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귀환무사 93화>
상인은 자신에게 득이 되면 자존심 따위는 지나가는 개에게도 줄 수 있어야 한다.
금치문은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냉철한 판단력, 손익 계산 능력과 더불어 부자들이 지녀야 할 필수 사항이었다.
“놈들만 처치한다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고수들을 더 고용해야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게끔 말입니다!”
금치문은 며칠 전, 정문을 난동을 부리고 만년삼왕과 천년하수오를 강탈당한 그 일을 겪은 후, 무력을 보강할 것에 대거 투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천하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가 유일한 약점이라면 무력에 있었다.
지금도 수많은 고수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어지간한 대문파와 맞먹는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그래도 뭔가가 조금은 부족했다.
칼질 한 번에 담벼락을 작살내 버린 청룡언월도를 쓰는 자, 그자 정도의 고수는 있어야 금치문은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눈앞의 두 노괴가 물론 그들보다 강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왠지 꺼림칙한 존재들, 진정 자신에게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그런 수하가 금치문은 절실했다.
그것만 해결되면 황제인들 부러우랴.
내심 각오를 다진 금치문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자신이 임금을 주며 고용하는 자들이지만 언제나 그들이 금치문은 두려웠다.
“그만 편히 쉬십시오.”
금치문은 포권을 취해 보이고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그는 내심 크게 걱정했다.
‘미리 강하다고 하면 딴마음을 먹을까 봐 그자들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았는데, 이러다가 저 인간들도 박살이 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네.’
그랬다.
흑백쌍괴에게 흑야 등에 대해서 상세히 말을 전해 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엉뚱한 일을 벌일까 싶어서였다.
금치문이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뻗을 때였다.
덜컹!
“윽!”
난데없이 문이 열리며 금치문의 코를 강타했다.
금치문이 코피를 쏟으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구냐?”
흑백쌍괴가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자신들의 애병이 쥐여 있었는데 그 움직임이 가히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코피를 쏟으며 자빠진 금치문의 너머에 왕전 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 해골바가지들은 또 뭐냐?”
왕전이 흑백쌍괴를 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저놈들입니다!”
금치문이 바닥을 기어 재빨리 흑백쌍괴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코피가 줄줄 흘렀지만 놀란 금치문은 코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흑괴가 살벌한 눈으로 왕전 등을 노려보았다.
“흐흐! 마침 네놈들 목을 따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제 발로 잘 찾아와 주었구나.”
“지랄도 풍년일세. 이놈은 또 그사이에 어디서 저런 노물들을 데려왔대?”
왕전은 주먹을 꺾으며 성큼 다가섰다.
그때 그의 뒤에 혁련천후와 독고혜 등이 따라 들어섰다.
순간 독고혜를 본 백괴의 두 눈이 탐욕으로 물들어 갔다. 그 옆에 영호수란까지 있으니 백괴의 입은 벌써 침이 고였다.
그런 백괴의 욕정에 물든 눈을 혁련천후가 보았다.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번쩍!
“크악!”
빛이 번득이더니 백괴의 눈에서 피가 솟구쳤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몸부림치는 백괴를 보고 크게 놀란 흑괴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앞에 서 있던 왕전의 주먹이 더 빨랐다.
“어이! 늙은이! 감히 어디다 대고 함부로 칼질이야!”
깡!
흑괴의 검과 왕전의 주먹이 충돌하자 놀랍게도 금속성이 일었다.
왕전이 더 놀랐다.
흑괴의 검이 생각보다 더 묵직한 힘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혁련천후가 왕전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왕전이 물러나자 그가 앞으로 나섰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싸늘한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자 그제야 흑괴는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여인들의 뒤쪽에서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들어선 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나같이 압도적인 기운을 뿌려 대는 존재들, 흑괴는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크악! 개새끼들!”
고통에 몸부림치던 백괴의 육신이 그대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
두 눈이 멀어 버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는 무작정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지랄을 한다.”
북궁천소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퍽!
백괴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즉사였다.
“헉!”
놀란 흑괴가 몸을 날렸다.
방향은 수십 년을 함께했던 백괴를 죽인 북궁천소가 아니라 거처의 뒤쪽 벽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겐 목숨을 살리는 것만이 지상 과제였다.
조윤의 육신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흑괴의 코앞에 나타났다.
흑괴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비켜!”
깡!
비록 도주를 작정한 흑괴였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고수.
검을 막아 낸 조윤의 손목이 찌르르 전류가 흘렀다. 죽기 살기로 펼쳐 낸 흑괴의 순간적인 공세는 대단했다.
그가 잠깐 움찔하는 사이, 흑괴의 육신이 벽에 다다랐다. 그대로 뚫고 도주하려는 모양이었다.
혁련천후의 두 눈이 섬광을 발한 것은 흑괴의 육신이 반쯤 벽을 뚫었을 때였다.
그의 오른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짐과 동시에 흑괴의 육신이 벽에 묻혀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런 그의 등에 다섯 개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어머!”
끔찍한 죽음에 영호수란은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당찬 그녀라도 눈앞에서 끔찍하게 죽어 나가는 장면은 볼만한 것이 못 되었다.
금치문은 믿었던 흑백쌍괴마저 무참히 당해 버리자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경고했었지. 다시 돌아올 때 그땐 너와 이곳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라고.”
북궁천소가 금치문을 발로 툭 건드리며 히죽 웃었다.
금치문은 넋을 놓고 멍하니 있었다.
짝!
금치문의 뺨을 북궁천소가 도의 옆면으로 후려치자 흐려졌던 금치문의 눈동자가 제 빛을 찾았다.
두려움에 모두를 살피던 그가 검후를 발견했다.
자신의 최대 목표였던 그녀가 지금은 저승사자처럼 여겨질 뿐이다.
그녀가 데리고 온 호위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면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금치문은 살아날 방도를 찾았다.
이실직고.
사실대로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살길이라 여기고는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소!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돈이 필요하시면 제 금고를 통째로 가져가도 좋소!”
혁련천후는 금치문의 발치까지 다가가 무심히 물었다.
“네가 사용한 독은 어디서 구했느냐?”
“사천당가에서 구했소!”
“당가에서도 그 독은 다룰 줄 아는 자가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돈 때문에 함부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묻겠다. 당가의 누구에게서 구입했느냐?”
“당가의 예산 절반을 금옥장이 해결해 주고 있었소.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당율! 그분이 사용법과 함께 건네주었소!”
놀라운 이름이 흘러나왔다.
결코 금치문 정도가 입에 담을 자는 아니었다.
약선 이자겸을 통해 대략은 들어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이름이 거론되자 모두는 크게 놀랐다.
반면 혁련천후는 달랐다.
두 눈이 새파란 살기를 머금었다.
자신이 죽여야 할 구인의 고수들, 당율도 거기에 포함된 자였다.
이렇게 되면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그가 독의 사용처를 알고 주었나?”
“대략은 알고 있을 것이오. 그동안 몇 번에 걸쳐 사용했었기에…….”
듣고 있던 왕전이 물었다.
“몇 번씩이나? 용도를 밝혀 봐!”
“그, 그게…….”
금치문이 독고혜를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태도에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왕전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이 자식이 팔 하나를 잘려 봐야 털어놓으려나.”
“아, 아니오! 다 말하겠소!”
금치문이 겁에 질려 술술 불었다.
듣던 영호수란의 아미가 사납게 올라갔다. 자신도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들은 까닭이다.
“개자식이 감히 누구를 넘봐!”
씩씩거리는 그녀를 독고혜가 만류했다.
포쾌들이 범인들을 취조하는 듯 혁련천후의 질문은 이어졌고 금치문은 그저 순순히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놨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장내의 무사들이 들이닥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오는 자, 아무도 없었다.
거처 주변을 무형 강기로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란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몇 가지를 더 묻고 확답을 받은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을 지킬 수 있겠나?”
“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소! 내일부터 당장 모든 문파에 후원을 중단하겠소! 진심이오!”
북궁천소가 씩 웃으며 혁련천후를 쳐다봤다.
“정신적인 위자료 정도는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살려 주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딥니까?”
“흘흘! 두말하면 잔소리지. 주모께서 받으신 고통을 어찌 돈으로 환산하랴! 여길 통째로 받아도 손해를 보는 장사지.”
연이어 돌아가면서 으름장을 놓자 금치문은 사색이 되었다.
혁련천후는 그런 금치문을 향해 경고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다면 너를 살려 주겠다.”
“알겠소. 천지신명께 내 부모님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오!”
“주공. 이런 놈의 말을 믿으십니까?”
“이 큰 건물을 놔두고 도망치지는 못할 테니 그만 돌아간다.”
혁련천후가 돌아서자 모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독고혜가 그런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그녀마저 그렇게 나오자 모두는 어쩔 수 없이 혁련천후의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영호수란이 손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위자료 내놔! 개자식아!”
모두가 황당해 할 때 영호수란은 기어코 정신적인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며 황금 오천 냥짜리 전표를 받고야 말았다.
혁련천후는 걸어가면서 독고혜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