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귀환무사 61화>
또르륵!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입맛이 싹 가셔 버린 진유는 젓가락을 손에서 놓았다. 더 먹었다간 급체라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무심결에 혁련천후를 돌아보던 담대소천이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전음을 날렸다.
[주공!]
혁련천후가 고개를 들어 담대소천을 바라본다.
[손에서 피가…….]
“……!”
혁련천후는 즉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난밤에 복수를 하면서 입은 부상이었다.
‘흔적을 남겼으니 내가 돌아왔음을 다른 자들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나를 잡기 위해 움직이거나 그 반대로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들겠지. 너희들이 어떻게 나오건 간에 복수는 계속될 것이다.’
일부러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추락을 지켜보았던 자들은 자신이 살아서 돌아왔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혼란 속에서 하나하나 천천히 죽어 가게 될 것이다.’
팍!
손에 쥐었던 젓가락이 가루로 화해 사라졌다.
[주공!]
담대소천의 전음에 혁련천후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깨닫고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정도맹의 본관 쪽을 돌아보았다.
곧 있으면 대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정도맹의 입장에선 죽어선 안 될 존재가 죽었다.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정도맹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그게 끝이 아니다.
어쩌면 영웅 대회가 끝나기 전에 또 한 명이 죽게 될 것이다.
그 또한 죽어선 안 될 거물이다.
그들을 죽인 것이 자신이라 알려지면 자신은 천하와 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이니까.
문득 눈빛이 흔들린다.
저 어딘가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그리고 죽여야 할 복수의 대상도 있다.
또 하나의 목숨을 거두기 전에는 그녀를 찾아갈 수 없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서이다.
‘나를 용서해라. 혜매…….’
* * *
둥! 둥! 둥!
북소리가 꿈의 향연, 영웅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각파의 수장들과 초청되어 온 귀빈들이 돌아가며 인사의 말을 전하고 맹주 나백이 개최를 선언하자 정도맹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화산은 단체전에서 가장 마지막 조에 편성되었는데 그 상대가 남해검문이었다.
반면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개인전에 출전하게 된 모용단승은 세 번째 순서에 제법 강자로 소문난 점창파의 대표와 대전이 결정되었다.
‘이거 제법 떨리는데.’
화산의 출전자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진호는 긴장감을 지우려 노력했다.
자신이 흔들리면 두 사제들도 흔들릴까 두려워 애써 담담함을 비치며 간간이 미소도 머금었다.
출전자들은 따로 마련된 장소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날그날의 대회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 자리를 비울 수가 없게 되어 있어서 혁련천후 등과는 떨어져 있어야 했다.
진명이 팔과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마지막에 걸렸습니다. 첫 판에 걸리기라도 했으면 상당히 어려울 뻔했습니다.”
“조 추첨이 개판인데 순서라도 괜찮아야지. 그나저나 남해검문이 독을 쓰며 달려들 가능성이 높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사형.”
남해검문은 검의 고수들이 많기로 유명한 문파다.
특유의 날카롭고 파괴력 높은 검법은 저 멀리 세외에까지 정평이 나있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에 화산파와 악연을 맺은 곳이니 셋은 더욱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사형이 한 방에 끝내 버리십시오.”
“가짜 사부님들이 너더러 선봉에 나서라고 했지 않느냐. 혹시 두려운 것이냐?”
“두렵긴요. 그냥 힘을 낭비할 필요 없이 제일 강한 사형이 상대편 셋을 꺾어 버리면 다음 회전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끝을 흐리는 진청. 진호와 진명은 그런 진청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진청이 가장 긴장한 기색을 비치고 있었다.
진호가 진명을 돌아봤다.
“네가 선봉을 할 테냐?”
“사양하겠습니다.”
“…….”
서로 미룬다. 진호와 진명도 진청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냥, 제가 선봉을 맡겠습니다.”
진청은 어쩔 수 없이 원래대로 자신이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진호가 진청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사부들과 수련을 한다고 생각하자!”
“예. 까짓것 죽기야 하겠습니까.”
긴장감을 몰아내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을 노려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화산과 오늘 마지막 대결이 예정된 남해검문의 출전자들이었다.
잘 벼른 칼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를 지닌 그들 중에는 지난날, 객잔에서 시비가 붙었던 남해검문의 후계자 전진도 섞여 있었다.
단체전이 아닌 개인전에 출전을 하는데, 화산파의 검수들을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내가 책임질 테니 어떤 놈이든 반쯤 병신을 만들어도 좋다.”
전진의 말에 다른 청년이 거들고 나섰다.
“대사형이 책임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사고라고 하고 팔 하나쯤 잘라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그것도 괜찮지.”
전진은 남해검문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상당히 준수한 용모를 지닌 청년이 앉아 있었다.
백색 무복에 영웅건을 머리에 두른 청년들은 가슴에 백(白)자를 수놓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오대세가의 한곳인 백리세가의 출전자들이었다.
유난히 짙은 눈썹에 맑은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 남해검문의 출전자들을 응시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상대를 해칠 생각부터 하다니, 역시 소문대로 흉흉한 자들이군.”
백리초라는 이름을 지닌 그는 백리세가의 대공자로서 당금 후기지수들 중 최강자군에 들어가는 청년 고수다.
“화산이 과연 저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겠느냐. 보아하니 참가에 의미를 둔 듯한데, 검공에 있어서는 중원의 그 어떤 문파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남해검문이 청년 고수들 중에서도 최정예를 출전시켰으니…….”
백리초는 회의적은 시각으로 화산파를 응시했다.
“그저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겠지.”
“저들은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자들입니다. 색깔만 정파지 하는 짓들은 사마의 무리들과 다를 바가 없는 곳이 남해검문이 아닙니까.”
백리초의 동생인 백리관이 못마땅한 눈으로 남해검문의 출전자들을 응시했다.
마침 그들 중 한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 우리더러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대뜸 도발적으로 나오자 백리관의 눈썹이 역팔 자로 휘어졌다.
“뭐야? 그 말투는! 지금 우리하고 한판 해 보겠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백리초가 백리관을 짐짓 나무랐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저 자식 주둥이가 너무 거칠지 않습니까!”
“그만하래도!”
백리초가 언성을 높이자 백리관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런 백리관의 입술이 계속해서 달싹거렸다. 전음으로 설전을 계속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함성이 울렸다.
“와! 드디어 시작한다!”
모두의 고개가 연무장의 비무대를 향해 돌아갔다. 소림사와 청성파의 출전자가 막 첫 대전을 시작하려 올라서고 있었다.
꿀꺽!
너 나 할 것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 * *
웅성웅성!
소림사와 청성파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
소림사의 첫 출전자인 무승(武僧) 광한이 세 명을 연이어 물리치면서 청성파는 보따리를 싸야 했다.
곳곳에서 역시 소림사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소림사가 소문보다 더한, 압도적인 전력으로 청성파를 꺾자 다른 문파의 출전자들은 단단히 긴장했다.
“역시 소림입니다. 가장 약해 보이던 놈이 상대를 모조리 쓸어버렸습니다.”
왕전이 혀를 내둘렀다.
혁련천후는 잠시 비무대를 응시하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용단승이 홀로 앉아 있었다. 개인전에 출전을 한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다지 긴장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관산악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예상대로 저놈만큼은 그다지 긴장을 하지 않는군요. 대진운만 좋다면 꽤나 큰 성과를 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후후후.”
그때 모용단승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혁련천후에게로 다가왔다.
꾸벅!
머리를 조아리는 그에게 혁련천후는 물었다.
“어딘가에 너의 누이도 왔을 것이다. 헌데도 끝까지 신분을 숨길 생각이냐?”
“스스로 만족할 성적을 내기 전엔 밝힐 수 없습니다.”
그랬다.
모용단승은 출전 등록을 할 때, 모용세가 출신이라는 것을 숨겼다. 그 바람에 예선전을 치러야 했는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 전에는 절대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일회전에서 탈락하면 누이와 세가의 사람들이 상심을 할까 염려해서다.
“잘해 봐.”
“예.”
대답을 하는 모용단승의 얼굴은 꽤나 담담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속내는 절대 그렇지 못했다.
강해지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그다. 강해진 자신을 누나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단체전에 출전하는 세가의 무사들에게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안겨 주고 싶었다.
혁련천후는 왕전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겠느냐.”
“처음부터 우승 후보만 만나지 않는다면 삼 회전 이상까지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
모용단승의 낯빛이 변했다.
삼 회전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니. 그 스스로는 이 회전만 통과를 해도 만족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개 같은 성질처럼만 하면 우승이라고 못할까. 흐흐!”
관산악이 히죽 웃으며 농을 건네자 모용단승은 머리를 긁적였다.
흑야가 한마디 건넸다.
“몸은 좀 풀었느냐?”
“아침에 맹의 뒷산을 세 번 오르고 내렸습니다.”
“쫄지 마라. 너희 같은 애송이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예.”
모용단승은 흑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며칠 전부터 그에게 특훈을 받은 까닭에 꽤나 친해져 있었다.
그때였다.
둥! 둥! 둥!
“개인전을 시작하겠소!”
북소리와 함께 개인전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단체전이 벌어지는 비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비무대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 위로 두 명의 청년들이 바람처럼 내려서고 있었다.
꽉!
모용단승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