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귀환무사 101화>
제1장 분노를 삭이다
북궁천소가 악양루의 뒤편에 자리한 산을 쳐다보며 얼굴을 굳혔다. 뒤이어 거처에서 나온 모두가 그와 같은 얼굴로 산을 응시했다.
번쩍!
비가 오지 않는데도 벼락이 연신 밤하늘을 가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주공의 천살강기! 그것도 극성에 달한 것이다. 누군가? 주공을 저토록 긴장시킬 만한 존재가 천하에 있었단 말인가?”
북궁천소가 불신의 빛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 봐야 되는 것 아니냐?”
“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가 보는 게 좋겠지.”
조윤이 거처에 객실로 다시 들어갔다. 창을 가지러 간 것이다.
“주모께는…….”
말을 하던 왕전이 뒤를 돌아봤다.
독고혜가 그들의 뒤쪽에 서 있었다. 그녀도 이미 산에서 전해지는 기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가겠어요.”
그녀가 먼저 걸음을 놓았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 다다른 그들은 이내 경공을 펼쳐 빠르게 산을 향해 날아갔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난 직후, 악양루의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야조처럼 산을 향하는 그들은 악양루에 머무르고 있던 오성의 삼 인이었다.
하나같이 천하를 떨쳐 울리는 그들이, 뒷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격돌의 여파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셋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극심한 긴장감을 느껴 본 것은 단연코 오늘이 처음이었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전율이 일어났다.
“빨리 가세나.”
셋은 쏘아진 화살처럼 산을 향해 내달렸다.
* * *
혁련천후와 혁련강은 서로를 마주 보며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여전히 살기를 드리운 혁련천후와는 달리 혁련강은 안타까운 눈으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모든 것이 천하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네가 당했던 험난함과 용진의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지. 모든 게 나의 불찰이었으니. 허어…….”
“천하를 위해 나를 버렸다? 웃기는군. 그 천하는 나를 죽이려 했는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예상 밖의 일이었느니라. 너와 나는 한 핏줄, 영혼으로 연결된 몸들이다. 네가 죽으면 이 할아비도 죽는다. 내가 살아 있음을 본능이 알려 주었기에 안심하고 지금껏 너를 찾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막중한 임무가 내게 있었음을 믿어 줄 수 없겠느냐?”
그 말이 오히려 혁련천후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당장에 외쳤다.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내 부모가 죽었는데 당신은 왜 살아 있지?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 있는 거지? 혈육이 영혼으로 연결되었다면 내 부모라는 자들이 죽었을 때, 당신이나 나나, 다 죽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혁련천후의 변함없는 태도에 혁련강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것을 말하기엔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모든 일이 다 끝나면 네게 이 할아비의 목을 맡기마. 그것으로 네 분노가 풀린다면 네 기꺼이 그렇게 하마. 하지만 지금은 아니구나. 천하인들의 목숨을 지켜야 할, 너무나도 막중한 임무가 나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구나. 내겐 너 만큼이나 천하의 안녕이 소중함을 너는 이해하여야만 한다.”
혁련강의 신형이 느릿하게 돌아섰다.
혁련천후는 돌아서는 그를 어쩌지 못했다.
달려들어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었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발목을 잡고 들었다.
혁련강의 말이 이어졌다.
“완벽하지 않은 천살강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면 심장에 무리가 생긴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오늘처럼 무리하게 펼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네게 해 줄 말이 있는데…… 금역의 마공이 유출이 되었더구나. 혈마의 마공에다 철갑신마(鐵甲神魔)와 광승(狂僧)의 마공까지.”
놀라야 정상이건만 지금 혁련천후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는 곳에 어쩌면 그들 중 하나가 있을 수도 있단다. 나도 그곳으로 가는 길이니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야. 그러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겠구나.”
그 말을 남기고 혁련강은 바람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혁련천후는 그 자리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호흡도 가빠졌다.
더불어 가슴이 비수로 찌른 것처럼 아파 왔다.
이 모든 상황이 악몽 같았다.
자신의 기억에조차 없던 부모의 죽음 소식,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조부.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천하인들을 구해야 한다고…… 자식을 버리고 손자를 버린 당신이 천하인들을 구한다고…….”
천살강기가 일어나며 주변에 폭풍이 일었다.
“사부! 당신도 나를 속였습니까!”
콰지지직!
* * *
콰앙!
콰르르르르…….
산의 정상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자 독고혜가 그 자리에 내려섰다.
북궁천소를 비롯한 넷의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서둘러야 합니다, 주모님!”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그들은 이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룬 곳이 나타났다.
독고혜를 비롯한 모두는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혁련강이 숲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장 전투적인 성향을 지닌 북궁천소가 자신의 굉혈도를 뽑아들었다.
다른 이들도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로 혁련강을 주시했다.
‘젠장!’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이런 종류의 전율은 자신의 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나 느껴 보았던 것, 눈앞의 혁련강이 대체 누구이기에 자신의 주인과 비슷한 기운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침착하고 냉철한 성정을 지닌 조윤과 담대소천도 어느새 자신들의 창과 언월도를 뽑아 쥐고 있었다.
“더럽게 강한 자로군.”
왕전이 거친 호흡을 보이며 중얼거렸다.
느리게 보였던 혁련강은 짧은 시간에 그들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혁련강은 눈앞의 모두에게서 혁련천후와 같은 동질의 기운을 느꼈다.
천년금역을 들어갔던 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기운을 지니게 된다.
자신이 그랬고, 자신의 손자가 그랬으며, 눈앞의 이들도 분명 그곳에 들었던 자들임이 분명할 것이다.
혁련강의 시선이 독고혜에게서 멈추었다.
그녀의 몸 안을 맴도는 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핏줄만이 지닐 수 있는 그 힘을 독고혜가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둘의 사이를 쉽게 짐작게 해 주었다.
“좋은 눈을 지녔구나. 네가 그 아이를 위로해 주겠느냐? 많이 힘들어할 게야.”
“……!”
독고혜는 아무 말도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들이다. 평소였더라면 벌써 공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나중에 또 보자꾸나.”
스슥!
눈앞에 섰던 혁련강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보고도 믿기 힘든 극상승의 신법이었다.
담대소천이 혁련강이 사라져 간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주공과 비슷한 기운을 지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주공은 어디 계신 거야?”
모두의 시선이 산의 정상으로 던져졌다.
* * *
독고혜는 부러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혁련천후를 보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에게서 발산되고 있었다.
그래서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슬퍼하고 있어.’
그녀의 뒤에 선 넷 역시 말없이 혁련천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껏 이런 모습,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한 손을 이마에 얹고 손가락을 머리카락 깊숙이 쑤셔 박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혁련천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말이지…….”
모두는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천하를 죽이고자 한다면…… 군림천하를 버리고 옛날의 복수심을 되찾아 이 잘난 천하를 피로 쓸어버린다면…….”
“천후!”
“주공!”
독고혜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혁련천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목숨처럼 소중한 독고혜의 향기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가슴속 저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던 지독한 한(恨)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버렸던 천하가 아닙니까? 이 북궁천소! 주공이 아수라의 길을 걷고자 하신다면 기꺼이 그 앞에 제 피를 뿌려 드립지요.”
“나서지 마라, 천소.”
“닥쳐!”
자신을 만류하는 조윤에게 북궁천소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북궁천소의 굉혈도가 은은한 울음을 흘려 냈다.
왕전과 다른 존재들은 굳은 얼굴로 혁련천후를 똑바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독고혜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가던 그녀가 일순 표정이 굳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그리고 바닥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을 보았다.
‘왜……?’
울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사내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녀도 이내 눈물을 흘렸다.
* * *
정도맹의 호법 순우진은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난데없이 날아든 공격.
뒤이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아군들.
문제는 날아드는 공격이 너무나도 빠르다는 점이었다.
그의 뒤쪽 숲 속에서 번쩍하는 빛이 피어났다.
서걱!
떼구르르…….
번쩍이는 빛에 의해 잘린 목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뒤를 조심해라!”
“저쪽이다!”
대열이 흐트러진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그 와중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칼날에 의해 죽어 가는 자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순우진은 절망했다.
서른을 넘어가던 고수들 중 살아 있는 자는 고작 열에 불과했다.
어둠이 내린 산악 지역에 들어선 순간부터 시작된 암습은 어지간한 고수였던 그조차도 도저히 방향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적들의 움직임은 은밀하고 신속했다.
스물에 가까운 고수들이 죽어 가며 만들어 낸 성과는 고작 머리에서 발끝까지 흑포로 감싼 적, 하나의 목을 벤 것이 전부였다.
“모두 가운데로 모여 방원(方圓)을 형성하라!”
순우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가 재빨리 동그랗게 원을 형성하며 방어진을 갖추었다.
최적의 방어진인 방원을 펼치자 사위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너무 늦은 대응이었다.
그러기를 일각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후후! 너무 약해서 실망하고 있었는데 스물을 잡아먹고야 머리가 돌아갔나 보군. 순우진.”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무리들이 정도맹 고수들과 이 장 거리 밖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순우진은 내공을 끌어 올려 나타난 무리들을 살폈다. 각양각색의 옷을 걸친 그들은 모두 스물, 하나같이 칙칙한 죽음의 냄새를 풍겨 냈다.
“나를 알면서도 공격을 했다면 네놈들은 용성의 졸자들이겠구나.”
“흐흐! 그대가 대단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천하에 본 성의 이목을 벗어날 것은 없지. 물론 너처럼 실력은 없으면서 요직에 앉은 자들은 더더욱 그렇고 말이야.”
순우진은 나타난 적들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같이 죽음을 경험한 놈들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던 그였지만 싸움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그였다.
지금껏 수많은 대결을 통해 겨루었던 자들 중, 지금 눈앞의 무리들과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언젠가 마교의 고수들과 싸움을 벌였을 때에도 음습함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합류해서 함께 올 것을…….’
전공을 세우고자 욕심을 부렸던 것이 후회막급으로 다가왔다.
그때,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회색 장발의 중년인이 느릿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 정도맹이 팔로로 흩어져 이곳을 향하고 있다고 들었다. 물론 광동을 밟기 전에 대부분은 그대처럼 죽게 될 것이다. 너희들을 죽이고자 우리도 팔로로 흩어졌거든…….”
그의 말에도 순우진은 말을 받지 못했다.
지금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건지, 그 방도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용성의 고수들이 느릿하게 좌우로 벌어지며 다가들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정도맹 고수들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세했다면 먼저 선공을 펼쳤겠지만 수세에 몰린 그들은 오직 용성의 고수들이 먼저 달려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나마 반격이 살아날 확률을 조금이나마 높여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죽어 줘야겠다. 순우진!”
쐐애액!
“크아악!”
혈전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적이 뒤에도 있었기 때문에 미처 반격을 해 보지도 못하고 순우진을 비롯한 모두는 죽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