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귀환무사 110화>
“고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어찌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소?”
“그게…….”
주인이 말을 더듬거렸다.
“말해 보시오. 혹시 아오? 내가 도움이 될지.”
관산악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 주인이 말을 늘어놓았다.
“며칠 전에 수상한 무리들이 고을에 들어왔습죠. 하나같이 시뻘건 옷을 걸치고 귀신의 눈을 한 그자들이 글쎄…….”
“그자들이!”
“치마를 두른 여인이라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겁탈을 했지 뭐겠소. 스물에 가까운 처자들이 그만 놈들에게 당했다오. 화가 난 처자들의 가족들이 놈들에게 덤볐으나 모두 목이 잘려 죽어 버리고 말았다오.”
주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마도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듯 싶었다. 관산악이 다시 물었다.
“그놈들은 지금 어디 있소?”
“그거야 모르지요. 지난밤에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오. 내 살아생전 그놈들처럼 포악한 자들은 처음이라오. 사람이 아니었소. 사람이…….”
주인이 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삶은 돼지고기를 볶아 만든 요리로 배를 채운 관산악은 은자를 탁자에 두고는 객잔을 나섰다.
“전쟁이 벌어지면 그런 일이야 다반사로 벌어지지.”
관산악은 객잔의 주인에게서 들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전쟁 시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작금의 상황은 무림인들 간의 전쟁, 당연히 무공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그 피해를 입지 말았어야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통속적인 생각일 뿐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무림인들 간의 전쟁이나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주변을 살핀 관산악은 먼 곳에 보이는 커다란 산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그 산을 넘어서면 광동의 중심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어디서 찾는담.”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관산악은 혁련천후와 벗들이 있는 곳을 찾기가 꽤나 힘들 것이라 여겼다.
그 넓은 광동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찾아내기란 실로 힘든 일이었다. 코를 슬쩍 실룩거린 그는 이내 엄청난 속도로 나아갔다.
그때!
캉!
짐승의 울음이 관산악의 뒤쪽에서 들렸다. 귀에 익은 소리에 관산악이 그 자리에 멈추어 뒤를 돌아봤다.
“어! 저놈은…….”
자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흰색 여우, 바로 백랑이었다.
관산악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백랑이 나타나자 의아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백랑을 쳐다봤다.
숨 한번 쉴 사이에 백랑은 관산악의 품으로 뛰어올랐다.
“야, 인마! 네가 여긴 웬일이냐?”
캉캉!
백랑이 그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짖었다. 순간 관산악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백랑의 짖는 소리에 사람의 음성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자신이 찾고자 했던 일행들의 위치를 백랑이 사람의 말로 전한 것이다.
고금에 없을 괴사(怪事)였다.
“진천, 놈의 작품이었군. 하여간에 대단한 놈이라니까.”
진천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보다 더한 놀라운 술법을 진천은 수도 없이 지니고 있었다.
“뒤를 잘 따라오너라! 이놈아!”
백랑을 바닥에 내려놓은 관산악이 앞으로 달려가자 백랑이 그 뒤를 쫓았다.
제5장 나타나면 죽이면 그뿐이다
영호수란은 자꾸만 혁련천후를 힐끗거리는 남궁소미가 영 불만이었다.
성난 표정을 지은 그녀에게 독고혜가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신경 써.”
“저 여우같은 것이 자꾸…….”
“그게 어디 남궁 소저 잘못이겠어? 다 저 사람이 잘난 탓이지.”
독고혜는 혁련천후를 슬쩍 노려보며 말했다.
혁련천후가 그녀들을 돌아봤다.
영호수란이 혀를 내밀자 마침 그곳을 쳐다보던 북궁천소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게 미쳤나?”
“흘흘! 너 말 조심해라. 어쩌면 너보다 높은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 흘흘!”
“……!”
대략 짐작한 북궁천소가 입을 다물었다. 조윤이 왕전에게 말했다.
“너도 목숨 걸고 지켜야겠군. 잘 보이려면…….”
“난 워낙 친분이 있으니, 흘흘!”
“좋겠다! 새끼야! 친분이 있어서…….”
북궁천소가 눈을 부라리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일행들보다 한참 앞서 이동하는 담대소천에게 다가간 그는 주변 산세를 둘러보며 물었다.
“지형이 꽤 험해서 매복 따위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지나치는 게 좋지 않을까?”
척후를 담당했던 담대소천은 이미 그들이 가던 방향의 앞쪽을 모조리 살핀 뒤였다.
북궁천소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있다. 사람의 기운은 아니지만 왠지 꺼림칙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어. 조심하는 게 좋아.”
“꺼림칙한 분위기?”
“그래.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동을 멈추고 너와 내가 먼저 돌아보는 것이 안전하겠지.”
담대소천이 재빨리 혁련천후에게 다가가 그 사실을 말하고 다시 돌아왔다.
담대소천과 함께했던 악승이 수하들을 뒤로 물리고는 자신도 둘을 따라붙었다.
잠시 후, 모두는 잠시 이동을 멈추고 그 자리에 앉아 척후조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나웅이 혁련천후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감사가 늦었습니다. 성주님 덕분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혁련천후는 말없이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나웅은 왕전과 조윤에게도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는 독고혜와 영호수란을 돌아봤다.
코앞에 그녀가 있었음에도 나웅은 그녀를 몰라봤다.
모두에게 다시 포권지례를 해 보인 나웅은 다시 청년 고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왕전이 나웅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새끼! 저것도 금치문인가 뭔가 하는 새끼처럼 손 좀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가 독고혜를 넘봤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왕전에겐 손봐줄 대상에 올라 있는 나웅이다.
다만 나웅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성정도 바르고……. 그러니 더 이상 저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예…….”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왕전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영호수란이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예쁘면 오히려 불편한 점이 많더군요. 어딜 제대로 나다닐 수도 없고, 마음껏 떠들지도 못하고, 쩝! 언니의 그 마음 전 이해해요.”
“내가 란 매만 하겠어?”
“아유! 이럴 땐 정말 얄밉다니까!”
서로 금칠하기 바쁜 둘을 바라보고만 있던 조윤이 뒤를 돌아봤다.
이미 혁련천후는 그쪽을 향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보다 뒤쪽에서 휴식을 취하던 청년 고수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신기수사 적용백과 고수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청년들의 예를 웃는 얼굴로 화답한 적용백이 혁련천후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날아오는 인영이 있었는데 바로 탁철이었다.
“대형!”
곰 같은 덩치로 팔을 쭉 벌려 달려오는 탁철을 혁련천후는 가볍게 피했다.
졸지에 조윤과 왕전이 온몸으로 인사를 건네는 탁철을 맞아야 했다.
조윤과 왕전에게 반갑게 인사한 탁철은 한쪽에 섰던 모용단승과 화산의 제자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하하! 용케 살아들 있었구나! 이제 이 탁철이 왔으니 용성이고 나발이고 걱정 마라! 으하하!”
영호수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귀청 떨어지겠네!”
“엉!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남장을 했던 영호민을 기억하던 탁철은 여장을 한 그녀를 몰라봤다.
게다가 얼굴까지 슬쩍 바꾼 상태이니 몰라보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을 밝히려던 영호수란이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괜히 밝혀 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안면이 있는 신기수사 적용백까지 있었으니 그녀는 당분간 자신의 정체를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용 노야를 뵙습니다!”
주변에 있던 진유와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다가서는 적용백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혁련천후와 왕전, 그리고 조윤만이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는데, 그전 같았으면 다소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의 태도를 두고 입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마성의 성주라는 자리가 결코 적용백보다 못하지 않다고 모두는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껏 그들 덕분에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지 않은가.
“적용백이라고 하오이다! 아이들을 돌봐 준 것에 맹을 대신하여 감사드리오.”
적용백이 두 주먹을 마주 잡아 보였다.
“별말씀을…….”
혁련천후 역시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때, 적용백의 옆에 섰던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혁련천후를 보며 곰이 울부짖는 듯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부족한 제자 놈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들었소! 이 도천세가 성주께 감사드리오!”
도천세의 목소리는 탁철보다 두 배는 우렁찼다.
도의 달인으로 칭송받는 도천세의 등장에 그를 모르던 고수들이 술렁거렸다.
북궁천소가 도천세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어깨에 걸린 엄청난 크기의 대도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제자에게서 도로 빼앗았나 보군. 그나저나 저 영감쟁이…… 옛날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괜히 도제라고 불리겠냐. 왜? 보니까 한판 뜨고 싶은 모양이지.”
“전쟁만 아니라면 벌써 달려들었을 것이다.”
도천세를 응시하는 북궁천소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투기로 번들거렸다.
서로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모두는 다시 각자의 자리에 앉아 척후조를 기다렸다.
적용백은 전서를 통해 전사자의 신원과 그간의 경과에 대한 보고를 하기 바빴다.
그리고 곳곳에서 날아든 전서를 수집, 다른 방향으로 이동 중인 부대들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여 앞으로의 이동방향과 집결지에 대한 논의를 다른 고수들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면사를 벗은 적용유리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눈부신 미모가 드러나자 청년 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영호수란에 못지않은 미로를 지닌 그녀는 여타의 미녀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조금은 검게 보이는 구릿빛 피부색에 도발적인 아름다움은 매우 이국적이었다.
북궁천소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하의 미녀들을 죄다 이곳에 모아 놨군. 자식들! 눈 돌아가는 것 좀 보게.”
화산의 제자들과 신마각의 무사들이 적용유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드러내자 남궁소미와 황보수란의 미모가 빛을 잃는 느낌이었다.
“예상대로 도후였군요.”
영호수란이 적용유리를 보며 살짝 빛을 발했다.
천하에 으뜸으로 치는 여인들이 천중삼화였다. 그 천중삼화가 모조리 이곳에 모인 것이다.
비록 독고혜와 영호수란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청년 무사들이 호흡 곤란을 일으킬 법도 했다.
“늦는군요.”
독고혜가 전방의 산악 지역을 쳐다보며 근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척후조가 돌아오는 시간이 다소 늦어졌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모두가 근심스러운 표정들을 했지만 정작, 혁련천후와 왕전 등은 별 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화산의 제자들과 수다를 떨기 바쁜 탁철을 쳐다보던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가 그를 주시했다.
“찾아가실 생각이세요?”
“어차피 갈 길이니 먼저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독고혜의 물음에 대답한 그가 진유에게 말했다.
“저들이 있으니 이동은 우리만 할 것이다. 가서 그렇게 전해!”
“알겠습니다!”
진유가 재빨리 적용백에게로 뛰어갔다.
혁력천후는 적용백에게 청년 고수들을 맡기고 자신들만 따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뭔가 말을 주고받던 진유가 다시 뛰어왔다.
“다른 곳의 부대들도 내일 아침쯤이면 남지부에 이를 것이니 그곳에서 최종 집결을 한 뒤에 본격적으로 움직인다고 하십니다. 해서 그곳까지는 함께 이동하는 것이 어떠냐고 여쭙는군요. 어찌하시겠습니까?”
혁련천후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나온다면 응당 함께 이동하는 것이 좋았다.
반나절 정도가 남은 시간을 따로 이동한다고 하면 그것도 우스웠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유가 다시 뛰어갈 자세를 취했다.
“발에 땀나겠다. 입 놔두고 뭐 해?”
왕전이 그렇게 말하고 적용백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출발합시다!”
가장 간단한 의사소통 수단을 왕전이 몸소 시범을 보였다.
그들도 모든 작업이 끝난 듯, 몸을 일으켰다.
무리들의 숫자가 팔십여 명에 달하는, 제법 큰 규모의 부대로 바뀌었다.
화산과 신마각이 선두에서 이동했고 그 뒤를 적용백과 중진고수들, 그리고 청년 고수들이 맨 뒤에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