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귀환무사 83화>
“일단 각 문파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맹에 입성했던 문파들 중, 무당과 화산을 제외하고는 전부 남아 있어 보다 빠르게 병력을 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당에게도 전서를 보내게! 이런 위기 정국에서 그들만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동안 누렸던 혜택이 있었으니 당연히 힘을 보태 줘야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전서를 통해 소식을 전했습니다.”
“잘했네.”
나백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분들을 뵈어야겠네.”
육승도 따라 일어섰다.
둘은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을 한 곳은 사천왕의 거처였다.
* * *
청수곡.
약선 이자겸은 약탕기의 불을 조절하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그에게 하루 종일 구부리고 앉아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일은 대단한 중노동이었다.
불길의 세기에 따라서 약재의 효능이 좌우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관절이 굳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약을 달여야 했다.
“훅!”
불길이 잦아들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은 이자겸의 얼굴로 숯가루가 가득 묻어났다.
주름이 가득한 그의 노안에 그늘이 진다.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검후의 처지를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독고무와의 인연 때문이라도 그녀를 낫게 해 주고 싶지만 현실은 무척이나 암울했다.
“그 청년은 대체 그 몸을 하고서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허어…….”
사공진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제자 연지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도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래저래 근심이 컸던 이자겸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약탕기의 뚜껑을 열었다.
시커멓게 달여진 탕약에서 수증기가 흘러나와 실내는 이내 약 냄새로 진동을 했다.
“제발 이 약이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검후의 내상을 치료할 목적으로 만든 탕제는 제법 진귀한 약재들이 많이 들어간, 말 그대로 보약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독고혜를 치료할 순 없다. 다만 시력이 더 악화되는 것만은 막아 주기를 바랐다.
덜컹!
모옥의 문이 열렸다.
돌아보니 독고혜가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 이자겸은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다.
“저 때문에 노야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허어! 찬 바람을 쐬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곧 약을 가지고 들어갈 것이니 어서 문을 닫도록 하여라.”
“괜찮아요. 이까짓 찬 바람쯤은…….”
“아니 된대도 그러네!”
이자겸은 재빨리 약탕기의 약을 사발에 부어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쓰더라도 단숨에 마셔야 한다.”
독고혜는 이자겸이 쥐여 준 그릇을 들어 단숨에 다 마셨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썼지만 내색조차 않고 물었다.
“사공 공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군요. 혹시 어디 가셨나요?”
“급한 일이 있다면 곡을 내려갔으니 며칠이 있어야 돌아올 게다.”
이자겸은 차마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은 못하고 그렇게 둘러대고는 일어섰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 곧 아침을 준비하마.”
모옥을 나온 이자겸은 재빨리 건너편 모옥으로 건너갔다.
아침을 준비해야 했고 식사 후에 복용할 알약의 제조 역시 서둘러야 했다.
이자겸이 나가자 독고혜는 힘겹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
독고혜는 복부를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혹시나 싶어서 내공을 운용해 보았는데, 참을 수 없는 극심한 통증만 느꼈다.
그녀는 다시 내공을 운용했다.
지독한 통증에 전신이 금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포기하고 말았다.
“하아!”
두 팔로 모옥의 바닥을 짚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투두둑!
얼굴을 적신 땀이 방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두 팔로 몸을 끌어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후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돌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내공도 잃고 시력도 잃었다.
강호의 여인으로서 생명을 잃은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목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한 번이라도 보고 죽어야겠다는 강렬한 의지 때문이었다.
지금 현재 그녀의 목숨을 지탱해 주는 것은 오직 그 이유만이 전부였다.
“천후…….”
또르륵!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방바닥을 적셨다.
상념을 떨쳐 내기 위해 혁련천후는 심호흡을 했다.
독고혜의 영상이 하루 종일 그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를 괴롭혔지만 수하들과 화산파의 제자들 앞에서는 내색조차 못했다.
어쩌면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점이 그를 더 힘겹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왕전을 비롯한 오왕은 그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전쟁이고 나발이고 검후님을 찾으러 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럴지도…….]
[맞다. 저렇게 괴로워하실 거면 차라리 주모님을 찾아 움직이는 게 더 낫다.]
혁련천후의 굳어진 안색을 본 일행들은 저마다 안타까워했다.
그때 혁련천후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모두는 표정을 고치며 그를 응시했다.
“신경들 끄라고 했다.”
“……예?”
조윤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전음을 도청하실 수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아예 하지도 마라.”
“진짭니까?”
왕전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전음을 도청하다니. 지금껏 전음을 도청한다는 말은 그들조차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능력이 어디까지 닿으신 겁니까? 강호에서 말하는 조화경인가 뭔가 하는 그런 경지라도 밟으신 겁니까?”
“가서 술이나 좀 가져와.”
“예.”
왕전이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때 진유가 들어섰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이 났단 말이냐?”
“남쪽에서 용성이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맹의 남부 지부를 공격해서 함락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맹의 주력군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 차 지원군을 꾸린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저희들도 그들과 함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용성이라고 했느냐?”
조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유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조윤은 눈살을 찡그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혁련천후가 그런 조윤에게 물었다.
“중원을 도모할 마음을 품을 정도로 용성이라는 곳이 대단한 곳이냐?”
“제 추측입니다만, 굳이 전력을 따져 보자면 구대문파의 세 곳을 합친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모두가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다.
구대문파 세 곳을 합친 전력이라면 실로 대단한 전력이라 할 수 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지방 하나 정도면 몰라도 중원무림 전체를 도모하기에는 역부족인데, 놈들이 왜 갑자기 남부 무림을 쳐들어왔을까요?”
왕전의 물음에 혁련천후는 답을 못했다.
그때 조윤이 말을 이었다.
“그들이 손을 잡은 세력이 있습니다.”
“…….”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한 부족과 동영의 인자림이 오래전부터 그들과 손을 잡고 일을 꾸며왔습니다. 만약 그 두 곳의 전병력이 중원으로 들어온다면 전력은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해질 겁니다.”
그 말에 왕전이 코웃음을 쳤다.
“흥! 섬나라 왜놈들과 손을 잡았단 말이냐! 그럼 용성이라는 곳도 혹시 오랑캐 놈들일 수도 있겠군. 아니냐?”
조윤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성주와 수뇌부는 중원인이었다.”
대화는 한동안 더 이어졌다.
조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진유만이 굳은 얼굴로 혁련천후의 허락을 기다렸다.
혁련천후가 뒤늦게 진유에게 물었다.
“참전을 하고 싶은 것이냐?”
“정파의 일원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허락을 해 주시면 당장에 저도 맹으로 떠나겠습니다.”
혁련천후는 잠시 진유를 응시했다.
진유는 차마 시선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허면 당장 떠나겠습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물러서야 한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 알아야 장차 사문을 이끌 수 있음을 명심하여라.”
“사숙조님의 말씀,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진유가 절을 하고 물러가자 혁련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쟁에 참전을 할 화산파의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진유는 장차 사문의 장문인이 되어 화산파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십니까?”
“아니다.”
“혹시 주모님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시간이 남을 때 저희들이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왕전의 말에 혁력천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담대소천이 나섰다.
“하루만 시간을 내서 다녀오겠습니다.”
“사사로운 일에 너희들을 부려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담대소천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어찌 사사로운 일이라고 하십니까. 주공께서 편안하셔야 저희들도 마음이 편할 수 있습니다. 허니 허락을 해 주십시오.”
어지간해서는 이러는 법이 없는 담대소천이라 혁련천후는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야 했다.
“좋다. 대신 하루만이다.”
“알겠습니다. 허면 당장 나가 보겠습니다.”
모두는 겉옷만 걸치고 재빨리 장원을 빠져나갔다.
혁련천후는 창을 통해 멀어지는 수하들을 지켜보다가 그 자신도 밖으로 나섰다.
“사숙조님! 어디 가십니까!”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던 청명과 청진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성과는 좀 있느냐?”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더 강해지면 사숙조님 앞에서 검무를 춰 보이겠습니다!”
혁련천후는 둘을 향해 담담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강을 넘어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청명과 청진은 다시 연무장으로 달려가 수련을 재개하였다.
* * *
혁련천후와 일행들이 머무는 장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의 중턱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며 장원을 바라보는 청년은 마교의 흑영대와 함께 움직이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그 뒤에 악승을 비롯한 흑영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복장이 아닌 깨끗한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핏빛 무복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니 다른 옷으로 바꿔 입으라는 청년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