 아닌 용성도 아수라진경을 익혔음을 확인했다.
당장은 그것이 어떻게 유출이 되었는가보다는 또 다른 누가 어떤 마공을 익혔을까가 더욱 문제였다.
혈마보다 더욱 무서운 마공이 두 개가 더 있었고 그중 하나는 자신도 장담하기 어려운 극마의 마공이다.
혁련천후는 내심 읊조렸다.
“광승 무요의 마공이 세상에 나왔다면 나의 행보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그것은 나와는 상극의 마공, 만약을 대비해 천살진경을 극성으로 익히고 구룡삼세를 더욱 강하고 세밀하게 보강하는 것이 시급하다.’
중원에 나와 지금처럼 위기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의 존재가 상당한 무게감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너희들도 각자의 무공을 완벽한 경지로 끌어 올려놓도록 해라. 최소한 십 성 이상은 익혀 둬야 할 것이다.”
“예, 주공.”
그 말에 놀란 것은 영호수란과 독고혜였다.
지금만으로도 세상에 그 적수를 찾기 힘든 오왕의 무공이 고작 십 성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라니.
두 여인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마대라는 놈들이 용성의 주력 부대였으니 당분간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시간을 갖고 보다 세부적인 계획안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윤의 말에 독고혜가 끼어들었다.
“용성이 재차 움직이면 어쩌죠? 우리가 빠지면 감당하기가 매우 벅찰 텐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용성과의 전쟁은 숫자보다 절대 고수들이 누가 더 많느냐에 따라 판가름될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이곳을 떠나면 곤란하다.
혁련천후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천하엔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고수들이 많다. 당장 소림과 오대세가의 전대 고수들이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위기에 처하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칼을 뽑고 세상에 나오겠지. 우리가 아니더라도 용성 하나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전력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금역의 마공을 익힌 고수가 변수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발을 묶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우리는 여기서 돌아간다.”
언제나 생각은 깊으나 결정을 단호하고 빨랐다.
그가 그렇게 나오자 독고혜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정도맹의 수뇌들에게는 소천, 네가 적당히 둘러대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왕전이 물었다.
“화산의 아이들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자신들만 돌아가기엔 상황이 좀…….”
“북쪽을 대비한다고 해. 어차피 빙궁 역시 중원으로 입성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북쪽으로 가는 정도맹의 부대에 합류할 생각이라고 적당히 둘러대.”
“그러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왕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천리로 지시를 내린 혁련천후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독고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냥…….”
지금 그는 혁련강을 떠올렸다.
그가 말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혁련강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작금의 상황을 오래전부터 그는 예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문득 그럴 거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혁련천후의 뇌리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를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혈육에 대한 감정은 내겐 필요 없는 사치일 뿐…….’
탁!
그가 가볍게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모두가 그를 응시했다.
“빠를수록 좋겠지. 내일 아침 출발한다.”
“옛? 내일 말입니까?”
“그래. 소천은 지금 즉시 신기수사란 자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고 오너라.”
담대소천이 빠르게 거처를 나갔다.
영호수란이 자신도 조부에게 다녀오겠다며 거처를 빠져나갔다.
다음 날 아침, 악양루의 마당이 꽤 붐볐다.
신마성의 고수들과 화산의 제자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 대부분의 정도맹 인물들이 아침도 거르고서 나와 있었다.
사부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게 된 탁철이 울상을 하고서 그들을 응시했다.
적용백이 상당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하지만 떠나는 그들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혁련천후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강호의 동도들을 대신하여 성주께 감사드리겠소. 차후,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반드시 이 은혜에 보답하겠소.”
“또 볼 날이 있을 것이오.”
“허허! 반드시 그래야지요.”
혁련천후가 주변을 늘어선 인물들을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아직 이 사태를 큰 위기라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소만, 그들이 자리를 털고 세상으로 나온다면 용성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지난밤에 거론했던 은거고수들을 빗대어 말했다.
적용백도 그 뜻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로 이들에게 조금 더 도와 달란 말을 못한 것이다.
그러기엔 자신들이 염치가 없다고 여겼다.
정도맹의 고수들은 서서히 멀어지는 신마성의 고수들을 보며 제법 굳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감은 용성의 무력 도발에 대한 엄청난 억제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이 전력에서 이탈하는 것이 꽤 걱정이었다.
특히 청년 고수들은 오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남궁소미와 도후 적용유리였다.
얼굴에 그 아쉬움이 확연하게 드러난 둘은 혁련천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적용유리를 흘긋 쳐다본 적용백이 조금 놀란 빛을 보였다.
‘저 아이가…….’
그도 사랑을 해 봤던 사람이고 그 누구보다 많은 여인들을 겪었던 터라 지금 적용유리의 내심이 어떠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보다는 그 옆을 함께 걸어가는 독고혜의 모습이 더욱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천하가 인정하는 자신의 손녀보다 더 뛰어난 여인이 그녀였고 그동안 그녀와 혁련천후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그는 손녀가 받을 상처가 걱정이었다.
‘허어! 네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큰 장벽이 있으니…….’
적용백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몸을 돌려 거처로 들어갔다.
모두가 객잔으로 돌아갈 때, 나웅만큼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그는 독고혜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가슴이 칼로 베듯 아팠다.
더불어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불같은 질투심도 주체하지 못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혁련천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자신이 그녀를 볼 때나 생각할 때, 그때와 똑같았다.
당연히 혁련천후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꽉!
나웅은 주먹을 쥐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결코…….’
* * *
천하에 신마성에 대한 소문이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용성과의 전투에서 정도맹은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으며 많은 자들이 목숨을 구함 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항상 화산과 움직이며 화산을 보호한다고 전해졌으며 그 중심에 최강의 무사들, 오왕이 함께한다고 했다.
그리고 천하제일의 여인이라는 검후와 백선녀 역시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이 전해지자 천하는 다시 한 번 놀라야만 했다.
그러나 천하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신마성의 성주였다.
오왕을 수하로 부리는 그는 이미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소문은 거기에 그치지만 않았다.
“어쩌면 일존과 오성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
크기를 불려가던 소문은 기어코 거기까지 이르렀다.
당대최강이라는 절대자들보다 그를 우위에 놓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강자를 숭상하고 강함을 추구하는 강호인들은 그를 전설 속의 신마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천 년 역사에 신화와 전설로 각인된, 신마의 전설이 바야흐로 한 사내에 의해 서서히 그 향기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
각설하고.
천하인들의 관심이 자신들에게 집중되었음을 모르는 혁련천후 일행은 제법 빠른 속도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인원이 열둘이다 보니 올 때보다 곱절은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이동 중이던 왕전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놈에게 모용세가의 일을 물어보지 않았군. 자식이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일언반구도 없이 훌쩍 가 버렸지.”
“별일이야 있었겠냐? 없었으니 그냥 갔겠지.”
담대소천이 말을 받았다.
그들보다 조금 뒤쪽에 떨어져서 이동 중인 모용단승의 얼굴이 조금은 굳어 있었는데, 관산악에게서 당가와의 일을 듣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린 것이다. 별일 없을 거라 자위하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별일 없었겠지. 신경 꺼.”
북궁천소가 모용단승의 속내를 짐작하고 위로를 건넸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다분히 짜증을 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건넨 것 자체가 커다란 변화였기에 화산의 제자들은 그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요즘, 가짜 사부들이 너무 착해진 것 같지?]
진호가 전음으로 물었다.
[설마요. 아마 신 나게 싸워서 기분이 좋아 그럴 겁니다. 원래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 아닙니까.]
진청의 대답에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슬쩍 노려봤다.
[넌 그 부정적인 생각을 좀 고칠 필요가 있어. 어째 모든 걸 삐딱하게만 보냐?]
[살기를 그렇게 살아서 그렇지요.]
[이 자식아! 그럼 사문 때문이라는 소리냐?]
[제가 언제 사문이라고 말했습니까? 괜히 찔리니까…….]
“뭐야! 자식아!”
진청의 도발에 걸려든 진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전음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그를 돌아보며 멀뚱한 표정들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자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진호가 얼굴을 붉혔다.
그때 앞서 걷던 혁련천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정적인 사고는 시야를 좁힌다.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 말에 셋의 얼굴이 노랗게 떴다.
왕전이 그런 셋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는 진호를 흘긋거리더니 손짓으로 혁련천후를 가리켰다.
“전음도 도청하신다.”
“……!”
셋이 동시에 붕어처럼 눈만 껌벅이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함부로 불만을 늘어놓을 생각일랑 꿈에서도 마라. 흘흘!”
* * *
일행들은 잠시 후, 이동을 멈추어야 했다.
저만치에서 자신들이 이동 중이던 길의 한가운데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던 까닭인데, 뒤쪽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모용단승이었다.
왕전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용세가의 사람들이잖아?”
“그렇군. 한데 저 많은 인원이 왜 이곳으로 오고 있는 거지? 설마 당가를 피해 도망이라도 온 것인가?”
모두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광동 쪽이었다. 그들의 실력으로 정도맹을 도와 지원을 나왔을 리 만무했고, 그들의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 있는 점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다고 추측한 것이다.
모용단승이 모용미와 세가의 무사들과 반갑게 해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이내 얼굴이 굳어지는 모용단승을 보고는 조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뭔가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 저놈이 저렇게 얼굴 표정을 바꾸는 것을 보니…….”
“당가가 보복을 하려고 했겠지. 놈들의 성정으로 보아 안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나저나 산악이 그놈은 대체 뭘 한 거야?”
“그러게 말이다. 놈의 누나 때문에라도 죽을 둥 살 둥 싸웠을 놈인데 말이다.”
모용단승이 세가의 인물들과 혁련천후에게 다가왔다. 이미 안면이 있었던 모용미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위기에 처한 상황에도 그녀는 결코 세가의 주인으로서 결코 품위를 잃지 않았다.
혁련천후가 말없이 모용단승을 쳐다봤다.
“사천당가가 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