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90화 (88/425)

# 90

<귀환무사 90화>

그의 머릿속에는 중원의 각처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저장이 되어 있다.

혁련천후도 그 점을 알고서 그에게 물어봤던 것이다.

“사천이면 너의 세가가 있는 곳이지?”

“예.”

왕전이 묻자 모용단승은 즉각 대답했다.

원래 모용세가는 요녕성에 터를 잡고 살았었다. 하지만 워낙에 북쪽인 데다 주변 정세가 너무 사나워 수십 년 전부터 따뜻한 사천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모용단승에게 혁련천후가 물었다.

“그곳의 지리는 잘 알고 있겠군.”

“제 안방처럼 훤히 알고 있습니다.”

혁련천후가 모두를 돌아봤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전에 장원의 모든 공사를 끝내야 할 것이야. 재원도 어느 정도는 마련해야겠고…….”

역시 돈이 문제였다.

장원의 공사도 대부분 뒤쪽 산의 나무를 공짜로 베어다가 자재로 쓰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모든 건물의 바닥을 장식할 대리석을 구해야 했고 그것을 구하려면 대리국과 교류를 하는 상단과 거래를 터야 했다.

혁련천후가 흑야를 돌아봤다.

“금전적인 문제는 네가 힘을 써야겠다. 무옥은 흑야를 돕는다. 그리고 담대소천, 너는 군부의 정보망을 이용해 놈들의 이동 동선을 파악해 봐. 그 정도의 세력이 움직이면 군부에서도 이미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북해빙궁 말입니까?”

“두 곳 다면 더 좋겠지.”

“알겠습니다.”

둘이 허리를 숙였다.

혁력천후가 이번에는 진천과 사공진무를 돌아보았다.

“진천은 보다 신속하고 정확한 연락 체계를 구축하는 데 신경을 써 줘야겠다. 너의 환술이면 전서구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를 보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진무는 장원 주변에 아무도 넘어올 수 없는 철벽의 방어진을 설치하도록 하고.”

“염려 놓으십시오!”

“쥐 새끼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게끔 만들어 놓겠습니다!”

왕전이 멀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공! 저희들은 뭘 합니까?”

“너희들 셋은 나와 함께 금옥장에 간다.”

“흘흘! 그 쥐새끼를 직접 작살내실 생각이십니까?”

“물어볼 것이 있다. 구할 것도 있고……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일어나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영호수란이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내공을 배제하고 술을 마신 탓에 그녀의 얼굴은 제법 붉어져 있었다. 애증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과 혁련천후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어디서 자요?”

안주도 마다하고 술만 마셔 댔으니 혀가 제법 꼬여 있었다.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지낼 만한 곳은 오직 한 곳, 독고혜가 머무는 이 층뿐이었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던 그는 영호수란을 보며 가볍게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장정들이 들끓는 거처에 그녀를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 층에서 지내도록.”

“검후님과 함께 말인가요?”

“싫나?”

“아뇨! 싫은 사람은 따로 있겠죠. 저 올라갑니다.”

가볍게 혁련천후를 노려본 영호수란이 비틀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혁련천후는 영호수란의 눈초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왕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흘흘! 골치 아프게 생겼습니다, 주공!”

“뭐가?”

“옛? 아, 아닙니다. 흐흐!”

나백은 육승과 마주하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남북의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은 찻잔의 김이 사라질 때까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탁!

식어 버린 찻잔을 기울인 나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 당장 전면전을 벌일 것처럼 움직이더니 꼼짝을 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노린단 말인가?”

“빙궁은 마교 때문에 중원으로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만 용성의 경우는 다른 세력들과의 연계를 모색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곳을 감시중인 아이들이 보내온 전서에 따르면 서장과 대막 쪽으로 놈들이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놈들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세력이라면 뇌음사와 포달랍궁, 아니면 대막의 혈궁 정도겠지. 빙궁도 어쩌면 그들과 연계를 노릴 수도 있겠군. 허어! 골치 아프게 생겼어.”

육승이 눈빛을 내며 말했다.

“세 곳이 가장 유력한 곳이기는 합니다만 사련 역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합니다. 호시탐탐 준동할 기회만을 노렸던 그들임을 감안하면 용성에서 입맛에 당기는 조건을 제시하면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갈무극은 충분히 그러고 남을 위인입니다.”

나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상당한 위기에 몰릴 수도 있었다.

사련은 강하다.

축적된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 정도맹과 마교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다고 알려졌을 뿐이었다.

“마교에 칙사를 보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그들도 빙궁이라는 강력한 적과 맞서려면 우리의 뜻에 협조를 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나백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교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수백 년을 적대적인 관계로 지내온 그들에게 당장 손을 내미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었다.

자존심.

바로 그것이었다.

나백의 속내를 짐작한 육승이 말했다.

“천하의 안녕이 우선입니다. 잠깐의 굴욕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어쩌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 빙궁이 원하는 것을 내주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수백 년간 중원의 서북부를 원했던 그들이니 여차하면 내주어야지요.”

“허! 이 사람아! 침략자들과 타협을 하자는 말인가?”

“정도맹의 목적은 중원 수호에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반드시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 내야 합니다.”

육승의 어조는 매우 단호했다.

그것은 그만큼 작금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뜻했다.

누구보다 작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육승이다.

그에게 거의 모든 정보를 보고받고 그것에 따라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나백인지라 그의 말이라면 거의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육승의 말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백의 미간에 나타난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중원수호라…… 그 뜻은 원대하다만 그동안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부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도 귀찮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일세. 그나저나 꽤나 골치 아프게 되었군. 빙궁이야 여차하면 그렇게 한다지만 용성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니 혹여 전면전이라도 벌어지면 그들에게라도 도움을 청해 보세나. 비록 숫자는 미미하지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일세.”

“혹시 신마성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보았네.”

육승이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라면 비록 소수이더라도 천하의 그 어떤 문파보다 강력한 우군이 되어 줄 것이다.

나백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네. 정사지간을 떠돌며 낭인처럼 활동하던 그들이 한 곳에 몸을 담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왕과 창왕이 무당과 싸우는 자리에 화산의 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그들까지 가세했다면 무림의 질서는 재편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놀랍군, 놀라워. 어찌 그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폭풍의 핵이란 것을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나백이 침중한 기색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신경이 쓰이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아무튼 화산의 인물들과 사전에 어느 정도의 교감은 나누는 것이 좋겠군. 당장 신마성과 연락할 수 있는 통로는 그들뿐이니 자네가 신경을 좀 써야겠어. 만약 개파라도 한다면 꽤나 신경 써서 사절단을 보내야 할 걸세. 마교나 사련에 뒤처지면 곤란하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육승이 물러가자 나백은 지친육신을 이끌고 자신의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정도맹주라는 자리는 그의 심신을 하루가 다르게 지쳐 가게 만들고 있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천산.

거대한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이십 장 높이의 그 첨탑은 마교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 위에 두 인물이 서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노인을 연상시키는 뇌어양의 눈빛이 드넓게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며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옆을 함께하는 장대한 체격의 노인 역시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한 마리 맹호를 연상시키는 그는 마교 내 무력 서열 삼 위에 올라 있는 장용백이란 위인으로 검마전의 전주라는 신분을 지녔다.

장용백의 호목이 섬광을 발했다.

“놈들이 저곳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러게 말일세. 그냥 놀러온 것은 아닐 텐데 말이지.”

뇌어양은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도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놈들이 아직 사자(使者)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분명 본 교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냥 두고 보실 작정이십니까?”

“허허허. 그 불같은 성질은 여전하구나. 잠시 더 기다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보일 테니 조바심을 버리거라.”

장용백의 용맹스러운 분위기에 뇌어양은 그저 담담한 미소로 답했다.

천하를 담은 듯 고요하기만한 뇌어양의 눈동자에 수백의 천막이 맺혀 있었다.

평원의 끝자락을 흰색으로 물들인 그것은 북해빙궁의 군진(軍陣)이었다.

여름에 다가드는 계절 탓에 천년빙설이 녹아 흐르는 작은 강줄기의 옆에 위치한 빙궁의 군진은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그 기세가 이곳까지 전해졌다.

“그저 남은 생, 즐기며 살다 가면 좋을 것을 어쩌자고 그 나이에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뇌어양은 빙마 요성제를 떠올렸다.

천하에 몇 되지 않는 적수들 중 하나인 그는 젊은 날, 한 번 부딪힌 적이 있었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이었지만 요성제의 패도적인 기운은 지금껏 그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인상은 강렬하게 뇌어양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날 벌어졌던 대결의 결과는 물론 둘만이 알 뿐이다.

“용백!”

“예! 교주!”

“사람을 보내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이곳이 본좌의 영역임은 주지시켜 주는 것이 좋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당장 아이들을 보내 교주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헌데 놈들이 만약 도발을 해 오면 그땐…….”

뇌어양이 뒷짐을 지고서 하늘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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