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귀환무사 96화>
쉽게 죽여 그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십 년까지 두고 볼 생각 또한 조금도 없었다.
참전에서 돌아오면 하나하나 찾아가 숨통을 끊어 버릴 계획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화산과 신마성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수하들과 화산의 제자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광동을 가는 이유는 가장 큰 목적은 그러한 점에 있었다.
천하인들의 이목이 쏠린 전투에서 다른 문파들보다 월등한 전공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명성이 올라갈 것이다.
적당한 전투에선 화산의 이름으로, 강한 적과 맞닥뜨리면 신마성이란 이름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침공이 나를 도와주는 꼴이 되어 버렸군.’
문득 용성이라는 곳이 고맙게 여겨졌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아주고 신마성이란 이름을 만천하에 저절로 알릴 수 있을 것이며 막대한 전공과 명성 또한 얻게 될 것이니 도랑치고 가재 잡는,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철거럭!
북궁천소의 몸에 걸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이동하는 속도는 제법 빨랐다.
적이 출현하는 지역이 아니니 모두는 긴장감 없이 빠르게 질주했다.
주변을 돌아보던 혁련천후는 문득 독고혜와 영호수란이 보이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놈들!”
싸늘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왕전과 북궁천소를 비롯한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혁련천후는 독고혜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을 질책하고는 내공을 끌어 올려 감지할 수 있는 최대 범위까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
순간 눈빛이 흔들리더니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어? 왜 저러시지?”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혁련천후를 바라볼 때, 왕전 등이 뒤이어 몸을 날렸다.
* * *
독고혜는 느닷없이 습격을 가해 온 자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영호수란 역시 검을 뽑아 들고서 긴장한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팔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부상을 입은 것이다.
“생긴 것만큼이나 대단한 계집들이군.”
죽립을 쓴 자들의 턱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 말투가 굉장히 어색했다.
독고혜는 죽립인들이 중원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중원은 계집들조차도 강기를 다룰 줄 아는군. 확실히 멋진 곳이란 말이지. 후후후.”
독고혜의 검 끝에 맺힌 강기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쳐다본 죽립인들이 재차 몸을 날려 그녀를 덮쳤다. 뒤에 선 죽립인을 제외한 넷 전부가 그녀 하나만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깡!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검을 받아친 독고혜는 몸을 회전시켜 좌측으로 쭉 미끄러짐과 동시에 검을 횡으로 그었다.
강기다발이 넷을 향해 날아갔다.
꽝!
선두에서 날아든 자의 검이 강기를 후려쳐 소멸시키자 다른 셋이 완벽한 방위를 점하고서 그녀의 육신을 노리고 들었다.
넷이 하나처럼 움직이자 그 신속함과 날카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파 팍!
세 방향에서 날아든 강기를 몸을 날려 피한 독고혜의 육신이 허공에서 회전을 하며 연속적으로 강기를 펼쳐 냈다.
지켜보던 죽립인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담겼다.
‘놀랍군. 저 정도면 결코 유소의 아래가 아니다. 그저 놈들의 계집 정도로만 여겼는데 그게 아닌가?’
그랬다.
죽립인은 유소의 복수를 하려 중원으로 들어선 동영의 고수들 중 한 명이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장원으로 숨어들었던 그들은 기회를 노리던 차에 남쪽으로 이동을 하는 그들을 은밀히 뒤쫓는 중이었다.
때가 되면 암습하고자 기회만을 노렸던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혁련천후를 비롯해 강해 보이는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껏 뒤만 쫓고 있었는데, 때마침 무리에서 떨어져 걸어가는 독고혜와 영호수란을 발견하고는 공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그녀들의 미색도 미색이지만 여차하면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인질은 고수들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지금껏 그래 왔고 그것은 가장 확실한 효과를 어김없이 가져다주었다.
‘놈들이 오기 전에 사로잡아야 하는데…….’
죽립인은 들어 뒤쪽을 응시했다.
뭔가에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이 보였다.
순간 죽립인의 눈에 초조함이 어렸다.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그는 재빨리 수하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빌어먹을 계집!”
독고혜의 놀라운 무공을 보니 저들이 오기 전에 그녀를 잡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영호수란을 향해 돌아갔다.
검을 잡은 채 긴장한 모습으로 싸움을 주시하는 그녀는 죽립인의 눈에는 무방비 상태로 보였다.
죽립인의 두 눈에 악독함이 어렸다.
‘저 계집이라도 잡아야 한다.’
팟!
죽립인의 육신이 그림자를 남기고 영호수란을 향해 날아갔다.
독고혜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던 영호수란은 날아드는 기운을 느끼고는 재빨리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팍!
죽립이 두 조각으로 잘라지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헛!”
죽립인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토해졌다.
의외로 영호수란의 공세가 막강했다.
쉽게 보다가 하마터면 저승으로 갈 뻔했던 죽립인은 인질이고 뭐고 간에 그냥 죽이기로 작정했다.
“죽일 년!”
“죽일 놈!”
영호수란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검을 세웠다.
그러자 그녀의 검 주변에 무형의 강기막이 형성되었다.
쐐액!
검이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꽝!
“윽!”
영호수란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공격을 했던 자의 얼굴이 불신의 빛으로 가득했다. 죽이고자 제법 힘을 실었던 공격이 막힌 것이다.
창백해진 영호수란이 입가로 선혈을 흘려 냈다.
한 번의 충돌에 그만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현격한 내공의 차이는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직접적인 충돌에선 내공이 부족한 쪽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영호수란이 그와 같은 경우였다.
“또 덤벼 봐! 죽일 놈아!”
그래도 그녀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비록 돌연한 상황에 놀라 판단력이 흐려졌던 그녀였지만 십전무제를 조부로 둔 그녀다.
당연히 십전무제의 무예를 일부 전승했으니 단 한 수로 그녀를 죽일 자, 천하에 몇 없다고 봐야 했다.
죽립이 날아가 얼굴이 드러난 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이고자 한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랬다간 자신들도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다가오는 강대한 기운이 벌써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포기하고 돌아간다!”
그가 이를 갈며 분한 목소리를 냈다.
독고혜를 공격하던 자들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독고혜가 빠르게 영호수란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예. 견딜 만해요.”
땀으로 범벅이 된 독고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혁련천후가 심어 준 내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었을 만큼 강한 상대들이었다.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두려운 점이었다.
휘이익!
마침 그 사랑하는 사람이 놀란 얼굴로 자신의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독고혜는 한없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윤이 주변을 살피며 눈빛을 발했다.
곳곳에 난 흔적들을 살피던 그는 독고혜를 보며 물었다.
“놈들의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십시오.”
“죽립을 썼고 적포를 걸쳤더군요. 그 외에는…… 아! 두발이 이상했어요. 양옆을 밀고 상투를 틀었더군요.”
흠칫한 조윤이 영호수란을 돌아봤다.
창백한 얼굴로 나무에 기댄 채 호흡을 다스리던 그녀를 보며 조윤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히 십전무제의 손녀가 아니군.”
조윤은 독고혜가 거론한 자들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이 생각한 자들이 맞다면 그들을 만나고도 살아남은 영호수란은 운이 좋거나 자신이 그녀를 너무 약하게 본 것이 틀림없다.
물론 검후는 다르다.
원래부터 고수였고 만년삼왕을 먹으면서 내공이 더 강해졌지 않은가.
“아는 놈들인가?”
혁련천후가 물었다.
조윤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동영의 부상막이란 곳에서 온 놈들인 것 같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놈들인데, 제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를 노리고 있을 겁니다.”
“강한 놈들이냐?”
“하나같이 고수들입니다. 그나저나 주모님께서 참 대단하십니다. 넷을 상대로 싸우셨다니 말입니다.”
혁련천후는 영호수란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독고혜를 응시했다.
조윤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조금만 늦게 현장에 도착했더라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제법 한 수 하는 놈들이군. 지금껏 들키지 않고 기척을 숨길 정도라니, 다음에 보면 다리를 잘라 대갈통에 붙여 줘야겠어.”
“흑야, 놈을 데리고 왔으면 볼만했겠군.”
조윤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흑야, 놈에게는 상대가 못 된다.”
“하긴.”
그때 혁련천후가 조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놈들의 숫자는?”
“용성 말입니까?”
“부상막!”
“아! 대략 오십여 명 정도 됩니다. 그중 막주라는 자를 제외하면 여섯 정도가 신경을 써야 할 수준에 오른 고수들인데, 그중 한 놈은 제 손에 죽었습니다.”
혁련천후는 조윤의 대답을 듣고는 성큼 독고혜와 영호수란의 곁으로 걸어갔다.
“이제 식겁을 했으니 다시는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않겠군.”
왕전의 말에 조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에 연연할 놈들이 아니다. 악종으로 소문난 놈들이니 언제 어디서 다시 기회를 노리고 들지 모르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영호수란의 상처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악화되었다.
가벼운 자상으로 생각했던 곳이 점점 푸르게 변하더니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영호수란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사공진무가 없었기에 모두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말도 간신히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진 영호수란 때문에 일행들은 이동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