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귀환무사 94화>
“섭섭하겠군.”
“뭐가요?”
“그자를 살려 둬서…….”
“조금은…… 하지만 더 큰 것을 얻었으니 괜찮아요. 당신이 하는 일에 저도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요.”
“조금이 아니라 전부지.”
“고작 그 정도를 가지고 뭘요. 아무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요.”
둘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뒤쪽에서 난데없이 쿵 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돌아보니 커다란 나무가 뿌리째 뽑혀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발을 감싸고 동동 구르는 영호수란이 있었다.
그녀는 아픔에 눈물을 머금은 채, 혁련천후와 독고혜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는 다시 걸었다.
독고혜가 다시 물었다.
“참전을 하실 거죠?”
“…….”
“왜 대답을 안 하세요?”
“그랬으면 좋겠느냐?”
“그럼요.”
결국 혁련천후는 참전을 결정했다.
* * *
사천성의 중심에 제법 큰 규모로 자리 잡고 있는 모용세가는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세가를 뛰쳐나갔던 모용단승의 무용담은 세가의 모든 인물들에게 웃음을 찾아 주었다.
그리고 관산악의 존재도 무시 못했다.
그가 오왕에 버금가는 고수라는 것이 알려지자 모두는 당가의 복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관산악이 모용세가의 무사들에게 무공 사범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모두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세가를 찾은 다음 날부터 시작된 수련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는데,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힘들어도 웃으면서 수련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을 그저 화산 신마각의 각주라고 소개한 관산악은 하루하루가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 속내는 오직 그만이 알 뿐이다.
각설하고.
오늘도 수련을 마친 관산악은 모용미와 모용조가 마련한 술자리에 초대되어 무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저 모용미를 보는 것만으로 삶이 즐거웠던 관산악은 세가의 무사들이 건네준 술잔을 모조리 비워 버린 탓에 제법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 같은 고수가 술에 취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관산악은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서 술자리를 즐겼기에 딱 기분이 좋을 만큼 취한 상태였다.
“대협 덕분에 본 세가의 무사들이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소이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모용조가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관산악이 호탕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별말씀을요. 그저 제가 심심해서 낙으로 삼은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스스로가 이런 식의 말투는 참으로 어색했다.
거칠게 살아온 인생이니 말투 역시 항상 거칠었던 그다.
명문세가의 인물들이 흔히 쓰는 말투는 그에게 영 아니었지만 모용미 때문에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관산악의 가슴에 이미 깊숙이 박혀 버린 모용미가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제가 한 잔을 따라 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습니다!”
관산악은 넙죽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가 주는 것이라면 독약인들 못 마시랴. 그가 술잔을 비우자 이번엔 모용조가 다시 술을 권했다.
다시 한 잔을 단숨에 마셔버린 관산악은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으! 이거 내공으로 주기를 배출하든가 해야지. 돌아 버리겠군.’
하지만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체외로 술기운을 배출할 순 없었다.
“가주님! 저희는 용성과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습니까?”
무사하나가 모용미에게 물었다.
모용미는 즉답을 못했다.
세가의 명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참전을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자신이나 세가 무사들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저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녀의 속내를 짐작한 관산악이 질문을 했던 무사를 보며 말했다.
“공을 세울 기회야 살다 보면 수도 없이 찾아온다. 당장은 너희들의 수준을 일정 부분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우선이야. 중원 정벌을 노린 자들이라면 당연히 정예들만 추려서 왔을 것이다. 의기를 앞세워 천하에 그 뜻을 보여 주는 것도 좋다만 살아남아 더 큰일에 힘을 보태는 것이 진정 천하를 위하는 길이겠지.”
평소엔 하지도 않았던 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관산악을 응시했다.
“내일부터는 수련의 강도를 조금 높여 주십시오! 하루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습니다!”
“좋지! 좋아! 내일부터는 딱 두 배로 높여 주지!”
“허허! 내일부터는 밥도 두 배로 지어 놔야겠구나!”
모용조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무사들이 열정을 보이니 그는 자신의 집이라도 팔아 저들을 뒷받침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마지막 남을 술병을 차례로 부어 모두가 마지막 잔을 들 때였다.
정문에서 무사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가주님!”
그 얼굴빛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모용미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당가의 인물들이 지금 정문 밖에 있습니다.”
순간, 모용미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모용미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모용단승에게 팔이 잘려 버린 당치성의 일을 그냥 두고 넘어갈 당가가 아니지 않은가.
“나를 부르던가요?”
“그게, 광동으로 가는 길에 하룻밤 묵고 가자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 표정들이 워낙 살벌한지라…….”
말이 좋아 하룻밤 묵고 가자는 것이지 돈 많은 당가가 뭐가 아쉬워 다른 세가의 신세를 지겠는가.
“알겠어요! 곧 나가겠다고 전하세요.”
그때였다.
돌연 관산악의 주변이 지독한 술 냄새로 진동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내공으로 술기운을 모조리 배출한 것이다.
“함께 갑시다!”
“고마워요!”
관산악이 먼저 성큼성큼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모용미과 모용조, 그리고 세가의 무사들이 따랐다.
당가의 장로 당곽은 오만한 자세로 모용세가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 서른에 달하는 당가의 고수들이 팔짱을 끼고서 정문을 지키고 선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광동을 향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모용세가와의 은원을 해결하고자 이곳을 찾은 것이다.
빚진 것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 당가였고 그 전통은 당금에 이르러 어겨선 안 될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비록 화산에게 두 번의 망신을 당한 사천당가지만 그 세력의 강성함이 세가 역사상 최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자신을 했고 천하 또한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니 모용세가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당곽은 모용미가 어서 나오길 바랐다.
적당한 시비를 만들어 모용미의 사지 하나는 반드시 자르겠다는 심보를 굳히고 있었던 당곽은 정문 너머를 살벌하게 응시했다.
반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모용미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른에 달하는 무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을 보던 당곽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저것들도 무사라고…….’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저들 전부를 당가의 정예무사 다섯이면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당곽의 눈에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그저 그런 삼류 정도로 여겨졌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신지요?”
모용미가 당곽의 이 장 앞에 걸음을 멈추며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모용조가 그녀의 왼쪽에, 관산악이 오른쪽에 섰다.
본모습으로 돌아간 관산악을 당가의 인물들은 몰라봤다.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당곽이 짐짓 정중한 어조로 답했다.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았소. 광동으로 가는 길에 하룻밤 이슬이라도 피할까 싶어 들렀는데, 그래도 되겠소?”
말투는 정중했으나 말끝은 지나치게 살벌했다.
“마침 빈방이 많으니 들어오시지요.”
“그럴까?”
당곽이 한껏 오만한 태도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가 거침없이 성큼성큼 모용세가의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에 섰던 당가의 고수들이 뒤를 따랐다.
모두가 모용미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관산악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생겨났다.
‘언제 오나 기다렸는데 마침 잘 와 주었다.’
저승사자가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것을 당가의 인물들이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히려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무언의 협박까지 해 댔다.
당곽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모용미는 내심 초조하면서도 관산악을 믿었다.
그라면 이들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줄 거라 확신했다.
제법 넓은 정원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당곽이 몸을 돌려 모용미를 직시했다.
이제 복수를 할 시간이 되었다.
자신들의 안방에서 당한 치욕은 그 무엇보다 수치스러운 것. 당곽은 그렇게 할 자신이 넘쳤고 자신의 무공과 세가의 무사들을 믿었다.
“영웅 대회에서의 일을 잊지 않았겠지?”
“…….”
“내가 잘 곳이 없어 이리로 온 줄 아느냐! 오늘 여기 있는 모두의 팔을 잘라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네 스스로 팔 하나를 자르겠느냐. 아니면 저 불쌍한 놈들의 팔까지 다 잘리는 꼴을 보겠느냐!”
본심을 드러내는 당곽은 여차하면 모용미를 칠 태세였다.
그때 관산악이 나섰다.
“여기서 또 보는군.”
“…….”
당곽이 비로소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모용세가의 아이들은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모양이군. 가주가 여자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이겠지. 얼마나 인재가 없었으면 여자가 가주를 맡는단 말이냐? 그러니 고작 하급 무사 따위가 가주를 앞에 두고 지 멋대로 설치지 않느냐!”
“흐흐흐!”
“큿큿!”
당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크게 웃었다.
모용미와 모용조의 얼굴이 노기로 붉어지고 다른 세가의 무사들 역시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이분은 본 세가의 귀빈이세요! 말씀을 가려서 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모용미가 차갑게 당곽을 쏘아봤다.
귀빈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관산악을 쓸어 본 당곽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그때 관산악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너희 당가에게 무척 궁금한 것이 있는데…….”
“건방진 놈! 네놈의 그 주둥이가 내일부터는 흙을 처먹고 있을 것이다.”
당곽의 뒤에 섰던 중년인이 칼을 뽑아드는 시늉을 했다.
당곽이 어쩐 일로 그자를 말리고선 물었다.
“곧 죽을 놈이니 기꺼이 대답을 해 주지. 뭐냐, 궁금한 게.”
“너희 당가의 독충들은 말이지. 도대체 몇 번을 당해야 정신을 차릴까? 난 그게 무척 궁금하거든? 화산에서 당하고 영웅 대회에서 당했으면 조금은 정신을 차릴 법도 한데 말이지. 도대체 네놈들의 대가리 속은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이봐 늙은이! 그 쭈글쭈글한 꼴통을 반으로 쪼개 보면 궁금증이 풀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