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귀환무사 104화>
“욱!”
차르릉!
백리추를 노리고 달려들던 용성의 고수를 향해 뭔가 날아갔다.
“어림없다! 계집!”
백리추를 포기하고 그 물체를 검으로 후려쳤던 용성의 고수가 눈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끄악!”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콸콸 솟구쳤다.
회전하던 물체가 터지며 수많은 파편들이 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신세가 되어 버린 그를 한 청년이 뒤에서 목을 잘라 버렸다.
“요상한 사술을 쓰는 계집이군. 네년의 가랑이를 확 찢어 주마!”
지독한 욕설이 남궁소미를 향했다.
얼굴이 붉어진 남궁소미의 손에 어느새 백색의 도자기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기세 사납게 달려들던 용성의 고수들은 또 어떤 사술이 펼쳐질지 몰라 주춤거렸다.
어깨를 움켜쥔 백리추가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크악!”
비명이 터지자 모두의 고개가 일순 돌아갔다.
담대소천과 싸우던 고수 하나의 육신이 잘라지며 엄청난 선혈을 쏟아 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를 벤 담대소천의 하나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서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상당한 선혈이 흐르고 있었는데 창백한 안색에 입가로 피까지 흘리는 것으로 보아 내상과 외상을 동시에 입은 듯 보였다.
“유천! 어서 뒤로 물러서라!”
적용세는 싸우는 와중에도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유천은 죽은 영백의 제자이다.
사부를 잃은 그마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었다.
다른 담대소천 셋이 일제히 유천의 주변을 에워싸며 포진했다.
곳곳에 상처를 입고 있는 그들은 전혀 두려움 없이 적들을 향해 강렬한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적용세는 황급히 청년 고수들이 몰려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지금껏 적을 상대하느라 그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
적용세는 의외의 상황에 잠시 놀랐다.
피를 뿌리며 죽어 있는 용성의 고수들이 보였고 선혈을 흘려내며 적들을 노려보는 백리추와 남궁소미의 모습 또한 보였다.
쐐애액!
강맹한 기운이 날아들자 적용세는 재빨리 검을 회전시켰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강기막이 그의 육신을 두르며 날아든 강기 다발을 막아 냈다.
따다당!
“욱!”
답답한 신음성이 적용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연이은 싸움으로 내공의 소모가 극심했던 적의 공격을 정통으로 막아 내고는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울컥하며 목구멍을 넘어온 선혈을 간신히 참아 낸 적용세는 자세를 고쳐 적의 수장을 직시했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전황은 삽시간에 일방적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극한의 정신력으로 충격을 견뎌 냈다.
‘그들마저 당했단 말인가!’
화산파가 오지 않고 있었다.
적용세는 그들이 적의 매복에 걸렸을 거라 짐작했다.
그는 다시 절망감에 휩싸였다.
자신도, 담대소천도 이대로라면 얼마 견뎌 내기 힘들 것이다.
일대일이라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적의 숫자가 더 많으니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달리 방도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저 아이들이 쓰러져야 한단 말인가…….’
자신의 죽음이야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어 갈 젊은 청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오늘 너희들은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 아니지! 저 훌륭한 몸뚱이를 지닌 계집들은 물론 본좌가 데려갈 것이다.”
“닥쳐라!”
“저 계집이 요상한 술법으로 잠시 시간을 끌었다만 이젠 소용없다. 적용세!”
힘과 시간에 있어 우위를 점한 용성의 고수들은 여유가 있었다.
비록 남궁소미에 의해 꽤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 정도는 그들에겐 피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꽉!
“오너라! 이놈!”
적용세는 두 손으로 검을 힘껏 움켜쥐면서 마지막 전의를 불태웠다.
“숨통을 끊어 주마. 후후후.”
둘이 마지막 혈투를 시작하려 할 때, 전장의 뒤쪽에서 장내로 들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 * *
“지독하군!”
북궁천소는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신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몰살을 당했겠어.”
“조금 늦게 올 걸 그랬나?”
“흐흐흐!”
그들이 들어서면서 싸움이 중단되었다.
“지원군이다!”
“화산이 왔다!”
청년 고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화산! 우리와 함께 싸우자!”
누군가 북궁천소 등을 향해 외쳤다.
지금 이 순간, 젊은 청년들은 쇠락 일로를 걷던 화산의 처지를 머리에서 지워 낸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화산이 지금의 살벌한 위기에서 도움이 될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그들이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의 상황이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든 것이다.
“저게 어디서 반말을!”
“참아라.”
담대소천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화산의 무복을 벗어던졌다.
펄럭!
날아간 무복이 하필이면 용성의 고수들에게 떨어졌다.
핏빛 갑주가 드러나며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투왕!”
용성 진영에서 누군가 부르짖었다.
“나도 있다, 새끼들아.”
“나는 안 보이냐.”
왕전과 북궁천소가 차례로 나서며 검과 대도를 늘어뜨렸다.
“전왕도 왔다!”
“도왕이 어떻게 이곳에…….”
장내가 들끓기 시작했다.
한마디 싸늘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도주하는 놈은 내가 맡을 테니 마음 놓고 쓸어버려라.”
모두의 고개가 목소리가 울린 곳으로 돌아갔다.
조윤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용성의 고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창을 보자 모두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창왕까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들이 왜 이곳에 한꺼번에 나타났단 말인가!”
용성 진영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에 휩싸였다.
북궁천소가 나서며 씨익 웃었다.
“도망가면 쟤들이 죽일 거야. 그러니 덤비려면 내게 덤벼라. 화끈하게 고통 없이 한 방에 죽여 주마! 그게 네놈들에게는 더 나을 거다.”
콰앙!
북궁천소가 섰던 자리에서 흙먼지가 솟구쳤다.
치고 나간 북궁천소의 대도가 허공을 가를 때, 담대소천이 청룡언월도가 피를 튀겼다.
뒤이어 왕전이 적진 한가운데로 뚝 떨어져 내렸다.
“지옥으로 가는 거야, 새끼들아!”
퍼퍼퍽!
“크악!”
혈전이 도살의 장으로 변했다.
그 살벌했던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피를 뿌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우…….”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불신으로 흔들렸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오왕의 파괴적인 공격은 같은 편인 정도맹의 고수들조차도 소름이 일어날 정도였다.
한마디로 난폭함 그 자체였다.
압도적인 무력에서 뿜어지는 광포한 움직임은 적의 시신을 잔혹하게 찢어발겼다.
적의 수장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하들의 참상에도 머리를 굴렸다.
[무조건 달아나야 한다! 놈들이 지키지 않는 곳으로 무조건 뛰어라!]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낸 우두머리는 느닷없이 발로 흙을 걷어참과 동시에 조윤이 서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벼락같이 튀어 올랐다.
조윤이 뒤를 쫓은 생각도 없이 피식 웃었다.
“염라대왕의 품속으로 뛰어들다니. 멍청한 놈.”
조윤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절한 단말마가 숲 속에서부터 울렸다.
“크악!”
허공에서 자욱하게 이는 피 안개를 모두는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죽음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허공을 수놓는 핏물이 마치 안개처럼 퍼져 가는 환술과도 같은 광경에 모두는 두 눈을 부릅떴다.
“크악!”
“으악!”
뒤이어 터지는 비명들.
모두는 숨죽여 숲을 주목했다. 잠시 후, 비명이 그치고 숲을 헤치며 혁련천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가 나타나자 놀라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특히 적용세는 두 눈마저 부릅뜬 채 혁련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 처치했습니다! 주공!”
담대소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주공이라는 단어가 놀람의 대미를 장식했다.
* * *
모용세가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관산악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눈앞에 선 노인을 쳐다봤다.
그가 이처럼 놀라는 것은 태어나서 두 번째였다.
자신의 주인을 처음 보았을 때와 지금이 그랬다.
“제법 강한 놈이로다.”
관산악을 향해 안광을 번뜩이는 노인.
그가 바로 관산악을 놀라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은은한 녹색을 띤 노인의 눈동자가 관산악을 향해 있었는데 그가 입을 벌리자 입김까지 은은한 녹색이었다.
관산악은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이 감당하기 벅찬 상대라는 것도.
“놀랍군. 당신이 고작 이런 싸움에 끼어들다니…….”
“허허! 싸움에 크고 작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본 세가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노부는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네.”
“그 말은 지금 이 싸움에 끼어들겠다는 말인가? 후후! 당신이 아이들의 싸움에 끼어들 만큼 세속적인 줄은 몰랐군.”
관산악의 비아냥거림에 노인의 두 눈이 일순 살기를 번뜩였다.
“나 당률을 알면서도 함부로 지껄이다니. 그 용기는 가상하다만 죽으면서까지 그럴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그랬다.
노인이 바로 당가의 전대 고수이자 천하최강의 독공을 지녔다고 알려진 독제(毒帝) 당률이었다.
그는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관산악이 당곽을 비롯한 당가의 고수들을 쓸어 가려 할 때였다.
관산악으로서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셈이었다.
‘독공을 펼치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다.’
관산악은 언제 펼쳐질지 모르는 당률의 독공을 염려했다. 일단 펼쳐지면 그 피해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그를 죽여 버리는 것인데 거의 희망사항이나 다름없다.
당률은 오성에 버금가는 위인이다.
드러나지 않은 은거기인들까지 총망라한다고 해도 대략 이십 위권에 드는, 그야말로 엄청난 고수가 당률이다.
암습이라면 모를까. 정면 대결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당률의 붉어진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였다.
순간 관산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 호흡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시오!”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재빨리 숨을 멈추며 뒤로 물러섰다.
당률의 입가에 잔악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의 육신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더니 사방이 붉은색 연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미 모용세가의 무사 몇이 시커멓게 변하며 쓰러졌다.
“본가가 네놈의 눈에는 그렇게 가소롭게 여겨졌더냐? 허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들어야겠다.”
“늙은이! 네놈처럼 그 짓거리를 하니 천하가 너희 당가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독공이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관산악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한 발 전진하면서 외쳤다.
당률의 두 눈이 더욱 붉어졌다.
이미 모용미를 비롯한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호흡을 멈추고 상당한 거리 밖으로 물러난 상태였지만 몇몇이 또다시 괴로워하며 쓰러졌다.
당가의 인물들은 그런 그들을 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관산악만 처치하면 그들이야 독안에 든 쥐 꼴과도 같았다.
관산악과의 싸움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당곽이 살기 충만한 시선으로 관산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뒤에서 달려들어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당률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관산악은 당률을 노려보며 뒤쪽에 선 모용미에게 전음을 날렸다.
[싸움이 벌어지면 곧장 광동으로 달려가시오! 지체하면 오늘로 모용세가는 끝장이 날수도 있으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달려야 하오! 알겠소!]
모용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자신들이 가버리면 관산악, 혼자만 남게 된다.
자신들 때문에 벌어진 싸움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때 관산악의 전음이 다시 날아들었다.
[내 말대로 하시오. 그게 나를 돕는 것이오.]
“……!”
모용미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세가의 무사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지금이오!]
전음과 동시에 관산악이 당률을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쐐애액!
쾅!
강력한 폭발과 함께 시야를 가리는 엄청난 흙먼지가 치솟았다.
동시에 모용미를 비롯한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바람처럼 동쪽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