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귀환무사 109화>
* * *
신기수사 적용백은 주변을 상세히 살펴보았다.
적의 매복이 용이한 지역에 들어선 그들은 모두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중진급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젊은 청년들을 신마성과 함께 보내고 그들보다 강한 자신들이 함께 이동하는 이유는 신기수사 적용백의 신분 때문이었다.
그가 오성의 일인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용성진압군의 총사령을 맡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간 용성이 보여 주었던 첩보능력을 감안하면 적용백을 노리고 상당한 전력을 투입할 것이 예상되었다.
해서 보다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의 후미에 눈에 익은 거한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볼 일이 있다며 장원을 떠났던 탁철이었다.
그의 옆에는 탁철과 비슷한 덩치의 노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번뜩이는 안광이 마치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사부! 그냥 우리끼리 먼저 갑시다! 이렇게 굼벵이처럼 이동하다가 언제 그분들을 뵙겠습니까?”
“그럴까?”
“예!”
탁철보다 한 뼘은 더 큰 노인이 바로 탁철의 사부, 도제(刀帝) 도천세였다.
도천세가 주변을 슬쩍 돌아봤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느라 그들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오너라.”
“예.”
눈짓을 주고받은 둘이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옆으로 숨어들 때였다.
선두에서 이동하던 신기수사 적용백이 손을 들어 모두의 걸음을 세웠다.
도천세와 탁철도 허리를 펴고 전방을 직시했다.
사위는 조용했다.
어느 순간부터 풀벌레 울음까지 멈추어 있었다. 정도맹의 인물들은 소리 없이 암습을 가하는 부상막의 인자들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순우진이 이끌던 부대가 전멸을 당한 것도 모두 그들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스슥!
적용백이 손을 들어 허공에서 슬쩍 휘젓는 시늉을 하자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의 장심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생겨나더니 이내 바람을 타고 숲 안쪽으로 퍼져 나갔다.
그 기운은 숲의 나무들을 자극하며 한참을 선회하다 사라졌다.
“준비들 하시게.”
적용백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모두는 병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적의 출현을 기다렸다.
“이 상황에서 우리만 빠질 순 없겠지?”
“그럼요.”
몰래 빠져나갈 것을 포기한 도천세와 탁철도 대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갔다.
쐐애액!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울리며 수백 발의 암기가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동시에 모든 자들이 호신강기를 끌어 올려 거대한 방어막을 형성했다.
주변이 희뿌연 호신강기로 둥근 원을 이루며 그곳에 부딪힌 암기들이 불꽃을 만들어 내며 튕겨나갔다.
“억!”
청색 무복을 걸친 장한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온 암기가 그의 어깨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적용백이 흠칫하며 모두에게 경고성을 발했다.
“호신강기를 파괴하는 암기가 섞여 있으니 각별히 유의하라!”
그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암기를 맞고 휘청거리던 청색 무복의 장한이 몇 발의 암기를 더 맞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청성파의 장로인 그의 이름값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신기수사 적용백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챙!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어지간해선 뽑지 않는 그의 검은 적용세가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보검이다.
거기에 적용백의 강력한 내공이 더해지자 검강 다발이 숲을 향해 날아갔다.
쐐애액!
콰지직!
걸리는 모든 것을 모조리 베어 버리며 날아간 검강이 기어코 피를 뿌렸다.
매복했던 적 하나가 피하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거기 숨어 있었구나! 쥐새끼 같은 놈들!”
적의 위치가 드러나자 도천세가 무지막지한 도강을 그곳으로 펼쳐 냈다.
콰쾅!
도천세의 도강은 숲을 초토화시키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또다시 핏물이 솟구치며 잘려진 사지가 떨어졌다.
도천세의 공격력은 파괴력에서만큼은 단연 발군이었다.
“썩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겠느냐?”
도천세가 주변을 쓸어 보며 내공을 담아 외쳤다.
그러나 사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어느새 정도맹의 고수들은 적용백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방원진을 펼치고 있었다.
분명 숲 전체에서 상당한 기운들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섣불리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현재로썬 그들이 전면에 나서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모두는 여기고 있었다.
스르릉!
괴이한 소리가 들리며 쇠사슬이 곳곳에서 강력한 회전을 하며 날아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팔이 잘려 버릴 듯, 강맹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적용백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날아들던 쇠사슬 몇 개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흩어졌다.
동시에 다른 고수들도 일제히 쇠사슬을 향해 검강과 도강을 뿜어 댔다.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독이다!”
과연 그랬다.
쇠사슬이 부서지며 사방이 독연(毒煙)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전방에 섰던 초로의 노인이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급히 호흡을 멈추시게!”
대노한 적용백이 재빨리 노인의 혈도를 점혈하고 명문혈에 진기를 불어넣었지만 노인은 한사발의 피를 게워 내고는 숨이 끊겼다.
‘지독한 맹독(猛毒)이로다!’
어지간했던 고수의 목숨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적용백은 조금은 초조한 빛을 보였다.
언제까지 기습을 방어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보면 점점 피해만 늘어날 뿐이다.
“모두 숲 속으로 들어간다!”
결국 그들은 공격을 택했다.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거침없이 숲 속을 뛰어들었다. 도천세의 옆을 날아가는 탁철이 가장 먼저 적을 발견하고는 대도를 휘둘렀다.
“끄악!”
직선으로 뻗어 나간 도강이 적의 등줄기를 가로 잘라 버리자 사방이 핏물로 가득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도천세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방금 탁철이 보여 준 한 수는 상당한 수준에 이른 수법이었다.
“빈둥빈둥 노는 줄만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제가 누구제잡니까! 하하하!”
“크허허!”
제자에 대한 뿌듯함으로 기분이 좋아진 도천세은 이내 호랑이 같은 눈으로 사방을 쓸어 봤다.
난전(亂戰)이었다.
몸을 은신하고 암습을 하려던 용성의 고수들은 워낙 지척으로 정도맹의 고수들이 들어오자 모습을 드러내고 전면전을 감했다.
그야말로 피와 살이 튀는 육박전 양상으로 흘렀다. 근접거리에서 도천세는 발군의 위력을 자랑했다.
파괴적인 그의 도법은 사람과 나무를 통째로 베어 버렸다.
대도의 사정거리 밖에 있던 자들마저도 부상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인자술을 사용하는 부상막의 인자들에 의해 정도맹의 고수 몇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퍽!
“섬나라 지옥으로 가거라! 이놈!”
“크악!”
도천세의 칼이 마지막 남은 용성 고수의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치열했던 싸움은 막이 내렸다.
주변을 돌아보던 적용세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참으로 지독한 놈들이로다.”
치가 떨릴 정도로 그들은 앞만 보고 달려들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그들의 싸움 방식에 죽지 않아도 될 고수 몇이 목숨을 잃었다.
“소문에 놈들의 잔혹성은 그 어느 나라보다 지독하다고 하더니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소.”
천하의 도천세가 혀를 내둘렀다.
난폭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도 용성과 부상막의 인자들은 치가 떨릴 정도로 잔인하면서도 냉혹했다.
적용백이 도천세에게 다가왔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소.”
“무슨 말씀을. 수사의 노련한 지휘 덕분이 아니겠소. 허면 서둘러 산을 넘어갑시다.”
“알겠소.”
모두는 죽은 동료의 시신을 서둘러 수습하고는 빠르게 이동을 재개했다.
* * *
정도맹과 용성의 매복전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혁련강은 홀로 인자들을 찾아내어 격살시켰다.
“컥!”
혁련강의 검이 심장을 꿰뚫자 두 눈만 내어 놓은 인자의 숨이 끊어졌다.
주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인자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모두가 혁련강의 손에 고혼이 되어 버린 자들이었다.
죽은 자들의 육신을 살펴보던 혁련강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혈마의 흔적이 이렇듯 많은 놈들에게서 나타나다니…….”
싸울 때 그는 인자들 모두가 혈마의 마공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수준이 낮아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수라마공을 익힌 자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혁련강은 빠르게 숲을 헤치며 남하했다.
그러다가 반나절 정도가 흘렀을 때, 참혹한 현장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죽은 자들의 시신은 모두 오십여 구, 용성과 정도맹의 고수들이 뒤섞여 있었다.
견오는 한 시신 앞에 섰다.
생전에 제법 강대한 내공을 지녔던 고수인 듯, 부패를 시작한 다른 시신들과는 달리 그 시신만큼은 비교적 깨끗했다.
시신을 살피던 혁련강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시신의 목걸이가 보였는데, 작은 동판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정도맹의 수뇌부들이 착용하는 일종의 호패와 같은 것이었다.
“흠! 제법 거물이 죽었군.”
시신은 바로 순우진의 것이었다.
순우진의 목 뒤쪽에 난 상처를 살펴보던 혁련강이 눈을 가늘게 하고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혈마의 아수라가 거의 팔 성에 달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자가 죽은 것도 그다지 놀라울 것이 못 된다.”
혈마의 아수라는 몇 가지로 분류된다.
그중 순우진의 사인(死因)은 혈마의 검법에 의한 것이다. 팔 성에 이른 혈마의 검법을 익힌 자라면 구파의 장문들보다 더 강한 고수라고 봐야 했다.
“도대체 부상막의 아이들이 어떻게 혈마의 진경(眞境)을 얻었단 말인가? 그곳은 본가가 천 년을 두고 지켜 왔던 곳이거늘…….”
혁련강은 천년 금역을 떠올렸다.
세상에 저주받은 마역으로 알려졌지만 실상 그곳은 자신의 가문이 수천 년을 이어 오며 살아왔던 터전이었다.
“놈은 무사하겠지.”
혁련천후를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신을 향하던 그의 눈동자에 어렸던 기운은 분명 증오였다.
그는 혁련천후를 이해했다.
기억에조차 없었던 자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조부라고 밝히면 자신이라도 혁련천후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부모의 죽음까지 전했으니.
“후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혁련강은 고개를 들어 남쪽을 응시했다.
“중원을 도모할 자들이라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터, 보다 집중하지 못하면 크나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텐데…….”
* * *
독제 당율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사천당가로 향하는 척을 했던 관산악은 힘겹게 당류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는 걸음을 돌려 광동 쪽으로 향했다.
자신을 추격해 오던 당율의 기운을 완벽하게 속인 그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질주를 거듭했다.
모용미와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염려되어 한시라도 쉴 수가 없었다.
광동은 전쟁의 한가운데 놓인 곳, 그들이 혁련천후 일행과 만나기 전에 적과 부딪히면 볼 것 없이 몰살이다.
질주하는 와중에 모용미의 그윽한 시선을 떠올린 관산악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랑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관산악은 입술을 깨물며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고 관산악은 광동의 초입에 들어섰다.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하는 속도로 짧은 시간에 사천성을 가른 관산악의 놀랄 만한 경지였다.
광동의 초입에 들어선 관산악은 허름한 객잔을 찾았다.
꼬박 사흘을 굶어 버린지라 배를 채워야만 했다.
파리가 날리는 객잔은 손님이라곤 자신 하나뿐이었다.
불결한 주변 환경에 슬쩍 미간을 좁힌 그는 졸고 있는 주인을 깨워 간단한 식사를 주문하고는 자신이 주방에 놓인 술을 들고 와 병째 마셨다.
화끈한 기운이 배 속을 뜨겁게 달구자 한결 살만해진 관산악은 너덜거리는 창문을 통해 밖을 살폈다.
“뭔 놈의 동네가 귀신이 사는 것처럼 이리도 을씨년스럽지?”
말처럼 고을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바람에 흔들리며 창이 내는 소리가 마치 귀신의 울음처럼 여겨질 정도였는데, 마침 주인이 음식을 들고 오자 주인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