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귀환무사 100화>
악양루에서 혁련천후와 기 싸움을 벌였던 바로 그 백포인인이었다.
기척을 느꼈음일까?
백포인이 천천히 돌아섰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보며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대략 일각이 흘렀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백포인이었다.
“자네의 눈빛을 보고는 그냥 갈 수 없었다네. 그래서 불렀지.”
“아직 이유를 대답해 주지 않았소.”
“허허! 이유야 아까 말을 했지 않은가?”
담담한 태도에 혁련천후는 싸늘히 응대했다.
“장난을 치자고 오라고 한 것은 아닐 테고, 나와 겨루어 보고 싶은 것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가는 혁련천후의 태도에 백포인은 돌연 껄껄 웃었다.
“허허허! 솔직히 말하자면 백 년을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지독한 투기로 휩싸이는 내 자신은 처음이었네.”
‘백 년이라니.’
놀라웠다.
고작 마흔 정도로 보이는 그가 백 년을 살았다니.
그것만으로 그의 경지가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혁련천후의 시선이 중년인의 오른손으로 향해졌다.
백색 손잡이에 수놓아진 청룡의 형상,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혁련천후가 예상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당신이라 짐작했었지.”
“그런가? 허허! 자네의 나이를 생각하면 나를 본 적이 없을 터인데, 누군지 짐작을 했단 말인가?”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적수이니까.”
순간 백포인의 두 눈이 섬광을 발했다.
그 강렬함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뇌전이 작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포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노부를 적수로 여기는 자가 존재할 줄은 미처 몰랐군. 허면 그대는 누구인가?”
“혁련천후!”
“좋은 이름이야. 그대의 그 눈빛만큼이나…….”
중년인이 느릿하게 혁련천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혁련천후는 내심 불쾌했다.
‘내 신분 따윈 상관없다 이건가?’
우우웅!
강대한 기운이 몰아쳤다.
순간 혁련천후는 거대한 폭풍이 자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착각을 일으켰다.
백포인은 혁련천후의 삼 장 정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형의 기운들이 주변을 요동쳤다.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흙먼지가 치솟아 올랐다. 둘은 그렇게 잠시 서로를 직시했다.
그러다가 백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십 년 전인가, 노부가 가장 인정하던 친구가 그만 죽어 버렸다네. 자네를 보니 그가 떠오르는군. 왠지 아는가?”
“……!”
“무척 닮았어. 그와 자네는…….”
‘나를 닮은 사람이라니.’
혁련천후는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백포인을 똑바로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중년인이 혁련천후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석수라고 들어 봤나?”
‘이자가 어떻게 나를.’
혁련천후의 내심 크게 놀랐다.
변장을 한 자신을 알아보다니.
속내를 감추려 했지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백포인의 두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대였는가?”
혁련천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포인이 말을 이었다.
“죽은 줄 알았네. 세상이 그대를 쫓는다고 들었지. 그리고 그 친구 또한……. 노부가 중원에 들어섰을 땐, 이미 그 친구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산야에 묻혔더군. 그대 역시 천년금역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들었고 말이네.”
싸아아!
혁련천후의 전신에서 싸늘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나와 사부님을 쫓는 쪽에 있었소?”
“허허허! 진정하게. 비록 늙었으나 그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네.”
적이 아니라는 말에 싸늘한 기운이 다소 줄어들었다.
백포인이 다시 말했다.
“내게 어깨를 보여 줄 수 있겠나?”
순간 혁련천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어깨를 보여 달라는 자가 눈앞에 있었다.
자신의 어깨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자신도 모르는 표식이 자신의 어깨에 있었다. 그것은 사부도 모르는 것, 어렸을 적부터 물었지만 사부는 모른다고만 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중년인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당신의 진정한 정체가 무척 궁금해졌소.”
스르릉!
혁련천후의 검이 만월에 반사되어 빛을 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검을 뽑는 것을 보면서도 백포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상에 그것을 아는 사람은 죽은 사부와 나 자신뿐이었소. 그런데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들어야겠소!”
“네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나도 그중 하나이고…….”
혁련천후에 대한 호칭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러더니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사람들이 그러더군.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말이오. 그래서 가끔 생각했었소. 언젠가 당신을 꺾어 세상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겠다고 말이오. 생각보다 빨리 그날이 찾아온 것 같소.”
“너는 나와 싸울 수 있지만 나는 너와 싸울 수 없단다.”
말투는 어느새 자애롭게 바뀌었다.
그 이상한 변화에도 혁련천후는 여전히 싸늘한 기운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였다.
백포인이 돌연 하늘을 우러르며 격동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허! 하늘이 무심치 않아 드디어 너를 내 곁으로 보내 주었구나.”
“……!”
돌연한 행동에 혁련천후는 흠칫했다.
저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하늘을 우러르던 백포인이 다시금 시선을 돌려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한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견오는 그저 허수아비에 붙인 옷과도 같은 것, 늙어 버린 이 몸에는 너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단다, 아이야.”
혁련천후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니.
자신은 고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린가.
치르륵!
검 끝에 강기가 맺혔다. 뒤이어 백포인을 향해 천천히 겨누었다.
“내겐 가족이 없소.”
* * *
“너는 내 하나뿐인 손자이니라.”
이건 또 뭔가.
내가 자신의 손자라니. 없던 조부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모든 것은 차차 다 말해 줄 터이니 그 검을 거두어라, 아이야.”
혁련천후의 두 눈은 서서히 불꽃을 머금어 갔다.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천하제일 고수라는 일존(一尊) 견오가 자신의 조부라니. 다른 이들이라면 자랑스럽게 여길 테지만 그는 달랐다.
아무 이유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성씨를 쓴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소. 내 기억에 당신 같은 사람은 없으니까.”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였다면 믿어 주겠느냐?”
“뭐가? 무엇이 나를 위해서였지? 그리고 당신……!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물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어.”
말투가 거칠고 사납기 그지없다.
혁련강의 얼굴이 회한으로 물들었다.
“이 할아비가 네게 무슨 면목이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모든 것을 들어 본 뒤에 다시 말하자꾸나. 하니 그 검부터 치우거라.”
“후후후! 정체부터 밝히시지.”
평소의 냉철한 혁련천후가 아니었다.
용암처럼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고 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기억 속에 전무했던 가족에 대한 감정이 들불처럼 끓어올랐다.
진정 자신의 조부라면 십 년 전, 천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죽어 갈 때,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핏줄 따위,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지. 사부의 손을 잡고 화산의 산문을 넘어서기 이전의 기억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렇게 삼십 년을 살아온 나다. 한데 이제 와서 내 할아버지라고? 당신이라면! 당신이 지금의 내 입장이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혁련강의 두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네 부모는 죽었다. 네 아버지의 피로 너를 낳았고 네 어미의 피로 너를 살려 냈다. 그리고 용진의 피로 너를 만들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크크! 웃기는군. 지금껏 부모형제에 대한 생각 따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게, 아니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게 죽은 부모가 있었단 말이군. 그것도 느닷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당신에게서 그것을 듣게 되고 말이야. 웃기지 않나?”
바람 한 점 없었건만 혁련천후의 장포가 심하게 요동쳤다.
깨문 입술에서 선혈이 턱을 타고 흘렀다.
지금껏 혼자 살아온 자신에게 부모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죽었단다.
지극히 우연히 만난 천하제일 고수가 자신의 핏줄이란다.
이런 개 같은 경우는 소설에도 없다.
“그럼!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냐고!”
콰아앙!
쾅!
혁련천후는 절규하며 혁련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지직!
흙먼지가 폭풍처럼 치솟으며 주변이 초토화가 되었다.
혁련강은 안타까운 시선을 그에게 주고 있을 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혁련천후가 다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혁련강의 두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자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강대한 기운, 바로 지독한 살기였다.
비통함이 심장을 찌르고 폐부를 뒤흔들었다.
삼십 년 만에 만난 혈육이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든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건만, 저 손자의 분노를 이해하려 했다.
혁련강의 우측 공간이 흔들리며 섬광이 일었다. 혁련강은 황급히 검으로 섬광을 쳐내고는 뒤쪽으로 물러섰다.
꽝!
사라졌던 혁련천후가 그가 섰던 곳에 나타났다.
“대단하군. 당신처럼 잘난 인간이 내 핏줄이라니 이거, 좋아해야 하나. 천하제일 고수가 내 핏줄이라 자랑하며 춤이라도 추어야 할까!”
혁련강은 그저 말없이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분노한 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주르륵!
혁련천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야…….”
눈물을 본 혁련강은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에 눈시울을 붉혔다.
드드드…….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혼자 살아가게 내버려 뒀어야 했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들이 버린 나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이라 여겼어야 했소. 그랬다면 이렇게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오.”
말투가 바뀌었다.
혁련강은 혁련천후가 진정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이었다.
번쩍!
까가가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