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77화 (75/425)

# 77

<귀환무사 77화>

“상관없다. 어차피 그와 난 계약을 한 것이다. 그가 원하는 자의 목만 잘라 주면 계약은 종료되는 것이지.”

좌측의 죽립인이 말하고 나선다.

“곧 광동을 치러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 전에 흉수를 찾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우리에겐 용성의 성주와 한 약속보다 유소의 복수를 해 주는 것이 우선이다. 하니 다들 그렇게 알고 있거라!”

이번에는 다른 자가 조심스럽게 말하고 나선다.

“소성주가 지금 섬서에 있습니다. 그와 마주칠 공산이 큽니다만…….”

“나의 개인적인 복수까지 그들에게 허락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간 김에 그가 원하는 자의 목까지 베어 버리면 그것으로 계약은 종료되는 것이다. 한낱 계집 따위에 홀려 성을 나간 어린 애송이쯤은 무시하면 된다. 가자!”

“예!”

스스슥!

나타날 때만큼 은밀하게 사라지는 죽립인들.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죽은 자들이 흘린 피만이 늪지를 떠다니고 있었다.

* * *

술잔을 내려다보는 혁련천후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지난밤부터 가슴이 지나치게 답답했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이런 기분이 처음은 아니었다. 십 년 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리고 결국 사부를 잃고 자신은 죽음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녀부터 찾아갔어야 했을까.’

중원으로 귀환을 한 이후, 그녀부터 찾아가지 않은 것이 뒤늦은 후회로 다가왔다.

쪼르륵!

탁!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서 독한 화주를 마셔 댔지만 조금의 취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그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한껏 들이쳤다. 영웅 대회는 계속되고 있었다.

정도맹 전체가 군웅들이 내지르는 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뇌리에 독고혜가 아닌 또 다른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자의 흔적이 사라졌다.’

영백에 이어 죽이고자 했던 인물.

그의 행적이 갑자기 사라졌다.

‘영백의 죽음을 보고 숨어들었겠지. 허나 이 세상에서 네가 피할 곳은 없다.’

팍!

손을 짚었던 창틀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면서 창틀이 타 버린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왕전이 들어섰다.

“곧 시합이 시작됩니다.”

“가지.”

얼굴에서 근심을 걷어 버린 혁련천후는 장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연무장을 향하던 혁련천후는 전방에서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모용단승의 누나인 모용미와 모용세가의 무사들이었다.

무사들이 하나같이 등에 봇짐을 멘 것을 보니 아마 세가로 돌아가려는 듯싶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혁련천후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무당과의 싸움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압도적인 위압감을 청년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모용미 또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그를 지나쳤다.

‘그냥 보내야 하나?’

갈등이 생겨났다.

곧 있으면 모용단승의 대전이 시작된다. 어지간한 구파나 명문세가의 자식들마저 대부분 탈락했다. 하지만 모용단승은 기어코 최후의 여덟 명에 올랐다.

혁련천후는 그 사실을 모용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잠깐!”

모용미를 비롯한 청년 무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혁련천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들에게 느릿하게 다가갔다.

모용미의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가까이서 본 혁련천후가 무척 젊었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갈 때는 몰랐지만 작정을 하고 바라보니 이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놀라워! 저 나이에 명수진인을 이기다니…….’

문득 자신의 세가에도 저 정도의 고수가 있다면 무척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용세가의 가주가 아니시오.”

혁련천후는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지켜보던 왕전은 어색한 혁련천후의 몸짓에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와 만나고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태도가 그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모용세가의 모용미라고 합니다.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요.”

비록 여인이지만 일가의 가주다운 기품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세가로 돌아가는 길이시오?”

“일정이 끝났으니 그럴 수밖에요. 부디 화산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어요.”

혁련천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막상 불러 세웠지만 정작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고 ‘모용단승이 여기 있소’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왕전이 불쑥 끼어들었다.

“오늘 시합이 끝나면 잔치를 벌일 예정이니 모용세가에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면 감사하겠소!”

“…….”

난데없이 잔치라니.

혁련천후는 왕전을 돌아보았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왕전이 말을 이었다.

“흘흘! 사천의 모용세가가 동석하면 자리가 더욱 빛나지 않겠소이까? 거절치 말아 주시오!”

왕전의 그 같은 말에 모용미의 얼굴에 의외의 빛이 떠올랐다.

당금 모용세가의 쇠락은 지나가던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을 화산의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이들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들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 자들은 없었다.

피해의식이 팽배했던 그녀로선 오해할 만한 소지가 다분했다.

그때 혁련천후가 말했다.

“같은 처지끼리 자리를 함께 가져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

차갑게 변해 가던 모용미의 두 눈이 다시 한 번 이채를 머금었다.

같은 처지? 그 말이 왠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화산도 얼마 전까지는 우리와 다를 바 없었어.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야.’

“보잘것없는 저희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모용미는 가볍게 머리를 조아리며 결국 초대에 응했다.

* * *

시간을 내어 몰래 모용세가의 거처를 찾았던 모용단승은 아무도 없자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돌아가다니.’

후회가 물밀듯이 올라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의 정체를 밝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 줄 것을 그랬다.

패배감이라는 벗지 못할 멍에를 짊어지고 돌아갈 그들을 생각하자 울컥하는 무엇인가가 속에서 올라왔다.

모용단승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곧 자신의 순서가 된다.

사강에 오르려면 마음을 다잡고 전의를 불살라야 한다.

“후욱!”

크게 심호흡을 한 모용단승은 고개를 들어 이미 비무대 위에 올라 있는 청년을 똑바로 쳐다봤다.

능글능글 웃고 있는 그는 당가의 차남, 당치성이었다.

오늘의 자신을 있게 만든 장본인이 비웃음을 날리며 자신에게 손가락을 까딱인다.

‘개새끼…….’

철컥!

검을 어깨에 멘 그는 그대로 비무대로 몸을 날렸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한데?”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관산악과 담대소천이 모용단승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모용단승의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여서다.

“오신다.”

“어라? 저 여자는 단승이 놈의 누나잖아?”

모용미가 함께 오자 모두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왜 함께 온단 말인가.

화산의 모든 인물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혁련천후의 인상을 가볍게 찌푸려졌다. 이런 식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번거로움이 싫었던 그가 태허에게 주의를 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모용미를 바라보는 관산악의 눈빛이 묘했다. 그것을 본 흑야가 당장에 전음을 날린다.

[꿈 깨라.]

[오를 나무를 쳐다봐야지, 이놈아.]

왕전의 전음이 이어졌다.

관산악이 둘을 보며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재빨리 모용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일행들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없이 관산악은 흐뭇한 표정으로 비무대를 응시했다.

당치성을 쳐다보는 모용미의 눈빛은 꽤나 차가웠다.

자신의 가문에 씻지 못할 치욕을 안겨 주었던 그를 화산의 출전자가 이겨주길 내심 고대하고 있었다.

당치성은 대공자 당문성보다 더 악랄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위인이다.

화산의 출전자가 비록 한 번의 부전승과 두 번의 승리를 통해 이곳까지 올라왔지만 당치성을 이기기는 힘들다고 여겼다.

‘그래도 무참히 꺾어 줬으면…….’

그녀는 내심 그렇게 바라며 화산의 제자로 분장을 한 모용단승을 응원했다.

모용단승과 당치성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제법이군.”

“당가의 대공자만큼이나 강하다고 하던데, 일단 시작은 꽤 괜찮군.”

담대소천과 왕전은 둘의 대결을 지켜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낯빛이 굳어졌다.

모용단승이 현저하게 밀리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한 번 수세에 몰린 모용단승은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수비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켜보는 화산의 인물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비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문인 태허를 비롯한 수뇌부의 얼굴 역시 제법 긴장한 빛이다.

비록 모용단승이 화산의 제자는 아니지만 자신들의 희망이 되어 버린 혁련천후의 사람이었다.

해서 그가 이겨 주기를 그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모용단승은 화산의 무복을 입고 있다. 결코 자신들과 무관하다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왕전이 돌연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뭐야? 저런 검법은 언제 배웠지?”

“처음 보는 검법인데?”

모용단승이 전혀 보지 못했던 검법을 펼쳐 수세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때 담대소천이 왕전의 옆구리를 찔렀다.

[모용세가의 검법이다.]

모두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옆에서 지켜보고 앉았던 모용미는 가뜩이나 큰 두 눈이 더욱더 크게 변해 있었다.

지금 당치성을 상대하고 있는 화산의 제자가 펼치는 검법, 바로 모용세가의 검법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확실히 모용세가의 검법이 맞았다.

‘저것을 어떻게 화산이…….’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가문의 무사들이 아니면 절대 익힐 수 없는 그것을 화산의 제자는 거의 완벽하게 펼쳐 내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완벽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불현듯 모용단승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공을 돋우어 모용단승을 살펴보았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발전은 불가능해.’

모용미는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비무가 끝나면 그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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