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귀환무사 86화>
흑야의 싸늘한 시선이 금치문을 향했다.
“오늘은 바빠서 이 정도만 해두고 돌아간다. 다음에 다시 올 때에는 더 많은 것을 대답해야 할 것이다. 만약 수작을 꾸민다거나 도망을 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 나 흑야의 추격을 따돌릴 자신이 있다면 말이지.”
“끄어어…….”
금치문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흑야라니.
그 무서운 살인의 제왕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금치문이 머리를 상하로 맹렬히 움직였다.
모두는 돌아섰다.
왕전이 두 노인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두 노인의 어깨가 가볍게 움찔거렸다.
“무사들의 혼은 절대 돈에 팔리지 않는 법이야.”
퍽!
“크윽!”
우측의 인물이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가 벽을 뚫고 사라졌다.
“엿 같은 주인을 모신 죗값이라고 생각해.”
휘휘힉!
금치문은 바람소리를 내며 사라져 가는 넷을 지켜보면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가 이내 거품을 물고 자빠졌다.
* * *
정도맹 남지부의 하늘이 짙은 연기로 가득했다.
곳곳에 폭발로 인해 파괴된 흔적들과 주변을 가득 메운 시신들, 그리고 주변을 몰아치는 피비린내는 이곳에서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지금껏 적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남지부의 성곽 위에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남지부의 고수들이 아닌 용성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휘날리는 거대한 깃발 역시 용성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적색 장포에 양쪽으로 땋아서 길게 늘어뜨린 머릿결이 인상적인 초로의 인물이 뒷짐을 하고서 오만한 표정으로 남지부의 곳곳을 살펴봤다.
“성주께서 오시기 전까지 완벽하게 정비를 마쳐야 한다. 성주께서는 이곳을 중원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겠다고 하셨다.”
“무사들이 기거할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지금은 인원이 부족하니 건물은 본대가 합류하면 그때 새롭게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막은?”
“대략 삼백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분량이나 본대의 무사들까지 수용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적포인의 미간을 찡그리자 수하로 보이는 자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인근의 문파 몇 곳을 접수하시어 그곳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다. 단 민간인들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자칫 군부(軍部)의 신경을 거슬리기라도 하면 그날로 우리는 십만대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렇잖아도 모두에게 주의시켜 두었습니다.”
적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성곽 아래에 도열한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본성의 목표는 최대한 짧은 시간에 중원의 남부 무림을 접수하여 중원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것이다! 성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곳을 철옹성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하니 동원 가능한 모든 인력을 총동원하여 공사에 들어간다!”
“예!”
주변이 떠나가라 대답하는 수하들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은 적포인은 성곽을 내려갔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의 눈이 한곳에 이르더니 섬광을 발했다.
“제법 쓸 만한 놈이었다만 나 육지신마(六指神魔)에게 걸린 네놈의 불운을 탓하여라.”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엔 수십 구의 시신들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지부장 유진걸의 시신도 있었다.
목과 가슴이 반쯤 잘린 채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육지신마는 남지부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그를 따르던 한 인물이 주변을 둘러보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것으로 나의 출세도 보장된 셈이군.”
왕규라는 이름을 지닌 그는 광동이 고향이며 출세를 위해 세외의 세력에 몸을 의탁한 지 오 년 만에 핏빛 전운을 몰고 중원으로 돌아온 자였다.
* * *
한가한 관도 위를 천천히 이동하는 마차가 있었다.
마부석에는 조윤이, 그 옆에는 혁련천후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조윤은 힐끔 옆을 돌아봤다.
‘그나저나 주공의 눈물을 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겠지?’
그는 해후의 순간에 흘렸던 혁련천후의 눈물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죽이는군.”
오늘따라 더 높고 푸르니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빛이라곤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십만대산의 칙칙한 밀림에서 오 년을 보낸 그는 언제나 중원의 하늘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혁련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도를 줄여.”
“예.”
조윤은 고삐를 살짝 당겨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검후 때문에 최대한 천천히 이동해야 했다.
조윤은 다시 혁련천후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반쯤 뜬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금옥장을 털어서 해독약을 만들고 있을 겁니다.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랬다.
청수곡으로 오기 전에 혁련천후는 금옥장으로 가서 만년삼왕과 하수오를 구해 놓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사공진무를 통해 금옥장주 금치문이 검후의 중독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지금쯤이면 만년삼왕과 천년하수오를 구했을 터, 사공진무가 약재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생명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독고혜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진무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조윤의 위로에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써는 사공진무의 능력을 믿어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이동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흘렀을 때, 혁련천후가 말을 꺼냈다.
“정보망이 너무 취약하다.”
“……예?”
“제대로 된 문파를 만들려면 일단 정보망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개방이 구파와 동등한 대접을 받는 이유도 광대한 정보망 때문이지 않느냐.”
조윤도 그 점은 알고 있다.
그가 의아해하는 이유는 왜 이 시점에서 그런 말을 꺼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혁련천후가 말을 이었다.
“개방이 아니었더라면 그녀가 중독이 된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
조윤은 비로소 혁련천후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망을 구축하려면 당장은 문도의 머릿수가 많아야지 않겠습니까? 개방만 하더라도 그 숫자가 무려 십만에 육박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숫자다.
천하에 널린 거지는 거의 대부분이 개방에 속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어지간한 금력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규모다.
“진천의 환술을 활용하면 적은 숫자로도 충분히 가능할 거다.”
“놈의 환술을 다른 이들에게 전수하실 생각이십니까?”
“돌아가면 머리를 맞대고 이것저것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여라.”
“예, 주공.”
혁련천후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린 마차는 장원과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이르러 멈추어 서야 했다.
길을 막아서는 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노인과 잘생긴 미청년, 그리고 적색 무복을 걸친 여럿이 마차가 질주하던 관도의 중앙을 걸어오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는 자들입니다.]
조윤의 전음에 혁련천후는 안력을 돋우었다.
청년 한 명과 깡마른 노인, 그리고 그 뒤에 적포를 걸친 여섯 명이 차례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혁련천후는 청년의 옆에 서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확실히 예사롭지가 않았다.
“출발해.”
“예.”
마차의 바퀴가 서서히 구르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마차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관도의 한가운데를 여전히 걸었다.
마차와 그들 간의 거리가 오 장 정도로 가까워졌다.
혁련천후와 노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노인의 어깨가 가볍게 움직였으나 혁련천후는 고요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했다.
노인과 청년의 뒤쪽에 섰던 자들 몇이 신형을 휘청거렸다.
창백하게 변한 그들은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보이지 않는 무형강기가 그들의 내부를 흔들어 버린 까닭이었다.
노인의 뺨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혁련천후는 그런 노인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길을 좀 비켜 줘야겠소.”
혁련천후를 노려보던 노인이 눈짓을 보내자 모두가 좌우로 갈라섰다.
조윤은 그 한가운데로 마차를 몰았다.
노인과 청년은 서서히 멀어져 가는 마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우웩!”
청년이 돌연 피를 게워 냈다.
챙그렁!
노인의 손에서 미끄러진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흥건히 젖어 있는 손바닥을 응시하던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중원에 저 정도의 고수가 있었다니…….”
청년은 기어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 보는 자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웩!”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피를 게워 내는 청년. 노인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자였소.”
“…….”
“검후를 쫓다가 우연히 옆을 지나쳤던 그자들.”
“그렇군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바로 그자!”
청년도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들의 오감을 극도로 자극시켰던 혁련천후. 확실히 그가 맞았다.
노인이 다시 중얼거렸다.
“마차를 몰던 놈도 왠지 분위기가 익었소. 소성주는 느끼지 못했소?”
“저는 별로…….”
“아니오. 확실히 눈에 익은 놈이었소.”
노인은 까만 점이 되어 버린 마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랬다.
이들은 지난날, 조윤을 쫓아 중원으로 나왔다가 검후의 미색을 탐을 내어 그녀를 쫓다가 사공진무에 의해 놓쳐버린 바로 그들이었다.
용성의 소정주와 그의 사부가 진정한 정체였는데, 조윤을 눈앞에서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조윤이 용성에서 머물고 있을 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윤도 그들을 몰라봤다.
그들 역시 중원으로 나오면서 얼굴을 전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꾼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 둘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노인의 입에서 다시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 싸움만으로 나를 굴복시키는 존재가 있었다니, 어쩌면 중원 정벌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소.”
목소리는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