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귀환무사 66화>
“표정들이 심각했다고?”
“예. 꼭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흠…….”
왕전이 힐끗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찻잔을 기울이는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무심했다.
‘이제야 그자의 시신을 발견한 모양이군.’
자신의 손으로 죽인 자의 신분은 정도맹에서 맹주보다 더 대단하다.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라 지금에야 시신이 발견된 모양이었다.
‘혼란을 겪겠지.’
죽어선 안 될 존재가 죽었으니 정도맹은 보나 마나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은 어디까지나 수뇌부에 국한될 것이 뻔하다.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다면 자칫 영웅 대회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비밀에 붙이고 쉬쉬할 것이 분명했다.
[마교와 사련 놈들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관산악의 전음에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시기가 묘했다. 하필이면 영웅 대회에 마교와 사련의 고수들이 참석을 했다. 그들이 의심을 받는 것은 필연이다.
‘뜻하지 않은 소득이 생길 수도 있겠군.’
어쩌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의심의 눈초리가 그들을 향하게 된다면 향후, 다른 자들을 처치할 때보다 수월해질 수도 있다.
“내일 누가 장원에 좀 다녀와야겠다.”
“장원에는 왜…….”
“이쯤이면 조윤과 천소가 도착을 했을 것이다.”
“놈들을 이곳으로 부르시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제자 하나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혁련천후는 화산 제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음 상대는 어디지?”
“현재로서는 형산파를 꺾으면 사천당가나 종남파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연히 당가가 될 것이다. 그 정도의 조작은 충분히 가능한 자들이다.”
진호가 돌연 눈빛을 발하며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솔직히 당가였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붙어야 하는 놈들이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박살을 내주고 싶습니다.”
“자신은 있느냐?”
“…….”
진호가 머뭇거리자 진청이 대뜸 대답을 하고 나섰다.
“자신 있습니다!”
호기를 부리자 모두가 피식 웃는다.
왕전이 끼어들었다.
“사내라면 당연히 그 정도 객기는 부릴 줄 알아야지. 좋다! 놈들이 올라오면 다시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끔 박살을 내 버려라!”
“예!”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가 따라 일어서려고 할 때 왕전이 셋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일을 위해서 잠이나 푹 자 둬.”
“어디를 가십니까?”
“어디긴, 맹 밖에 술 마시러 가지.”
* * *
정도맹의 북쪽 숲에 영웅정(英雄亭)이라는 곳이 있다.
무사들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그곳은 주로 대주급 이상의 간부들이 이용할 수 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다소 음산함마저 자아내는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휴!”
짙은 한숨을 내쉬는 이는 나웅이었다.
요즘 들어 자꾸만 꿈에 나타나는 독고혜 때문에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려 호위들까지 물리치고 홀로 이곳을 찾았다.
“뭔 놈의 달빛이 저리도 밝을까.”
삼십 년을 살아온 이곳이 나웅은 좋았다.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자신에겐 정도맹이 고향이자 생가나 다름없었다.
그는 내일 개인전 첫 시합을 치른다.
상대는 무당파가 자랑하는 무력 부대 진무각의 고수다.
검에 달통한 신진 고수라고 들었지만 걱정 따윈 없었다. 이미 초절정에 근접한 무력을 지니고 있으니 무조건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사실 나웅의 영웅 대회 출전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미 천하를 진동하고 있는 그의 명성으로 볼 때, 우승을 해도 본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출전을 강행한 것은 바로 마교와 사련에서 출전을 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마교에서 무공 대회를 할 때 정도맹에서 두 명이 참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답례로 이번에는 마교와 사련이 정도맹의 영웅 대회에 참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마.”
그는 마교의 고수들을 떠올렸다.
결승에 올라가면 자신은 그들과 친선 대련을 벌일 예정이다. 물론 자신이 영웅 대회에 출전한 이유도 그들과의 친선전에서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는 조부의 뜻 때문이었다.
비록 친선이라고 해도 각 진영의 자존심이 걸린 까닭에 무조건 이겨야 한다.
영웅 대회의 승자가 되는 것을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어가던 나웅이 돌연 숲을 돌아보며 눈빛을 발했다.
“뭐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가 있었다.
상당히 느린 속도로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는 덩치가 제법 컸다.
내공을 끌어 올려 청각을 돋우자 거친 숨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나운은 혹시 몰라 검파에 손을 가져가며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나지막이 소리쳤다.
“누구시오?”
대답이 없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몰래 숨어든단 말인가!”
눈썹을 꿈틀거린 나웅은 다가오는 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피투성이 괴인이 누군가를 등에 업고 있었다.
“이곳이…… 정도맹이오?”
“그렇소만. 귀하는 누군데 문을 놔두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이오!”
“이분은 검후…… 독에 중독이 되셨으니 속히 치료를 해 드려야 하오.”
순간 나웅은 두 눈을 부릅떴다.
검후라니. 게다가 중독이 되었다니. 그때 괴인이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황급히 사내를 부축한 나웅은 그제야 등에 업힌 여인이 검후임을 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 독고 소저!”
* * *
쾅!
“손 당주!”
거칠게 약당의 문을 열어젖힌 나웅은 큰 소리로 당주 손웅을 찾았다. 내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손웅이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어! 나 공자께서 여긴 웬일이시오?”
느닷없는 나웅의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했던 손웅은 그의 품에 안긴 독고혜를 보고는 놀라며 물었다.
“그분은 누구시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씀을 드릴 테니 당장은 이분의 상세부터 살펴 주시오. 어서!”
“허어! 이쪽으로 눕히시구려.”
평소의 나웅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손웅은 여인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독고혜의 창백한 안색을 본 손웅은 낯빛을 굳혔다.
평생을 의술에 정진해 온 그는 독고혜의 안색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위중한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환자용 침상에 독고혜를 눕힌 나웅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웅을 쳐다봤다.
“어떻소? 괜찮은 것이오?”
“아직 진맥도 해 보지 않았소. 하니 진정하고 조금 뒤로 물러나 계시구려.”
나웅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손웅이 독고혜의 완맥을 잡아 진맥을 시작했다. 초조함이 가득한 나웅의 얼굴이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손웅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고혜의 몸을 돌려 명문혈을 짚어 본 손웅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을 늘어놓는다.
“허허! 어찌 이런 몸으로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여인의 신분이 어떻게 되기에…….”
“심각하오?”
“맹독에 중독이 된 듯한데 기혈이란 기혈은 모조리 막혀 있소이다. 어지간한 무사라도 한 시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어야 정상인데…… 이보시오, 나 공자. 대체 이 여인이 누구요?”
나웅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하니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터였다.
“반드시, 아니 무조건 살려야 하오. 아시겠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하시오. 설사 황궁 보고를 털어 오라고 하면 그렇게라도 할 테니 무조건 살려야 합니다!”
손웅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나웅이 이런 태도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예의바르며 침착했던 나웅이 이렇게 허둥대는 것은 익히 없었던 경우였다.
“내 최선은 다해 보겠소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구려.”
* * *
정도맹주 나백의 거처.
나백은 없고 대신 나웅과 한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대단히 심각했다.
“당장 목숨엔 지장이 없으나 어쩌면 기억과 시력을 잃을 수도 있네.”
“회복 불가의 상태입니까? 아니면 차후, 다른 방법을 통해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장담할 수 없네. 진즉에 보았더라면 모를까, 현재로써는 워낙 손상된 정도가 심해서…….”
백발백염에 가볍게 홍조를 띤 얼굴이 유난히도 인자한 느낌을 주는 노인이 암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노인은 약선(藥仙)) 이자겸이라는 인물로 당대의 최고로 인정받은 명의다.
우연히 맹에 들렀다가 나웅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왔다.
“저 아이의 상세로 보아 만년삼왕의 강력한 음기가 있어야만 치료를 할 수 있을 텐데, 그 귀한 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있어도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네.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네.”
그 말이 나웅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천하에 이자겸만큼 뛰어난 의원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 그가 이런 힘들다는 진단을 내리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자겸이 말을 이었다.
“일단은 저 아이를 노부의 거처로 옮겨야겠네. 이곳은 환자를 치료하기엔 기가 너무 드센 곳이 아닌가. 저 젊은이도 함께 데려갈 것이니 둘을 태우고 갈 수 있을 큰 마차를 부탁하겠네.”
“차라리 이곳이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나웅은 검후를 내기가 싫었다.
비록 의식이 없는 상태라지만 그래도 가까운 곳에서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이자겸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칼 밥을 먹고 살아가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은 환자들에게는 북망산과 다를 바가 없네. 당장 내일 아침에 청수곡(淸水谷)으로 출발을 할 것이니 자네는 마차부터 빨리 구해 주게나.”
약선이 그리 말하니 나웅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나웅은 잠시 애틋한 눈으로 독고혜를 응시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이자겸은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검후의 곁으로 다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이냐. 함께 강호로 나온 네 오라버니는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이냐. 허어…….”
이자겸과 독고무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