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귀환무사 68화>
“일단 수뇌부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하네. 그에게도 당분간은 함구하세나. 어차피 그가 있는 곳은 천하에 자네와 나 둘밖에 모르니 석수, 그 친구도 그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네. 영웅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때까지는 비밀에 부치세.”
“일단 수뇌부들에겐 그렇게 지시를 내렸습니다만…….”
“왜?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나백이 가볍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일단은 노사의 말씀대로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대답하던 나백이 이채를 발했다. 엄지와 검지를 비비고 있는 공야무, 긴장을 했을 때만 나타나는 그의 습관이었다.
‘이 정도로 두려운 존재인가?’
* * *
날이 밝았다.
영웅 대회의 열기는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백과 맹의 수뇌부는 변함없이 귀빈석을 지켰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까지 머금은 그들을 보며 혁련천후는 내심 웃어야만 했다.
[저렇게 처웃고는 있지만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겁니다. 망할 새끼들.]
왕전이 맹의 수뇌부를 보며 히죽 웃었다.
땡!
대결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흰색 무복에 검을 찬 청년들이 비무대 위로 올라서는 것이 보였다. 지켜보던 모용단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청년들은 바로 모용세가의 출전자들이었다.
‘세가에서도 출전을 했단 말인가!’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단지 영웅 대회를 구경하러 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모용단승은 자신의 대결보다 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모두가 한 명을 당하지 못하고 줄줄이 참패를 하면서 비무대를 내려왔다.
‘바보같이…….’
참담함에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푹 숙이는 모용단승. 그런 그의 속내는 피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뭐 해? 얼른 올라가지 않고.”
왕전이 모용단승의 어깨를 툭 치며 밀었다.
모용단승의 두 번째 상대는 이미 비무대 위에 올라와 그를 싸늘히 노려보고 있었다.
진주언가의 언승학이라는, 제법 강하다고 소문난 청년 고수인데 성정이 오만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정도맹의 비룡단 소속이기도 한 그는 모용단승을 노려보며 비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작살을 내 버려!”
관산악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호흡을 가라앉힌 모용단승이 바닥을 차고 비무대로 날아갔다.
언승학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후후! 운이 좋아서 일차전은 통과했다만 오늘은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모용단승은 언승학을 무시하고는 심판관을 돌아봤다.
얼른 시작하라는 주문이 담겨 있었다.
심판관의 손이 올라가며 둘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나를 만난 것을 불운이라 여겨라. 애송이!”
모용단승이 그대로 언승학을 향해 돌진했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주먹에 힘을 실어 가던 언승학은 벼락같은 모용단승의 기습적인 공격에 순간 당황했다.
찔러 온다고 여겨 몸을 틀었는데 검이 돌연 뱀처럼 움직이며 옆구리를 베어 오는 것이 아닌가.
“헉!”
황급히 틀었던 몸을 뒤로 물리려 했는데, 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주먹이 날아들었다.
언승학의 할아비라도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퍽!
“크악!”
언승학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저만치 날아가 꼬꾸라지더니 몸을 몇 번 떨다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모용단승은 그대로 돌아섰다.
“화, 화산 승!”
뜻밖의 결과에 놀랐는지 심판관이 말을 다 더듬었다.
모용단승은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곧장 화산파의 자리로 내려갔다.
“뭐야, 화산이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도 대단한 선전을 하고 있잖아. 이렇게 되면 화산파와 만나는 쪽이 잔뜩 긴장하겠는걸?”
“세상에! 천하제일의 권가라는 언가의 후계자가 검도 아닌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다니. 허어.”
군웅들은 내려가는 모용단승을 보며 웅성거렸다.
권법으로 명성이 드높은 언가를 주먹 한 방으로 보내 버렸으니 놀람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용단승은 슬쩍 고개를 돌려 모용세가 쪽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보나 마나 대결에서 다친 무사의 치료 때문에 약당으로 갔을 것이다.
암울하게 굳어진 그를 보며 관산악과 왕전이 엄지를 세웠다.
“잘했다!”
“흐흐! 자식이 갈수록 실력이 나오는구나. 좋아! 이대로만 쭉 가면 팔강 그 이상도 가능하겠어!”
“상대의 방심 탓에 쉽게 이긴 것을 잊지 마라!”
칭찬도 주의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상심을 했을 누이의 얼굴만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우울함에 고개를 푹 숙였던 모용단승이 돌연 눈빛을 발했다.
‘사강까지 올라가자. 그다음에 누님께 내 신분을 밝히자. 그럼 상심을 덜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꽉!
모용단승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영호수란은 동경에 비친 자신을 보며 생긋 웃었다.
조금 있으면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한껏 들떠 있었다.
조금 전 정도맹의 귀빈실에 도착한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곧장 화산파가 있는 곳으로 갈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누구보다 보고 싶은 사람은 혁련천후였다.
‘쳇! 변장을 하려면 좀 멋지게 하면 좀 좋아.’
그녀는 맹을 들어설 때, 화산파의 사람들과 함께 있던 그를 볼 수 있었다.
변신을 했지만 그녀는 분위기만으로 그를 알아보았는데, 하필이면 바꾼 얼굴이 너무나도 평범한 촌부의 그것과 비슷했다.
조부와 오빠만 아니었으면 당장 그에게로 달려갔을 것이다.
“옷이 별로야.”
입었던 옷을 벗어 버리고 가벼운 경장 차림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재빨리 연무장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경호를 하는 무사들이 보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귀빈실은 정도맹의 무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자 무사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녀에게로 쏠렸다.
“수고들 하세요!”
그들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인 그녀는 한 마리 나비처럼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육감적인 뒷모습에 무사들의 뜨거운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우와!
군웅들의 함성이 천지를 울렸다.
영호수란은 비무대를 응시했다. 막 바닥으로 거칠게 떨어지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입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청년의 시선과 부딪혔다.
깜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코앞에서 산 사람의 피를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총총걸음으로 혁련천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저 멀리 혁련천후의 옆모습이 보이자 만면에 미소가 번져 갔다.
“이봐요!”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면서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왕전이 두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엉!”
왕전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관산악과 담대소천, 그리고 흑야의 시선이 일제히 영호수란에게 집중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영호수란은 부끄럽기보다 짜증이 일었다.
“예쁜 사람 처음 보나. 쳇!”
모두의 시선을 무시한 그녀는 왕전을 밀어내고는 혁련천후의 옆에 앉았다.
자신이 왔음을 알 법도 했지만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저 왔어요.”
“늦었군.”
“쳇! 얼굴이라도 보면서 말하면 어디가 덧난대요? 아니면 냄새만 맡아도 저인 줄 아는가 보죠?”
혁련천후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훨씬 보기 좋군.”
막상 여인의 옷을 입으니 상당히 아름다웠다.
한껏 예쁜 표정을 지어 보인 영호수란은 그가 고개를 돌려 버리자 이내 눈썹이 올라갔다.
그때 왕전이 얼굴을 쑥 디밀었다.
“꼬리치면 죽는다.”
“변장을 하려면 좀 멋지게 할 것이지, 산적처럼 그게 뭐예요?”
“고놈의 주둥이는 성별을 바꿔도 여전하구나. 너 주공께 꼬리치면 내가 확 잘라 버리는 수가 있다.”
“꼬리는 무슨, 차라리 강시한테 꼬리를 치고 말지. 흥!”
우와!
군웅들의 함성에 그녀의 뒷말이 묻혀 버렸다.
비무대 위로 올라서는 청년에게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백색무복에 영웅건을 두른 나웅이 등장했다.
부전승과 기권으로 삼 회전에 진출한 그를 향해 군웅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환호를 보내 주었다.
지켜보던 모용단승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자신이 봐도 나웅은 멋졌다. 그리고 당당했다. 강자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나웅의 몸짓 하나하나는 그가 지금껏 꿈꿨던 것과 닮아 있었다.
“저 정도 실력이 있는 놈이 대회 출전을 왜 했을까?”
“영웅 대회 우승이 하찮은 것은 아니지.”
“그래도 저만한 명성이면 우승을 해 봤자 본전이잖아. 재수가 없어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개창피나 다름없을 텐데 말이다.”
왕전과 관산악은 나웅의 출전을 놓고 말을 주고받았다.
담대소천이 둘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마교와 사련의 아이들 때문에 출전했을 것이다. 친선이라도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니 무조건 이겨야지 않겠느냐. 조금만 생각을 한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을, 쯧쯧쯧.”
“아, 예. 예! 참 잘나셨습니다!”
“십만 군사를 부리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소나 잡던 놈과는 생각부터가 다를 수밖에.”
“뭐야, 새꺄!”
둘이 티격태격할 때, 승부는 벌써 끝이 나 있었다.
나웅의 앞에 흑색 무복을 걸친 청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법 강하다고 소문났던 황산파의 이대 제자였던 청년은 나웅의 몇 수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역시 나 공자네요. 멋지지 않아요?”
영호수란이 나웅에게 박수를 치며 혁련천후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런 인간이 뭐가 좋아서 단숨에 달려왔는지. 쳇!’
그때, 비무대 위로 화산의 제자들이 올라섰다.
영호수란은 주변이 떠나 가라 큰 소리로 외쳤다.
“와! 각주님! 멋져요!”
“화산이다! 이번에도 이겨라! 화산!”
“무당을 쓸어버려라! 화산!”
화산 측에서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다.
환호를 보내는 제자들과는 달리 장문인 태허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이번 상대는 다름 아닌 사천당가였다.
“역시 놈들이 올라왔군.”
“놈들의 상대였던 공동파가 기권을 하는 바람에 우리하고 붙게 되었다더군. 자식들이 화산에서 꽁지를 말고 내뺐던 게 언제라고 다시 도발을 해 오고 지랄이야.”
그랬다. 당초 화산과 이 회전에서 싸울 예정이던 형산파가 갑자기 기권을 하는 바람에 화산파는 손쉽게 삼 회전에 오를 수 있었다.
화산이야 쉽게 삼 회전에 올라서 좋았지만 사천당가가 올라오니 결코 좋아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