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귀환무사 71화>
비슷한 나이로 보이건만 진유가 저리도 공손히 대하다니. 화산에 저 나이에 저런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는 빛이 역력했다.
적용세가 물었다.
“신분을 밝혀 주시기 바라오!”
그가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모든 이들의 눈이 혁련천후의 입에 집중되었다. 왕전을 비롯한 일행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은 여차하면 뛰어들 태세를 갖춘 채, 혁련천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만 기다렸다.
차가운 시선으로 귀빈석을 쓸어 본 혁련천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장문인을 대신하여 나온 화산의 속가제자이오. 본 화산이 운영 위원회에 정식으로 요청하겠소.”
“무엇을 말이오?”
장문인 태허를 비롯한 화산의 모든 인물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뭘 요구하시려고 저러시지?”
모두가 숨을 죽였다.
혁련천후는 명수진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담담하면서도 힘이 실린 어조로 말했다.
“무당은 화산을 모욕했소. 사천당가의 출전자가 명백한 살초를 전개했음에도 무당은 대회를 운영하는 권한을 쥐었다는 이유로 편파적으로 대처하여 본 화산파에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 주었소. 수모를 당했다면 응당 갚아 줘야 하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을 것이오. 해서 나는 화산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사천당가가 아닌 무당파에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오.”
두둥!
정도맹 전체가 술렁거렸다.
귀빈석의 수뇌부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으로 혁련천후와 명수진인을 번갈아 응시했다.
반면 마교의 소교주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혁련천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군웅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화산이 뭘 믿고 저러지?’
혁련천후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왕전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갔다.
“흐흐! 역시 주공이시다. 놈들을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었어.”
“후후후. 볼만하게 생겼군. 무당으로서는 받아주면 박살이 나는 거고 받지 않으면 천하인의 웃음거리가 될 테니 말이다.”
“이런 묘수가 있었다니. 어쩐지 지금껏 가만히 계신다 싶더니. 결국 저것을 찾아내려고 그러신 거였군.”
모두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켜보고 섰던 영호수란은 담대소천과 관산악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왕전과 흑야 등은 화산에서의 사건으로 이미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담대소천과 관산악은 전혀 모른다.
천하의 삼왕과 친구처럼 지내는 그들이니 신분이 궁금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더불이 이런 사람들을 수하로 둔 혁련천후의 진정한 신분이 새삼 궁금했다.
그녀는 혁련천후를 쳐다봤다.
‘도대체 저 사람은…….’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저렇듯 오연한 태도를 보이는 혁련천후가 문득 눈이 부실 정도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자 두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기 시작했다.
‘멋져…….’
* * *
무당파의 명수진인은 화로 인해 얼굴이 벌겋게 붉어졌다.
화산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설마 결투를 신청해 올 줄이야.
화산에 자신보다 강한 고수는 없다. 매화무적이 그나마 천하가 인정하는 고수지만 자신에 비하면 반 수 정도 모자란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종자가 한기를 풀풀 풍기며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으니 그야말로 환장을 할 노릇이었다.
물론 요구를 거부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천하에서 몰려든 군웅들이 보는 앞에서 화산의 결투 신청을 거부한다면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받아 주려니 그것도 그 자체로 자존심에 금이 갈 노릇이다.
소림사를 넘어 무림의 태산북두를 꿈꾸는 무당파가 쇠락한 화산을 상대로 결투를 벌인다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게 된다.
그야말로 이도저도 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적용세가 나섰다.
그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혁련천후를 지그시 응시하고는 귀빈석에 앉아 있던 장문인 태허를 돌아보며 물었다.
“장문인! 저자의 요구가 진정 화산파의 뜻이 맞소?”
태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하고 나섰다.
“그렇소. 본 화산의 뜻이 맞소이다.”
“허어, 장문인!”
적용세는 화산파의 요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무당파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당장에 여기 있는 명수진인만 해도 초절정을 훌쩍 넘어선 고수가 아닌가.
하물며 화산파 최고의 고수인 매화무적이 나서도 될까 말까 하는 판에 생판 처음 보는 혁련천후가 대전 상대로 나서다니.
“수석 장로께서는 이 몸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무당에게 어찌할 것인가를 물어야지 않겠소?”
태허의 말에 적용세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명수진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화산의 뜻이 저러하니 구천각주께서는 속히 답을 해 주셔야겠소.”
파르르…….
명수진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잔뜩 화가 난 그의 볼이 볼록 솟아났다. 어금니를 악문 게 아니겠는가.
“진정 이렇게 나오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소. 본 무당은 화산파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명수진인은 결국 혁련천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거부해서 조롱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결투를 받아들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게 낫다고 판단을 내렸다.
‘철저히 밟아 주마. 무당. 당장은 구천각주, 너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해 주마.’
바라던 대로 되었다.
이제 법적으로 처참하게 짓밟아 주면 그뿐이다.
한편, 지켜보고 앉았던 맹주 나백은 혁련천후의 패기 넘치는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멋지군.”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무당의 장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백을 돌아봤다. 나백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오히려 그는 이 상황이 통쾌했다.
구천각을 필두로 정도맹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무당파에게 평소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던 그였다.
다만 화산이 저러다가 큰 화를 입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마음이 썩 편하지는 못했다.
혁련천후는 명수진인을 향해 물었다.
“기왕에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지금 당장 결판을 내는 것이 어떻겠소.”
“바라던 바다!”
명수진인이 그 자리에서 훌쩍 몸을 띄웠다.
기선을 제압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천하일절로 꼽히는 제운종을 펼쳐 혁련천후의 맞은편에 내려섰다.
그는 장문인 태허를 돌아보며 씹듯이 외쳤다.
“스스로 무덤을 팠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본인을 원망하지 마시오!”
“여부가 있겠소.”
장문인 태허는 싸늘히 받아쳤다.
명수진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체 화산파가 언제부터 자신을 이렇게 막 대했단 말인가.
지켜보는 눈만 없었더라면 장문인 태허의 낯짝부터 후려갈기고 싶었다.
“귀하가 무당의 대표로 나선 것이오?”
“그러는 너희 화산엔 그토록 인물이 없단 말이냐? 고작 삼대제자 따위가 대표로 나서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 아니냐!”
명수진인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혁련천후를 도와주는 꼴이 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
나중에 혁련천후에게 패했을 때, 무당파의 장로가 화산의 삼대제자에게 패한 것을 스스로 광고를 한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 담대소천이 비무대로 올라왔다.
그의 손에는 화산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혁련천후에게 검을 가져다준 그는 명수진인을 보며 씨익 웃어 주고는 내려갔다.
부르르…….
명수진인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담대소천의 비웃음 가득한 눈빛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내려가면서 읊조린 전음 때문이었다.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며 빌어야 될 거다.]
그는 지금 구멍이란 구멍에서 연기가 솟아날 지경이었다.
‘이것들이 정말…….’
스르릉!
혁련천후가 검을 뽑았다.
지나치게 담담한 그의 태도에 명수진인은 순간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금니를 악물며 검을 뽑았다.
‘무참히 짓밟아 주마. 이놈!’
조금 전, 혁련천후가 읊조린 말을 똑같이 읊조린 명수진인은 신경질적으로 검을 뽑았다.
챙!
* * *
화산파와 무당파의 대결은 혁련천후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서로가 느긋했다.
화산파는 혁련천후가 무조건 이길 거라 확신했고, 무당파 역시 명수진인이 압도적으로 이길 거라 믿고 있었다. 군웅들 대부분도 명수진인의 압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혁련천후가 밀리고 있었다.
압승을 예상했던 화산파의 사람들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까가강!
번쩍!
금속성과 섬광이 비무대 위를 수놓았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명수진인의 공세가 상상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혁련천후는 결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해서 수비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자식들! 지금 주공이 어떤 무공으로 싸우시는지 그걸 봐야지.”
“……!”
그 말에 진청을 비롯한 모두는 눈에 힘을 주었다. 눈에 익은 혁련천후의 움직임, 진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태청검법!”
“헉! 정말 태청검법으로 싸우고 계셨어!”
믿을 수 없었다.
태청검법은 화산에 입문하는 모든 제자들이 기본적으로 익히는 화산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무공이다.
그런 태청검법으로 천하고수 명수진인을 상대하고 있었다니.
찌르르…….
진청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다 그랬다.
“씨이…….”
청명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청진은 아예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귀빈석에 앉았던 장문인 태허도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주체할 수 없는 격동에 그는 눈시울마저 붉혔다.
그러나 조금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혁련천후가 언제쯤 피를 뿌리며 쓰러질지, 그 장면만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 * *
명수진인은 내심 웃고 있었다.
사실 혁련천후의 지나치게 담담한 태도에 혹시나 했었다.
무림의 역사에 이변이 벌어졌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별것도 아니었다. 혁련천후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지금껏 단 한 번의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수비 능력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은 확고했다.
“고작 그따위로 건방을 떨었다니! 가소로운 놈!”
무당의 보검이 연신 맹위를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