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귀환무사 91화>
자신이 다스리는 신강의 하늘은 그 어느 때처럼 맑고 높았다.
장용백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의 말 한마디에 빙궁과 마교의 대치 상황은 전쟁으로 결말이 나게 된다.
사실 장용백은 내심 크게 한판 붙고 싶었다.
그동안 마교는 지나치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며 살아왔다.
수많은 나날을 통해 축적된 마교의 힘은 자신들도 어느 정도인지 추측 불가였다.
그 힘은 그대로 썩기엔 너무 아까웠다.
상대가 어디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평소에도 있었는데, 빙궁이 쳐들어왔으니 그로서는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뇌어양이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허허!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정도로 내가 늙진 않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장용백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뇌어양의 늘어진 수염이 바람에 살짝 날렸다. 가슴 가득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신 뇌어양의 왜소한 육신이 뒤로 돌아섰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그의 육신이 사라지며 나지막한 탄식만이 그 자리를 울렸다.
“허허! 본좌도 두려워하는 중원이 성제, 그대의 눈에는 그저 쉽게 어찌할 수 있는 호구로 보였는가?”
마도대종사. 뇌어양.
그는 빙궁과의 일전도 불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전쟁을 하지 않겠다면 그때는 흔쾌히 받아들일 용의도 있었다.
문제는 빙궁이 어떻게 나오느냐다.
전쟁을 하겠다면 붙어 주고 돌아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의중이었다.
* * *
뇌음신은 올해 스물아홉의 나이다.
마교의 소교주로서 상당한 경지의 무공을 지닌 그는 비상한 두뇌 또한 마교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있는 그야말로 기재 중의 기재였다.
정도맹과 예정된 비무가 취소되는 바람에 신강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뇌음신은 빙궁의 침공 소식에도 지나치게 느긋한 행보를 보였다.
정도맹을 나선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아직 천산의 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장로의 얼굴이 조금은 불만이 쌓인 표정이다.
“소교주! 걸음을 빨리하시는 것이…….”
“하하! 구장로! 중원의 이 아름다운 경치를 언제 다시 보겠소. 유람길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즐기며 돌아갑시다.”
천하태평인 뇌음신의 태도에 구지겸은 미간을 찌푸렸다.
뇌음신의 저런 성정 때문에 교주는 한때 관산악을 후계자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천하만마를 이끌어 갈 성정으로는 뇌음신의 그 같은 태평함은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뇌음신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성격을 바꾸지 않았다. 측근들이 뇌어양의 속내를 전해도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와 함께 이동하고 있던 검마전의 소전주 장곽이 묻고 나섰다.
“빙궁 놈들이 코앞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소교주께서는 어찌 이리도 태평이십니까?”
“우리가 없어도 교는 잘 돌아간다. 빙궁이 제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교를 어쩌진 못해. 그러니 더 이상 칭얼대지 마라.”
“그래도…….”
뇌음신이 장곽을 돌아보며 짐짓 성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이 보아하니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구장로와 네가 먼저 교로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제가 어찌 소교주를 두고 먼저 갑니까? 알겠습니다. 더 이상 칭얼대지 않겠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하하! 진즉에 그럴 일이지.”
뇌음신이 하늘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켜보며 걷던 구지겸의 노안이 심하게 실룩거렸다. 잠시 뇌음신의 뒷모습을 못마땅한 기색으로 쳐다보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멋지구나. 우리가 살던 천산에 비하면 이곳 중원은 극락이나 다름없군. 그렇지 않느냐?”
“그래서 선조부터 중원을 도모하려고 노력을 해 왔지 않습니까.”
뇌음신은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세상이 온통 녹색 천지였다.
강변을 두르고 있는 숲이 물빛을 닮아 온통 녹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곳을 쳐다보던 뇌음신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사람이 아닌가?”
구지겸과 장곽의 시선 역시 뇌음신의 시선을 좇아 돌아갔다.
제법 빠른 속도로 흐르는 낙수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 사람이 걸려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뇌음신이 장곽을 돌아봤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네가 가서 살펴보거라.”
“그냥 칼질당하고 죽은 놈이겠지요. 확인은 무슨…….”
장곽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재빨리 강으로 몸을 날렸다. 뇌음신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도약으로 바위까지 날아간 장곽의 고함을 질렀다.
“죽은 자입니다!”
“시신을 가지고 와 봐!”
“시신을 말입니까?”
“냉큼 가져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것이야.”
인상을 찌푸렸던 장곽이 인영을 한 손에 쥐고서는 순식간에 돌아왔다.
장곽이 가져온 시신은 덩치가 컸는데 가슴과 허리 쪽에 제법 심한 자상을 입고 있었다.
“지독한 수법에 당했군.”
뇌음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살이 너덜너덜하게 뜯겨진 시신의 상처는 뼈가 보이고 내장이 삐죽 나와 있었다.
상처를 살피던 장로 구지겸의 두 눈이 돌연 섬광을 발했다.
“이것은……!”
“혹시 아는 자의 수법이오?”
뇌음신이 물었다. 구지겸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십지신검, 놈의 수법이오!”
“십지신검? 천하오객의 하나라는 그 말이오?”
“틀림없소이다! 지난날 철장로의 몸에 난 흔적과 동일한 수법이오.”
구지겸의 목소리는 제법 심하게 떨렸다.
자신과 가장 절친했던 친우이자 같은 장로의 서열에 올랐었던 철관필을 죽인 자가 십지신검이었다.
비록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막상 그 흔적을 보게 되니 잊었던 복수심이 들끓어 올랐다.
“흠! 옛날 교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십지신검의 흔적이라……. 이거 그냥 갈 수는 없겠군. 보았으니 당연히 그자를 쫓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않겠소?”
“그건 아니 될 말이오. 십지문과 시비를 일으킬 순 없소이다.”
“허어! 조금 전까지 부들부들 몸을 떨던 분이 왜 말리십니까?”
뇌음신이 짐짓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구지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해야 합니다. 십지문은 정도맹의 주축 세력들 중 하나이니 그들과 시비를 일으키면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소이다. 게다가 여기는 중원의 한복판이며 우리는 고작 셋이니 더더욱 조심을 하셔야지요.”
“그럼 그냥 갑니까?”
“당연히 그냥 돌아가야지요. 당장은 빙궁의 문제가 우선입니다.”
“알았소. 그냥 돌아갑시다.”
뇌음신이 이내 포기하는 기색을 비치자 구지겸은 내심 안도했다.
그가 당장 십지문으로 달려간다고 했다면 자신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마교에서 뇌음신을 제어할 자, 오직 교주밖에 없었다.
“크윽!”
뇌음신과 그 일행이 사라지자 바닥이 꿈틀거리며 사람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독고무였다.
전신이 흙으로 범벅이 되어 버린 그는 뇌음신등이 사라져 간 곳을 응시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마교의 소교주가 저 정도로 강했단 말인가?”
비록 손을 섞어 보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상당한 고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피부의 호흡까지 완벽하게 차단하고 숨어야 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뇌음신 일행이 사라져 간 방향을 한동안 쳐다보던 독고무가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음!”
부상을 입었을까?
손가락 사이를 흐르는 선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독고무가 정체도 모르는 놈들에게 이 지경을 당하다니…….”
그는 지금껏 정도맹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독고혜를 쫓던 자들과 싸움을 벌였던 것이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백어산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이유는 있었다.
그때 그는 중상을 당했다.
비록 자신을 막아섰던 자들 모두는 죽일 수 있었지만 자신 또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크게 부상을 입은 그는 백어산의 은밀한 곳을 찾아 부상을 치료하고 흐트러졌던 기혈을 다스리는 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좀처럼 검에 당한 부상이 낫질 않았다.
그의 강대한 내공이라면 벌써 살이 붙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인근 고을로 들어가 의원의 치료를 받고는 다시 독고혜를 찾아 나서는 와중에 이번에는 녹림도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자신을 몰라보고 검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녹림도들을 처치하느라 부상 부위가 다시 도졌다.
그 와중에 뇌음신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는 은신술을 펼쳐 땅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독고무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정도맹이 있는 북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며 질주하던 독고무는 전방에 어른거리는 자들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숲이 흔들리며 죽립을 쓴 다섯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무는 호흡을 죽인 채 죽립인들을 주시했다. 그때 한 죽립인이 정확하게 그가 숨은 곳을 돌아보았다.
‘완벽하게 호흡을 감추었는데 발각되었단 말인가?’
독고무는 여차하면 공격을 할 요량으로 검파에 손을 가져갔다.
식은땀 한 방울이 턱을 타고 흐르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독고무에겐 그 소리가 천둥벼락처럼 크게 들렸다.
죽립인 하나가 말했다.
“대주님! 저 산을 넘으면 정도맹의 구역이고 거기서 조금을 더 가면 놈들이 기거하는 장원이 나옵니다.”
그러자 독고무가 숨은 곳을 쳐다보던 죽립인이 고개를 돌렸다.
“확실한 것이냐?”
“개방의 거지 놈에게 알아낸 정보이니 확실할 것입니다.”
대주라 불린 대주라 불린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립인들은 바로 유소를 죽인 조윤을 찾아 중원으로 나선 동영의 고수들이었다.
대주라 불린 자가 다시 독고무가 숨은 곳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작은 너구리 한 마리가 수풀을 헤집으며 튀어나왔다.
순간 번쩍하는 빛이 허공에서 작렬했다.
“컹!”
피를 뿌리며 두 조각이 나 버린 너구리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경공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스스슥!
다섯의 육신이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독고무는 숲에서 나왔다.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긴장보다는 통증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한 독고무는 이내 숲 속으로 재빨리 스며들어 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