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98화 (96/425)

# 98

<귀환무사 98화>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적의 목을 잘라야 했다.

내년에 예정된 승급 심사에서 자신은 무조건 승진해야만 했다.

당초 자신과 한 배를 탔었던 무당의 이탈로 우군이 사라지자 내심 초조해진 그는 용성과의 전쟁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적이라고 생각되면 무조건 참살한다! 전공을 세운다면 큰 보상이 따를 것이니 힘들더라도 조금만 견뎌 내고 참아라!”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큰소리로 고수들에게 외친 그는 가장 선두에서 질주했다.

그리고 반 시진이 흘렀다.

산맥을 넘어서자 광동의 드넓은 평원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저 평원을 가로질러 하루를 더 가면 용성의 무리들이 장악한 정도맹 남지부가 있었다.

순우진의 두 눈이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호법님! 저희들만 먼저 적진에 들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일차 집결지도 무시하고 이곳까지 온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불만이 터져 나오자 순우진은 싸늘히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니 광주 진가 소속의 고수였다.

순우진의 굵은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느릿하게 모두를 살펴본 순우진은 끓어오르는 분을 삭였다.

모두의 얼굴이 진가의 고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였다.

제아무리 순우진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좋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 술을 지닌 자들은 적당히 마시는 것 정도는 허락한다. 단, 시간은 반 시진이니 그리 알거라!”

순우진은 어쩔 수 없이 휴식을 명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른 아군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휴식으로 고수들의 불만을 무마시킨 후, 곧장 쳐들어갈 작정을 했다.

모두가 술렁거렸다.

그러나 순우진은 끝까지 무시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는 아무도 오질 않았다. 술을 좋아하는 순우진은 은근히 후각을 자극하는 주향에 침이 돌았지만 참아야만 했다.

누가 먼저 갖다 주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마시겠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자 내심 화가 치밀었다.

‘고약한 놈들. 공을 세우면 나만 잘 되는 것이 아닌 것을.’

한편, 혁련천후와 일행들은 앞서 출발했던 화산파의 제자들과 질풍대를 금방 따라잡았다.

진유가 다가왔다.

“곧 일차 집결지인 악양루에 도착합니다. 그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진유는 혁련천후가 번잡함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물은 것이다. 싫다면 조용한 곳에 객잔을 따로 잡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혁련천후가 독고혜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배고파요.”

“악양루로 가겠다.”

“알겠습니다! 악양루로 간다!”

진유가 몸을 돌려 모두를 향해 나지막이 외쳤다.

진호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대로 된 음식을 떠올리자 벌써 배가 고파 왔다.

무심결에 질풍대를 응시하던 혁련천후가 이채를 발했다.

자신을 힐끗 힐끗 쳐다보는 무사가 있었는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는 이내 그 무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영백을 죽이고 나설 때 자신과 부딪혔던 무당의 청년 고수였다.

그때 자신은 변장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을 그가 몰라봤어야 했지만 어쩐 연유에선지 힐끗 거리며 낯빛을 굳히곤 했다.

“와! 악양이다!”

선두에서 걷던 진청이 눈앞을 환히 밝히는 불빛들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산 아래로 보이는 수많은 불빛들은 악양의 화려함을 잘 보여 주고 있었는데 과연 천하제일의 유흥 도시다운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팔로로 흩어졌던 고수들이 모두 모이면 악양루로는 좁을 텐데…….”

“뭐, 다 생각하고 집결지로 했겠지. 제법 출출한데 모처럼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겠군.”

“악양루의 금존청이 천하제일이라지? 황제에게 진상을 한다고 하니 죽여 줄 거야?”

“자식아! 그게 얼마나 비싼 줄 아냐? 그저 우린 독한 화주가 최고다. 값도 싸고 양도 많고.”

일행들의 대화를 듣던 영호수란이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금존청 마셔요. 돈은 제가 낼게요.”

“진짜냐?”

왕전을 비롯한 넷의 눈이 번개처럼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평소의 활달함을 어느 정도 되찾은 영호수란이 입을 삐죽였다.

“술 사 준다고 하니 눈빛부터가 달라지네요? 오는 내내 한 번도 쳐다보지 않더니만. 쳇!”

“아니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쳐다봤다. 네가 못 봐서 그렇지.”

왕전이 손사래를 쳤다.

셋이 어이없어 왕전을 노려봤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왕전이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

“기왕이면 안주도 사라. 내가 누구냐? 너의 호위 무사가 아니냐? 천하의 그 어떤 놈도 내가 다 막아 준다!”

“호위 무사요?”

“네가 그랬잖아. 싸움이 일어나면 보호해 달라고. 그래서 임시로 호위 무사가 되기로 했다.”

별 희한한 꼴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왕전을 쳐다보는 존재들과는 달리 영호수란은 활짝 웃었다.

왕전의 행동이 오늘따라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웃자 독고혜도 웃었다.

그녀는 혁련천후에게 전음을 날렸다.

[착하고 너무 맑아요. 그렇죠?]

혁련천후는 독고혜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좋았겠어요. 천하제일 미녀의 벌거벗은 몸을 적나라하게 보셨으니.]

혁련천후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두르자!”

독고혜는 영호수란을 돌아봤다.

“나도 금존청 사 줘요.”

“우린 더 비싼 거 먹어요, 검후님!”

“호칭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냥 언니라고 해요. 내가 몇 살은 위이니까 그래도 되겠죠?”

“정말요? 아하! 좋아요! 언니!”

둘이 이내 쏜살같이 앞으로 질주했다.

그러자 왕전이 재빨리 그녀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북궁천소가 툴툴거렸다.

“호위 무사 한번 제대로 하는군. 저 자식 언제부터 저렇게 능글맞아졌지?”

“그러게.”

악양루의 주인 해월랑은 밀려드는 손님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려도 시원찮을 판에 인상만 잔뜩 찡그렸다.

전 삼 층으로 이루어진 악양루는 중원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수백에 가까운 손님들이 반나절에 걸쳐 끊임없이 찾아오자 좌석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

장사치라면 이처럼 많은 손님의 방문에 좋아서 춤을 춰도 모자랄 일이었지만 해월랑의 표정은 결코 좋은 빛이 아니었다.

“내가 미쳤지! 그럴싸하게 온갖 개폼은 다 잡고 다니는 인간들이 거지보다 못한 줄 알았다면 계약을 하지 않았을 것을! 아휴! 성질나!”

그녀는 며칠 전 느닷없이 악양루를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몇날 며칠 전 층을 비워 놓으라는 협박성 계약을 맺고 말았다.

그 상대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거절하지 못했다.

정도맹 악양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꽤나 강하고 유명했던 위인이라 마지못해 헐값에 계약을 해 주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맞아 죽었더라도 계약을 하지 말았어야지 하는 후회가 물밀 듯이 생겨났다.

숫자는 대단했지만 그들이 시켜 먹는 음식이나 술은 최하급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악양루를 찾는 명문세가나 고관대작들 몇 명만 받아도 이 정도 매상은 거뜬했다.

게다가 얼마나 시끄러운가?

귀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무림인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시정잡배 정도로 여겨졌다.

“아휴! 짜증 나!”

그녀는 삼 층을 보며 발을 굴렀다.

그나마 제법 높은 인물들만 들어선 삼 층은 일이 층보다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짜증을 참지 못했다.

평소 삼 층은 어지간한 명문세가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엄청 고가의 제품만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술 한 병에 은자 세 냥을 호가하는 최상급 금존청이 평소에도 백 병 이상이 나가는 곳이 삼 층이다.

그러나 오늘은 고작 열 병 정도만이 팔렸을 뿐이다.

금존청을 시키면 무료로 딸려 나가는 최고급 해산물의 가격을 생각하면 남는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이곳이 악양루 맞소?”

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짜증을 냈던 해월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한 미소로 바뀌며 뒤로 돌아갔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쉰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의 행색을 본 그녀는 올라오는 욕설을 간신히 견뎌 내고는 미소로 대답했다.

“천하제일 악양루를 찾으셨다면 이곳이 맞습니다!”

잘못 보이면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종자들이 무림인들이다.

오랫동안 장사를 해 오면서 겪어 본 무림인들은 그저 머리를 숙여 주면 좋아라 하는 족속들임을 그녀는 온몸으로 깨우치고 있었다.

비명횡사하기엔 너무 젊고 벌어 놓은 것이 너무 많았던 해월랑은 속내와는 달리 최고의 친절함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자리가 모조리 찬 듯 보입니다만…….”

“당연히 자리가 없지요. 보시다시피 저렇게 많은 분들이 아침부터 이곳을 찾았답니다.”

진유가 난감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냥 다른 곳으로 가요.”

독고혜가 혁련천후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말에 왕전을 비롯한 모두가 입맛을 다셨다.

최고급 금존청에 목말라 있는 그들이 아닌가. 그때 영호수란이 해월랑 앞으로 쑥 나섰다.

“악양루는 뒷마당이 매우 아름답다죠? 그곳을 내어 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어요.”

‘뭐! 뒷마당을 내어 달라고…… 맹랑한 것!’

해월랑의 고개가 빠르게 영호수란을 향해 돌아갔다.

‘어머!’

해월랑은 깜짝 놀랐다.

같은 여인인 자신이 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그녀는 느릿하게 사람들을 살폈다.

시선이 혁련천후의 옆에 서 있는 독고혜에게 이르자 그녀의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들이라면 필시 무림에 유명한 여고수들이 분명해. 그리고 저 기품! 저 우아함! 분명 명문세가의 여식들이 맞겠어! 뒷마당이라도 내어 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장사를 해먹을 수 없을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해월랑의 주름진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변했다.

“호호! 아름다운 선녀님께서 운치를 아시는군요. 요즘 같은 날씨엔 답답한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즐기시는 것이 최고랍니다. 이 몸이 직접 모시겠으니 저를 따라오시와요.”

해월랑이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몸을 돌려 걸었다.

흑영대원들뿐 아니라 질풍대원들까지 얼굴이 밝아졌다.

그들이 이런 최고급 객잔을 언제 와 보겠는가.

자신들의 봉록으로는 한 끼 식사에 몇 달 치가 날아가는 곳이 악양루다.

모두가 악양루의 주변 풍경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서보며 해월랑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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