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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사-88화 (8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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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사 88화>

이미 지독한 투기로 번득이는 철무옥의 두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철무옥의 눈동자가 흑야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들이 보였다.

‘괴물 천지군.’

입술을 지그시 깨문 철무옥은 이내 시선을 흑야에게 돌렸다.

지금 철무옥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눈앞의 흑야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다음이다.

스르릉!

흑야가 시선을 내리깔며 검을 뽑았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그중엔 너보다 강한 자들도 있었고 훨씬 못한 자들도 있었지. 그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하나같이 죽어 갈 때 두려움에 몸을 떨더군. 네가 하늘처럼 떠받들었을 사련의 장로도 다르지 않았지. 후후후.”

내리 깔았던 흑야의 시선이 철무옥을 똑바로 향했다.

끊어졌던 말이 이어졌다.

“적어도 너는 그렇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

흑야가 몸을 돌려 연무장으로 향했다.

철무옥은 그런 흑야를 묵묵히 쫓았다.

연무장의 중앙에서 몸을 세운 흑야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내 이름을 물었나? 이름 따위는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 다만 남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은 있지. 한 번은 들어 봤을 것이야. 흑야라고…….”

순간 철무옥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상상 이상의 거물이다.

이 정도면 어쩌면 관산악보다 더한 가치가 있는 존재,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강렬한 투지가 열망으로 그 열망은 서서히 희열로 바뀌어갔다.

좋은 상대를 만났다는 것에서 비롯된 희열이었다.

스르릉!

철무옥의 대도가 아침 햇빛에 반사되며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다.

“선공을 양보하지.”

흑야의 말에 철무옥은 한마디 말조차 없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둘의 싸움은 해가지고 달이 뜨는 시각까지 이어졌다.

철무옥의 파괴적이고 폭발적인 도법은 흑야의 육신을 넘어서지 못했고 하늘도 죽인다는 흑야의 예술적인 살인미학은 철무옥의 대도를 가르지 못했다.

철무옥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흑야는 손에서 검을 놓아버렸다.

격돌은 그렇게 끝이 났다.

철무옥은 절망했다.

흑야와 이틀을 싸워 무승부로 끝난 것에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자들이라면 천하의 살왕 흑야와 이틀을 싸운 것 자체만으로 대단하다 여길 수 있었겠지만 철무옥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추살전을 이끈 자신은 사련최강의 전귀라 불렸다.

지금껏 자신이 싸워 패한 자는 오직 암흑대제 갈무극뿐이었다.

그것도 몇 년 전의 일, 만약 지금 다시 싸운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 자신이 정공(正攻)으로 살수를 제압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흑야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암습을 주공으로 삼는 살수였다.

살수가 정공에 약하다는 것은 검을 갓 잡은 삼류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 그 점이 철무옥을 절망케 한 것이다.

“훅!”

거친 숨을 몰아 쉰 철무옥이 흑야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흑야 역시 제법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인정하지. 그 정도면 산악과 싸워 볼 자격이 있음을…….”

“쉬었다 다시 싸우자!”

“그럼 넌 죽어.”

“닥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철무옥이 이내 불같은 투기를 뿜어 냈다.

흑야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하는 짓이 관산악과 영판을 닮아 있었다.

투기를 떠올렸던 철무옥이 흑야의 뒤쪽을 쳐다봤다.

“싸움에서 패배한 놈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닥쳐! 지긴 누가 졌다고 그래! 이자와 다시 싸우겠다. 그다음 나를 죽이든지 말든지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그러니 다들 물러서라!”

“허! 새끼! 생긴 모양새나 하는 짓이 영락없는 산악! 그놈일세. 어떡하지? 그냥 죽이기엔 아까운 놈인데…….”

북궁천소가 양 옆을 번갈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윤이 철무옥을 보며 입을 열었다.

“흑야의 방식대로 했다면 너는 벌써 싸늘하게 식어 있겠지? 그 정도는 알 수준으로 보이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철무옥은 대답을 못하고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윤의 말처럼 흑야가 자신을 노리고 살행을 했다면 자신은 칼질 한 번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철무옥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다시 흑야를 향했다.

흑야는 어느새 예의 싸늘함으로 돌아가 있었다.

거친 호흡도 이미 고르게 돌아와 있었는데 그것이 철무옥을 다시 한 번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호흡을 살폈다.

역시 아직까지 거칠었다.

‘나의 패배다.’

비긴 것이 아니었다.

분명한 자신의 패배였다.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내공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철벽과도 같은 것이다.

챙그렁!

철무옥이 대도를 바닥으로 던졌다.

“죽여라!”

북궁천소의 두 눈이 살짝 반짝거렸다.

철무옥의 얼굴에 고정된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묘한 빛이 번득였다.

조윤의 담담한 음성이 철무옥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패배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사내의 덕목이다. 자신보다 강자에게 패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랬다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이미 죽었겠지. 철무옥이라고 했나? 여기 있는 우리가 누군 줄 아는가?”

철무옥이 두 눈을 떴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존재들의 정체를 묻고 있었다. 지금껏 말없이 가만있던 왕전이 험악하게 웃었다.

“왕전이다. 아! 단리극이라고 해야 알아듣겠군.”

‘전왕!’

철무옥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북궁천소가 자신의 어깨에 걸린 대도를 툭툭 치며 씩 웃었다.

“내 보물이지. 세상은 굉혈도라 부르더군. 너무 험악한 이름이라 생각하지만 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야.”

철무옥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확연하게 떠올랐다. 전왕에 이어 도왕이라니……. 그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조윤을 향해 돌아갔다.

말하지 않아도 조윤의 어깨에 걸린 창과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를 보고는 나지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오왕!”

“우리도 한 번은 패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지 않느냐.”

철무옥은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천하의 오왕이 한자리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 모두를 꺾은 자가 세상 어디엔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의 내심을 짐작한 조윤이 고개로 장원의 이 층을 가리켰다.

“너도 보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패배를 안겨 주신 그분을 말이다.”

철무옥은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자신의 육신을 식은땀에 젖게 만든 혁련천후라는 것을.

조윤이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친구가 되어 줄 수도 있지. 우리도 너처럼 강하고 무식한 놈을 무척이나 좋아하거든…….”

“뭔 소리야? 주공께서 받아 주셔야 한다는 걸 모르냐!”

이틀이 지나갔다.

장원의 연무장에 철무옥이 있었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은 철무옥은 그 자세로 세 번의 낮과 네 번의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해가 떠오르던 그날 아침, 마침내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철무옥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오연하게 내려다보며 서 있는 혁련천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고?”

“그렇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철무옥의 사전에 후회란 결코 없소. 받아만 준다면 죽음으로써 충성하겠소.”

혁련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번 배신은 두 번의 배신을 불러오는 법! 사련을 향했던 그대의 충성이 결코 작지 않았다고 들었지. 나는 배신을 용납할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철무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흘러내린 피가 흘러 가슴을 적셨다.

“충성이 아니라 빚을 갚았을 뿐이오.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한 빚 말이오. 고작 과거 따위에 연연한다면 미련 없이 일어서겠소.”

철무옥이 벌떡 일어섰다.

“왜 죽기라도 하려는 거냐?”

“자존심까지 버렸는데 더 살 이유가 있겠소.”

철무옥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혁련천후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 속에는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철무옥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마주 보던 혁련천후가 몸을 돌렸다.

“말투부터 바꿔. 공손하게.”

“……!”

철무옥은 이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 * *

일곱 밤낮이 지나도록 혁련천후는 이 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동안 장원의 공사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그럴 듯했다.

비록 대부분이 통나무로 엮어 만든 것이라지만 규모와 전각의 숫자에 있어서는 어지간한 대문파와 맞먹을 정도는 되었다.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목수들은 땀을 훔치며 그늘을 찾았다.

그들의 이름은 전삼과 왕삼, 일전에 관도에서 혁련천후와 관산악의 돈을 빼앗으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장원에서 머물고 있는 그들은 누구보다 공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휴! 자네 이 일이 믿기는가? 사람의 힘으로 이토록 빠른 시간에 저만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일세.”

“허허! 내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네. 우리 같은 사람 수백이 있어도 될까 말까 하는 대공사가 아니었는가.”

“다 저분들의 엄청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왕삼이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장정의 몸통 굵기만 한 통나무를 가볍게 잘라 나르는 능력에 수십 번을 더 놀라야 했다.

그 거대한 통나무를 가볍게 들어 땅에 박으니 그대로 기둥이 되고 칼질 한 번에 지붕을 덮는 널판이 되었다.

설계는 뒤늦게 합류를 한 사공진무가 오면서 그가 맡았는데, 그 덕분에 공사의 진척이 두 배는 더 빨라질 수 있었다.

“소문에 듣던 무림인들은 하늘을 나르고 집채만 한 바위도 부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네.”

“소문보다 몇 배는 더했지. 허!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무공이란 걸 배워 둘 걸 그랬어.”

“허! 이 친구야, 그게 아무나 배워진다고 생각하나?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평생을 수련해도 길가에 돌멩이 하나도 어쩌지 못할걸?”

“쩝! 그렇겠지?”

“당연하지! 그러니 우리는 그저 부지런히 일이나 하면 된다네. 아무튼 그분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뿐이네. 내 평생 이렇게 일을 하면서 즐겁기는 처음일세.”

“허허! 부처님이 우리를 도우셨지. 그런 분을 만나게 해 주다니 말이야.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이제부턴 열심히 공양하며 살 생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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