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귀환무사 69화>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또 이렇게 나오는 것인가.’
삼왕이 화산파와 함께한다는 것을 아는 저들이 대놓고 도발을 해 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삼왕에 아랑곳하지 않을 뭔가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고를 가장해 아이들을 해치려 들 수도 있겠군.’
적당히 사고로 주장할 정도의 은밀한 수법을 펼쳐 경쟁 관계에 놓인 문파의 고수들을 제거하는 수법들은 수십 년 전부터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었다.
대부분의 문파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부분이다.
‘구천각이 꾸몄겠지.’
혁련천후는 무당파가 있는 건너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명수와 명보를 비롯한 무당의 주요 인사들이 말을 주고받으며 연신 껄껄거리고 있었다.
둥둥!
시합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화산과 무당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영호수란이 두 손을 모아 입에 갖다 대고는 내공을 담아 외쳤다.
“화산! 이겨라! 화산! 이겨라!”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혁련천후가 처음으로 먼저 그녀를 돌아보았다.
* * *
혁련천후의 명을 받고 장원을 찾은 청명은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았다.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신들과 연무장을 붉게 물들인 선혈들, 그는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쾅!
강력한 폭발음이 청명의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황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린 청명은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거대한 도끼가 허공을 화려한 빛으로 수놓고 있었다. 살짝 스쳐도 육신이 터져 나갈 것 같은 파괴적인 기운이 장원을 휩쓸고 있었다.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셋, 그중 하나는 팔짱을 한 채 느긋한 표정으로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누구지? 홍무는 어디 갔어?”
모두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장원을 지켜야 할 홍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청명은 선뜻 장원으로 들어서질 못했다. 저 정도의 파괴력이면 파생된 강기에만 휘말려도 자신은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때 팔짱을 하고 있던 사내와 청명의 시선이 마주쳤다.
“읍!”
청명은 전신이 거미줄에 걸린 듯 꼼짝을 못했다.
온몸을 옭아매는 사내의 눈빛은 거미줄처럼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저런 눈빛은 가짜 사부들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으…… 뭐야? 저 사람.”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 * *
살부광마 전위는 눈앞의 조윤을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북궁천소를 죽이기 위해 북해를 떠나온 자신의 수하들은 이미 모조리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모두가 조윤, 한 명에게 당했다.
수하들의 뒤쪽에는 산에서 자신과 부딪혔던 유소와 그의 수하들이 죽어 있었다.
결코 약하지 않았던 그들이 모조리 몰살을 당한 것을 보면서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전위는 뒤쪽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는 북궁천소를 보며 이를 갈았다.
“북해는 절대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천소!”
“지금 그것을 생각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조윤이 차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자신을 죽이러 왔던 용성의 무사들은 북궁천소가 모조리 황천길로 보내 버렸다.
그래서 자신은 북궁천소를 노리고 찾아온 이들을 상대했다. 빚을 지고는 참을 수 없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전위의 눈동자는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내공의 소모가 극에 달하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미 호흡조차 턱 끝까지 올라왔고 들썩이는 심장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청명의 눈에도 다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이름 없는 자는 아닐 터, 신분을 밝혀라!”
전위는 자신이 조윤을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북해의 난폭자들이라는 수하들을 홀로 도살해 버린 그가 자신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음을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 전에 죽어도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 했다.
이름 없는 무명에게 죽기엔 너무나 비참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윤은 전위를 보며 창을 횡으로 뉘었다.
마지막 숨통을 깨끗이 끊어 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도리라고 여겼다.
“나는 조윤이라는 사람이다.”
조윤의 짤막한 대답에 전위의 눈동자가 한차례 출렁거렸다. 두터운 입술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창왕!”
전위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존재, 무너졌던 자존심이 그나마 회복되었다.
천하의 창왕에게 죽는다면 무사로서 헛된 죽음은 아니니까.
“억울하지는 않겠군. 당신에게 죽는다면…….”
“아깝군. 함께했다면 꽤 좋을 법했어.”
전위의 시선이 조윤의 너머에 서 있는 북궁천소를 향했다.
“천소! 너도 신분을 감춘 것이냐?”
전위는 문득 북궁천소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했다. 창왕을 친구로 둘 정도면 그 또한 절대 평범할 리 없었다.
북해빙궁에서의 천소는 돌격대의 대주였다.
창왕의 벗인 그가 맡기엔 지나치게 초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답해라! 천소! 오 년 동안 모두를 속였던 것이냐?”
다시 묻는 전위의 입가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북궁천소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전위가 스스로 혈맥을 끊어 버렸음을 눈치챈 것이다. 전위의 충혈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북궁천소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굉혈도(轟血刀)의 주인이 나다.”
“역시, 역시 그랬었군. 도왕(刀王)이라…… 크크!”
전위의 거대한 육신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피를 머금은 두 눈은 여전히 북궁천소를 향해 있었다.
“네가 도왕임을 알았다면 나 말고 다른 이가 왔을 것이다.”
털썩!
전위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는 피를 쏟으며 부르짖었다.
“북해의 분노를, 그분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아무리 도왕이라도 그분은 이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신 분…… 지옥에서 네놈을 기다리고 있겠다.”
털썩!
그 말을 끝으로 전위는 차가운 대지에 몸을 뉘었다. 패배를 죽음보다 싫어했던 북해의 거한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길을 택했다.
잠시 죽은 자들을 응시하던 둘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제법 강해졌군.”
“너 역시…….”
말끝을 흐린 북궁천소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그런 적이 없었던 그였기에 조윤이 눈빛을 발하며 물었다.
“웬 한숨이냐?”
“주공께 죄송해서 이런다. 결과적으로 북해빙궁이라는 엄청난 적을 몰고 온 꼴이 아니냐.”
“나 역시, 용성이라는 호랑이를 끌고 왔지 않느냐. 이렇게 되면 주공께 불충을 하는 셈이 맞긴 하군.”
둘은 씁쓸히 웃었다.
짙은 피비린내가 장원을 휩쓸었다.
바람이 불자 역한 피비린내가 청명의 후각을 자극했지만 그는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으…… 괴, 굉혈도와 창왕이라니…….”
“넌 누구냐?”
차가운 음성이 청명의 귓속을 울렸다.
전신에 무기를 두른 북궁천소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명은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둘에게로 다가갔다.
“사숙조께서 두 분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사숙조?”
“아, 두 분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 허면 지금 그분은 어디에 계시느냐?”
청명은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는 두 다리를 손으로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정도맹에 계십니다.”
* * *
“저 새끼들이!”
왕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진명을 몰아치는 사천당가의 고수가 연신 살초를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 검의 빠름은 진명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보였다.
“확실히 노리고 나왔군.”
“저거 완전히 죽일 생각인데. 이거 우리가 뛰어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관산악이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뜻밖에도 그는 팔짱을 끼고서 담담히 비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관산악이 말을 이었다.
“저대로 두면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주공!”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유가 벌떡 몸을 세웠다.
“지나친 살초가 아닌가! 심판관은 시합을 중단시키시오!”
내공을 실은 그의 목소리는 연무장 전체를 울렸다. 진유를 슬쩍 쳐다본 심판관은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보시오! 심판관!”
진유는 목에 핏대를 올리며 다시 외쳤지만 심판관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깡!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진명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그를 쫓아 무당의 출전자가 범처럼 달려들었다.
퍽!
“욱!”
강력한 힘이 실린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한 진명이 피를 뿌리며 휘청거렸다.
이미 승패가 갈린 상황이었지만 사천당가의 출전자는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검을 머리 위쪽으로 한 번 회전을 하고는 그대로 진명을 향해 일도양단의 수법으로 달려들었다.
“위험하다!”
“중단시켜라! 저러다 사람 죽겠다!”
군웅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순간 혁련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옆에서 바람이 불었다.
“미친 새끼!”
“우악!”
어느새 왕전이 비무대 위에 나타나 있었다.
진명을 향해 살초를 전개했던 사천당가의 출전자가 피를 뿌리며 저만치로 날아갔다.
사천당가 측이 일제히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귀빈석의 몇몇도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혈하고 내려가 있어라.”
왕전이 진명에게 말을 건네고는 심판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비무대 위로 몇 명이 떨어져 내렸다.
사천당가 쪽에서 몇 명이 황급히 올라섰다. 뒤이어 적용세와 더불어 대회를 책임진 구천각주 명수진인도 올라섰다.
사천당가의 인물이 왕전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감히 암습으로 본 가의 제자를 해하다니, 너희 화산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얼굴을 바꾸고 있어서 그가 전왕이라는 것을 몰라보았다.
적용세는 쓰러진 사천당가의 출전자를 살펴보고는 손짓으로 사람들을 불러 데려갈 것을 지시했다.
“암습? 이봐! 명백한 살초를 전개하는 것을 방관하는 이유나 좀 들어 보자.”
“네 이놈!”
당가의 인물은 당장에 검을 뽑을 태세였다.
지켜보는 눈만 없었다면 검을 뽑아 이미 손을 썼을 것이다.
심각한 표정을 한 적용세가 둘의 사이에 섰다.
“화산에서 신분이 어찌 되시오?”
“이 상황에 신분은 무슨, 그냥 속가제자요.”
“허어! 예를 갖추지 못할까!”
적용세가 대뜸 호통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