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귀환무사 115화>
영호수란은 독고혜도 소개를 해 주었다.
“독고혜가 십전무제님을 뵙습니다.”
“역용을 하고 있었느냐?”
“사정 때문에…….”
말끝을 흐린 독고혜는 어쩔 수 없이 축골공을 풀었다. 그러자 그녀의 아름다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며 주변이 환해졌다.
“오…….”
“검후님이시다!”
곳곳에서 탄성이 몰아쳤다.
누구보다 놀란 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정도맹주 나백의 손자인 나웅이었다.
수뇌부들과 함께 있던 그는 무심결에 영호도성이 있는 곳을 응시하다가 독고혜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당장에 달려가려던 그는 순간 그 자리에 멈칫하며 서야 했다.
‘왜 저자와 함께 있단 말인가.’
지금껏 몇 번에 걸쳐 독고혜를 봤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혁련천후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었다.
더불어 상당히 다정하게 그를 대하는 것도 보았었다.
물론 그때는 독고혜인 줄을 몰랐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녀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가슴 밑바닥에서 질투심이 생겨났다.
나웅의 시선은 저절로 혁련천후의 무심한 얼굴을 향해 돌아갔다.
지금도 독고혜는 그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파르르…….
나웅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한편, 뒤늦게 영호도성과 함께 합류한 자들 중 하나가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독고혜를 보며 눈을 번득였는데, 결코 좋은 빛이 아니었다.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지만 그것을 들은 자, 아무도 없었다.
‘계집! 고작 그따위 놈과 함께하려고 내 아들의 인생을 망쳤더냐?’
대정문주 상관명이었다.
그는 독고혜를 보며 내심 칼을 갈고 있었다.
그녀를 지독하게 짝사랑했던 나머지 폐인이 되다시피 한 아들 상관척이 결국 자결을 하고 만 것이다.
그것이 고작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상관명은 아들의 죽음을 온전히 독고혜의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두고 보자. 검후…….’
제7장 무사들이여! 신마성의 위대함을 보라
혈전이 중단되면서 정도맹은 죽은 자들을 위해 혼령제를 지내 주었다.
신기수사 적용백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염을 외우면서 모두는 숙연함에 젖었다.
한 번의 교전에 죽어 간 자들의 숫자는 모두 스물둘, 백 명가량이 죽은 용성에 비하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당대의 이름 높은 명문의 인물들이었기에 동료를 잃은 슬픔은 결코 용성에 못지않았다.
반 시진에 걸쳐 진행된 위령제가 끝나자 모두는 다음 전투를 대비하여 식사와 휴식 및 부상자들의 치료에 전념했다.
다행히 의술에 일가견이 있던 고수들이 몇 있어 경상자들은 짧은 시간에 전투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중상자들은 몇을 차출하여 가까운 지역의 의원으로 후송했다.
말린 육포로 시장기를 때우던 적용백이 혁련천후를 흘깃거렸다.
그 옆에 앉은 청성파의 소진자가 조금은 화난 투로 말했다.
“전투 내내 칼질 한 번 하지 않더이다! 솔직히 저들과 함께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그렇소! 명색이 신마성의 성주라는 자가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 호위를 받으며 수수방관을 하다니, 이 두 눈을 씻어 내고 싶은 심정이오!”
그들은 전투에서 조윤과 왕전의 호위를 받기만 했을 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혁련천후의 태도를 비난했다.
적용백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만류했다.
“그래도 오왕 덕분에 꽤나 어려웠던 상대들을 물리칠 수 있었소. 하니 말을 삼가시오.”
관승이 거들었다.
“옳습니다! 도왕이 아니었으면 부상막의 고수들에게 꽤 큰 피해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존재를 용성도 알고 있으니 차후, 더 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괜한 말로 자극을 하는 일은 없도록 하십시오.”
“총호법의 말이 맞소이다! 사실 저들이 쉽게 물러난 것도 어쩌면 저들 때문일 것이오. 사살한 적들 중, 반수 이상은 저들의 공이었소.”
적용세까지 거들고 나서자 소진자를 비롯한 일부 수뇌들은 그만 입을 닫았다.
적용백이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눈을 거슬리는 자들이 있었소.”
“그게 누굽니까?”
“용성의 성주와 나란히 섰던 자들. 그들이 왜 교전에 뛰어들지 않았는지 그게 의문이외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하며 적용백을 주목했다.
그들은 미처 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적용백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신마성주도 그들 때문에 교전에 뛰어들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니 다들 그만하고 다음 교전을 준비하는 게 좋겠소이다.”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도제 도천세였다.
“어딜 가려 하시오?”
적용백의 물음에 도천세는 턱으로 혁련천후 등이 머물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 제자 놈이 있어서. 그럼 나중에 뵙겠소.”
그는 신마성과 화산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놓았다.
그곳에 탁철이 있었는데, 그가 손짓으로 도천세를 부른 것이다.
사부나 제자나 커다란 덩치에 촉한의 장비를 연상시키는 거친 용모가 무척이나 닮아 있었는데,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북궁천소가 히죽 웃었다.
“무슨 동물원도 아니고…….”
“하하하!”
왕전과 조윤등이 크게 웃었다.
담대소천이 북궁천소를 향해 한마디 던졌다.
“너는 무식한 늑대처럼 보이던데?”
졸지에 무식한 늑대로 전락한 북궁천소가 인상을 그리자 영호수란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웃지 마라!”
“흥! 내입으로 내가 웃는데 무슨 상관!”
“끙!”
통할 사람이 따로 있다.
북궁천소의 험악함이 유일하게 먹혀들지 않는 존재가 바로 영호수란이었다.
영호도성의 눈빛 꾸지람을 들은 영호수란은 영호진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오빠도 지금부터 이분들과 함께 싸워. 저쪽보단 훨씬 안전할 거야.”
“안위를 걱정해 위험을 피한다면 그게 졸장부지 사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쳇! 말이 그렇단 거고, 배울 게 많다는 말이지.”
“흠!”
영호진이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닫았다.
다른 청년들과는 달리 영호진은 혁련천후와 오왕들이 함께하고 있었음에도 그다지 흥분된 빛은 없었다.
당연했다. 오성의 하나인 조부와 늘 함께 지낸 그였으니 조금 놀랐을 뿐, 상기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먹어.”
“고마워요, 언니.”
독고혜가 육포를 찢어 영호수란에게 건넸다.
손녀를 바라보는 영호도성은 내심 흐뭇했다.
‘허허! 놈이 거물들을 골라 사귀었구나.’
철없는 어린아이로만 여겼던 손녀가 당대 천하를 뒤흔들 존재들과 친분을 쌓아 놨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영호진은 혁련천후를 흘긋거리며 간혹 묘한 표정을 짓곤 했다.
천하에 오왕을 수하로 부리는 그의 무공 실력이 무척 궁금했다.
물론 모든 이들의 공통된 관심사가 그것이었는데 아쉽게도 전투에서 그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때 죽은 동료들을 묻어 주고 돌아온 악승이 먼 곳을 보며 가볍게 놀란 소리를 냈다.
“뭔가 몰려옵니다!”
모두가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이 향해진 곳, 그곳은 남지부의 성곽 너머에 펼쳐진 넓은 평원이었는데, 그 끝에 시커먼 뭉게구름 같은 기운이 스멀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혁련천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혈마의 아수라진경의 아수마연(阿修魔燃)로 보입니다!]
담대소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혁련천후도 이미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 평원을 덮으며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다가드는 검은 구름은 혈마의 아수라진경에 들어 있는 아수마연이라는 마공이었다.
아수라진경을 익힌 자가 아수마연을 몸에 두르면 그 능력이 배가되는 놀랄 만한 마공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확실히 뭔가 있군. 용성이라는 곳.’
혁련천후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저들에게 알려 줘라.”
악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적입니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악승이 손으로 평원의 너머를 가리켰다. 시커먼 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본 정도맹의 수뇌들은 잠시 의아함을 금치 못했지만 이내 몸을 세워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구름처럼 보였지만 대지가 울리는 진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구름 속에 가려졌던 인마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엄청 나자 모두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엄청나군!”
영호도성이 중얼거렸다.
어림잡아 일천은 되어 보였다. 하나같이 전마에 몸을 실은 그들은 폭풍 같은 기세로 짓쳐 들고 있었다.
정도맹의 고수들은 뒤늦게 합류한 자들을 포함하여 모두 이백여 명,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였다.
“초전에 최대한 숫자를 줄여 놓는 것이 좋아.”
스르릉!
혁련천후가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처음 검을 뽑은 그를 보며 모든 이들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두는 결연한 빛으로 자신들의 병기를 뽑아 들었다.
담대소천이 청년 무사들을 향해 나지막이 외쳤다.
“너희들은 가급적 외곽 지역에 포진하여라. 검은 연기의 중심으로 뛰어들지 말고 산발적으로 빠져나오는 적들만을 섬멸하도록.”
“함께 싸우겠습니다!”
“말을 들어라. 애송이들!”
왕전이 눈을 부라리자 청년 고수들은 더는 나서지 못했다.
스스슥!
공기가 흔들리며 그들의 곁으로 적용백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다가왔다.
적용백이 혁련천후에게 물었다.
“혹시 저 검은 연기가 무엇인지 아시오?”
“아수마연! 죽음의 연기라고 불리는 것이오. 기마병이라고 우습게 여겨선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으니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청성파의 소진자가 미간을 꿈틀거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혁련천후는 독고혜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들과 함께 바깥쪽에 있는 게 좋겠는데…….”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독고혜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쩔 수 없이 영호수란의 팔을 잡고 신마각의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혁련천후는 수하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최대한 많이 죽여 놓도록.”
“예.”
“흐흐흐. 알겠습니다.”
우우웅!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가 기이한 울음을 냈다. 왕전의 대도가 도강을 품기 시작했으며 조윤의 창이 한 자 길이의 강기를 만들어 냈다.
마지막으로 북궁천소의 굉혈도가 피를 부르는 울음을 토해냈다.
가까이서 조윤의 창을 유심히 바라보던 모두가 순간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왕 중, 유일하게 신분이 드러나 있지 않았던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창왕도 있었다니.’
* * *
평원이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내를 이루었다.
뇌어양은 자신을 막아선 요성제를 몰아가며 극강의 마공을 연신 펼쳐 냈다.
한 수 한 수에 깃든 기운이 파천(破天)의 기운이었음에도 요성제는 모든 공세를 막아 내며 역습을 펼쳤다.
꽈르릉!
쩌저적!
가히 초인들의 격돌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천마사로와 거한들의 싸움은 반나절에 접어들었지만 그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고 장용백을 비롯한 마교의 장로들과 전주들은 빙궁의 극강 고수들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마교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천하를 담은 듯, 고요하던 뇌어양의 눈동자에 다소 초조함이 어리기 시작한 것은 장로 하나의 목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을 때였다.
“크윽!”
율극과 싸우던 장로 곽요의 목이 떨어졌다.
극강의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우와와!
지켜보던 빙궁의 무사들이 함성을 질러 율극을 응원했다.
“뇌어양! 내년 오늘이 너희 마교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 요성제!”
“너희들을 꺾기 위해 수백 년을 고통 속에 몸부림쳤던 빙궁이다. 네놈들은 결코 우리를 막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있다면 어디 한번 그래 보시게.”
요성제의 으르렁거림에 뇌어양은 웃음으로 받아쳤다. 그러나 표정과는 달리 속내는 전혀 여유롭지 못했다. 점점 전세는 자신들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천마사로와 접전을 벌이는 거한들이었다.
‘놀라운 자들이로다. 저들과 동수를 이룰 고수들이 설마 빙궁에 있었다니, 이대로 더 지나면 패배는 우리의 것!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요성제의 공세를 막아 내며 뇌어양은 머리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