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귀환무사 72화>
깡깡!
혁련천후는 가장 단순한 보법으로 최소한의 움직임을 보이며 명수진인의 맹공을 모조리 막아 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조금은 얼굴이 붉어진 명수진인에 비해 낯빛 또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공방이 더 이어졌을까?
명수진인은 서서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태청검법을 아느냐?”
느닷없는 질문에 살짝 불안감에 젖어 가던 명수진인의 얼굴에 느닷없이 비웃음이 떠올랐다.
‘내공을 운용하는 도중에 말을 하다니. 확실히 별것도 아닌 놈이었구나.’
결투 도중에 말을 한다는 것은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말을 하는 순간 내공의 운용이 불규칙하게 변하며 허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치명적인 실수를 혁련천후가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혁련천후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화산의 사대제자들이 익히는 검법이지.”
까가강!
“그것을 익혀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거든.”
“……!”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바로 너 때문에.”
쐐애액!
까가강!
불꽃이 일며 혁련천후의 장포 자락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슬쩍 몸을 움직이니 금세 꺼졌다.
명수진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린 것은 혁련천후가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을 때였다.
“무당의 장로를 꺾을 수 있는 검법이라면 그걸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나?”
“……!”
그때였다.
혁련천후가 느닷없이 검의 궤적을 바꿔 명수진인의 허리를 노렸다.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태청검법의 여섯 번째 초식을 펼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금껏 다섯 번째 초식 이상을 펼친 적이 없었다.
찌이잉!
‘웃!’
명수진인은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강력한 반탄력에 터져 나오려던 신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제 세 초식이 남았다. 그것을 다 견뎌 낸다면 네가 이긴 것으로 해 주겠다.”
“이런 미친……!”
혁련천후의 검이 묘한 방위로 올라갔다.
팟!
혁련천후의 육신이 환영을 남기고 명수진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막 검공을 펼치려 했던 명수진인은 크게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팟!
간발의 차이로 지나간 혁련천후의 검에 의해 장포 끝이 조금 날아갔다.
팔랑!
‘이럴 수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지.”
스슥!
혁련천후의 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던 명수진인은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혁련천후의 검을 쳐 냈다.
꽈앙!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굉음이 울렸다.
“우악!”
명수진인의 입에서 기어코 비명이 터졌다. 휘청거리며 주르륵 뒤로 밀려나는 명수진인을 보며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지금 명수진인이 밀리고 있지 않소!”
사천당가의 장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태청의 기운이 삼라만상을 다스리니 그것이 곧 화산의 검이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번쩍 하는 섬광이 일더니 명수진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광경을 모두는 볼 수 있었다.
우당탕탕!
비무대 끝에 떨어진 명수진인은 바닥을 굴러 연무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털썩!
몇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지는 명수진인.
순간 정도맹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철컥!
혁련천후는 검을 거두었다. 그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혁련천후는 귀빈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고는 맹주 나백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화산은 맹의 결정에 따르겠소. 향후 이십 년간 영웅 대회에 출전하지 않을 것이며 이번 대회 역시 패배했음을 인정하겠소.”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혁련천후는 장문인 태허를 잠시 응시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비무대를 내려갔다.
“우와아!”
정적에 휩싸였던 정도맹이 우레와 같은 함성에 들썩거렸다.
군웅들은 표표히 비무대를 내려오는 혁련천후를 향해 아낌없이 환호성을 보내 주었다.
대부분은 군소 방파와 삼류 문파의 무사들이었다.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격동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장문인 태허의 귓속으로 맹주 나백의 축하가 흘러들었다.
[축하드리오, 장문인. 허허허!]
또 다른 전음이 흘러들었다.
“허허허!”
태허는 기어코 소리 내어 웃었다.
* * *
치욕의 패배를 당한 무당파가 돌연 강호의 화두로 떠올랐다.
검을 차고 살아가는 모든 무사들의 입에서 화산과 무당의 대결이 오르내렸다.
절대 약세로 분류되었던 화산파가 천하인들이 모인 곳에서 무당파에 도전을 하고 그들을 꺾어 버리자 천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화산파를 보기 시작했다.
혜성같이 나타난 화산의 속가제자들은 주류에 들지 못하고 강호의 변방을 연연했던 삼류 무사들에게 꿈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실격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가(大家)를 꿈꾸는 소규모 문파들에게 미래에 대한 열망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쇠락한 화산이 무당을 넘어서자 지금껏 억눌렸던 그들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들도 노력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암울했던 현재를 탈피하고 밝은 미래를 꿈꾸게 만들었다.
무당파도 남은 대회를 포기하고 무당산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정도맹을 떠나던 날, 군웅들은 그들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명수진인을 필두로 정도맹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그간의 일이 누군가에 의해 명명백백히 밝혀진 까닭이었다.
게다가 명수진인이 화산파를 초전에 떨어뜨리기 위해 추첨을 조작했다는 것까지 알려지자 명수진인은 결국 구천각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청산이 푸르른 한, 이 원한은 절대 잊지 않겠다!”
방귀를 뀐 놈이 성을 낸다고 했던가.
명수진인은 화산파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정도맹을 떠나 무당산으로 향했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화산파는 맹을 떠나지 않았다.
단체전은 비록 포기를 했지만 개인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혁련천후에게도 아직 볼일이 남아 있었다.
이미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천왕 영백 말고 또 한 명의 죽여야 할 대상이 정도맹에 있다.
그리고 정도맹에 들어왔을 검후 독고혜, 그녀도 찾아가야 했다.
제9장 송가장의 부탁
다소 늦은 아침에 왕전과 담대소천 등은 아침을 들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혁련천후가 보이지 않자 왕전이 물었다.
“주공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냐?”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맹의 식당을 찾은 그들은 혁련천후가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자 잠시 식사를 미루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화산의 제자들과 영호수란도 보이지 않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지금 장문인 태허와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직 거처에 있었고 영호수란은 세가의 사람들을 만나러 잠시 귀빈실에 머물고 있었다.
담대소천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나저나 이놈들은 왜 이렇게 늦는 거냐. 지금쯤이면 도착을 할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꼬맹이를 장원으로 보냈으니 왔다면 함께 이곳으로 오겠지.”
왕전의 대답에 담대소천은 눈빛을 가라앉히며 특유의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놈들이 무사히 몸담았던 곳을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 이후가 문제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해빙궁과 용성은 마교보다 더한 집단이니 놈들의 행위를 배신이라 여기고 끝까지 쫓으려고 들 텐데 말이다.”
담대소천의 말에 관산악이 대답하고 나섰다.
“용성은 아직 천하에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원대한 야망을 품은 놈들이 조윤 때문에 비밀을 드러내는 우를 범하려 들지는 않을 거다. 뭐, 은밀히 자객을 보내 처치하려고 든다면 모를까.”
“북해빙궁도 마찬가지겠지?”
“놈들은 또 다르지.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 정벌을 꿈꿨던 놈들이니 세력이 탄로가 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을 거다. 그러고 보면 조윤보다 천소가 더 위험하겠군.”
모두는 북궁천소와 조윤을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묵묵히 듣고만 앉았던 흑야가 말을 꺼냈다.
“놈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꼬맹이들은 왜 늦는 걸까? 벌써 도착을 해도 했어야 할 놈들인데 말이다.”
“보나 마나 이것저것 다 하면서 오느라 늦는 거겠지. 아직 철이 들려면 먼 놈들이니까.”
“후후후!”
모두는 사공진무와 또 한 명의 일행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막내뻘인 둘은 천하에 둘도 없는 사고뭉치들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능력은 결코 그들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있어 둘은 물가에 내놓은 애나 다름이 없었다.
관산악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주모님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정도맹 어딘가에 계실 텐데…….”
“주공께서 죽여야 할 놈이 하나 더 있지 않느냐. 그자를 제거하면 그다음에 찾으시겠지.”
“그런가?”
흑야가 말을 받았다.
“그분을 공격한 놈들도 알아내야지. 어딘지는 몰라도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않겠느냐.”
“두말하면 개소리지.”
모두는 대화를 나누면서 혁련천후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좀처럼 시간이 지나도 오지를 않자 담대소천은 먼저 식사를 하자고 했다.
식사를 하던 도중에 관산악이 금옥장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개방의 지부를 통해 들었는데, 금옥장의 장주라는 놈이 계속해서 주모님께 혼사를 요구했던 모양이더라. 솔직히 난 놈들이 의심스러워.”
“주모님을 공격한 곳이 금옥장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냐?”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그놈의 느낌은.”
흑야가 그런 관산악을 노려보며 피식 웃고는 핀잔을 주었다.
모두가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을 향해 다가서는 청년들이 있었다.
“저…… 화산의 대협들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약관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청년들 넷이 포권을 취하며 말을 걸어오자 모두는 그들을 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누구……?”
“저희는 산동 송가장(宋家壯)의 무사들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화산파가 보여 준 기백에 감명을 받아 이렇게 인사라도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그 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모두는 대수롭지 않게 청년들의 말을 받아 넘겼다. 유난히 얼굴이 하얀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