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귀환무사 60화>
“그리고 시신을 찾지 못해서 항상 불안했었네. 언제 어디서 자네의 칼이 날아들지 몰라서 말이야. 한데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그래. 이렇게 다시 그대를 죽일 기회가 주어졌으니 말이네.”
“더 이상 당신에게 기회는 없소.”
혁련천후는 싸늘히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노인도 미소를 머금었다.
“암습을 했더라면 나를 죽일 수 있을 확률이 조금은 더 컸을 텐데…… 왜 그러지 않은 겐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
“…….”
혁련천후는 천천히 검을 들어 노인의 미간을 겨누었다.
“내가 암습을 하기로 마음을 먹을 때가 있다면 그건 하늘을 죽일 때나 그럴 것이오.”
노인의 눈빛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그러더니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말장난은 그만하고 이제 그만 끝을 보세나.”
노인의 검이 불을 뿜었다.
동시에 혁련천후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불꽃을 잘라 버렸다.
* * *
구천각주의 거처.
그곳에 각주 명수진인과 그의 사제 명보, 그리고 준수한 용모를 지닌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연신 껄껄 웃는 둘과는 달리 청년은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흔들리는 촛불만을 응시했다.
명수진인이 그런 청년을 향해 말을 건넨다.
“준비는 잘되었겠지?”
“예, 사숙.”
“사문의 향후 십 년이 네게 달렸음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건 이 사숙이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그저 우승을 할 생각만 하면 되느니라. 알겠느냐.”
“…….”
청년이 대답을 하지 않자 명보진인이 눈짓으로 나무란다.
“어허. 어찌 대답이 없는 것이냐.”
“솔직히 저는 사숙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명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영웅 대회는 젊은 무사들이 꿈을 겨루는 신성한 전장입니다. 헌데 조 추점을 조작하시다니요. 소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뭣이!”
명수진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명보진인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그따위 소문은 어디서 들었느냐!”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소질은 알고 있습니다. 하니 지금이라도 조 추점을 다시 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 소질, 대회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청년은 단호했다.
크게 놀라 하던 명수진인의 얼굴이 휴지처럼 일그러지더니 이내 언성을 높인다.
“네 이놈! 말하는 모양새가 어찌 그 모양이냐? 이 모든 것이 사문을 위한 것임을 왜 모르는 것이냐!”
“대의를 위해 살고 죽으라는 조사님의 유훈과 어긋나는 것이 어찌 사문을 위한 것이라 하십니까? 소질은 사숙님의 그와 같은 말씀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와당탕!
청년이 벌떡 일어서면서 찻잔이 넘어졌다.
“냉큼 앉지 못하겠느냐!”
“용서하십시오, 사숙.”
청년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저놈이…….”
노기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명수진인, 지켜보던 명보가 황급히 그를 위로했다.
“젊은 혈기에 미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니 그만 노여움을 푸십시오, 사형.”
“대체 네놈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하나같이 저 모양인 게냐? 하나라도 제대로 된 놈이 없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이런 고약한!”
쾅!
탁자가 박살이 나 버렸다.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명수진인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방금 뛰쳐나간 청년은 차기 무당의 미래라 불리는 기재 중의 기재였다. 무당을 대표하여 이번 영웅 대회에 참가를 했다.
그가 무당파에 우승을 안겨 주리라 크게 기대하고 있었던 명수진인으로서는 청년의 행동에 실망감을 넘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맹에 들어온 제자들 중 저놈을 대신하여 출전할 아이가 있느냐?”
“고정하십시오, 사형. 어찌 저 아이를 두고 다른 아이를 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닥쳐라! 사문의 뜻을 어기는 놈을 어찌 대표로 정할 수 있다는 말이냐? 당장 숙소로 가서 쓸 만한 아이를 대신 출전자 명단에 넣도록 해라!”
명보진인은 더 나서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분을 삭인 명수진인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만큼은 화산의 싹을 단단히 밟아 버려야 한다. 너는 순우호법과 당문의 사람들을 만나 다시 한 번 계획을 맞추도록 하거라!”
“예, 사형.”
명보진인이 물러갔다.
혼자 남은 명수진인은 도저히 분을 삭일 수 없었던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오냐! 네놈이 정녕 그렇게 나온다면 내 어찌 네놈에게 무당을 맡길 수 있겠느냐! 대회가 끝나고 사문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을 다시 정할 것이야! 괘씸한 놈!”
그날 밤, 명수진인은 끝끝내 분을 삭이지 못하고 뜬눈으로 날밤을 새워야 했다.
* * *
“썩었어. 아주 고약한 악취가 사문을 진동해!”
퍽!
도량은 바닥에 박힌 돌멩이를 걷어차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문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사문은 눈에 띄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특히 명수진인의 독단에 가까운 태도는 도를 지나쳐 사문의 제자들에게마저도 원성을 사기에 이르렀다. 승리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를 떠올리니 도저히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당장 영웅 대회도 그랬다.
정도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대진표 조작이라는 부정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그것을 항의하는 자신에게 사문을 위함이라는 궤변에 가까운 당위성을 역설했던 그를 떠올리니 화가 나는 것을 넘어 슬프기까지 했다.
‘이건 아니야.’
협과 의를 목숨처럼 여기며 살라는 조사의 유훈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온 자신에게 이번의 사태는 치욕이나 다름이 없었다.
“휴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짙은 한숨을 내쉰 도량은 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희미한 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
달빛을 받은 그는 자신을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뒤이어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전신을 압박하고 들자 도량은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에 전신을 휘청거렸다.
“헉!”
내공을 끌어 올려 대항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점점 의식이 흐릿해지자 도량은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절망감에 휩싸였다.
“사, 사부님…….”
털썩!
맥없이 쓰러지는 도량. 그런 도량의 육신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혁련천후였다.
분노로 일렁거리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흔들리더니 입술을 뚫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진…….”
그는 쓰러진 도량에게서 십 년 전, 자신에게 패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무당의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도량은 그와 너무나도 흡사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전신에서 발산되던 가공할 기운이 사라지자 뭔가에 강하게 옥죄이던 도량의 눌렸던 육신이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혁련천후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성 하나가 꼬리를 물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십 년 전의 어느 날에도 유성이 떨어졌었다.
그리고 그날, 명진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무당파의 최고 기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미 너를 용서했다. 모든 것은 네가 아닌 추악하고 더러운 네 사문의 늙은이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린 혁련천후는 가볍게 지풍을 날렸다.
타타탁!
도량의 몸이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눈을 떴다.
벌떡 일어선 도량은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위를 덮은 어둠뿐이었다.
“귀, 귀신이었나?”
* * *
날이 밝았다.
영웅 대회를 축하라도 하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았다.
대회 개최를 위해서 두 배 이상으로 넓힌 연무장의 주변에는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구파나 오대세가, 그리고 나름 유명한 문파는 가장 좋은 곳에 이미 자리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외의 문파는 사정이 달랐다.
그야말로 먼저 않는 사람이 임자인 까닭에 저마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다.
서로 좋은 자리를 놓고 식사도 거른 채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혁련천후 일행들은 화산에 배정된 좌석이 있었던 탓에 자리 걱정 없이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식당의 한쪽에 자리 잡은 그들은 맹에서 내어놓은 식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군. 이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명절에도 먹지 못할 진수성찬이 아니냐?”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라는 소문이 헛말이 아니었군.”
담대소천만은 낯빛이 그리 밝지 못했다.
십만 대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었던 자신도 지금껏 이러한 식사는 해 본 적이 없었다.
한데 그의 입장에서 하찮은 백성에 불과한 무림맹의 호화스러움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관산악이 심드렁하니 중얼거린다.
“땀을 흘리며 수련을 해야 할 놈들이 배에 기름기만 잔뜩 처바르고 있으니 뭐가 제대로 되겠냐. 하여간에 여기부터 단단히 버르장머리를 고쳐 줘야 한다니까. 쯧쯧쯧.”
“마교와 사련에서 초청되어 온 사람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이렇게 차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유의 말에 관산악이 그를 보며 물었다.
“그쪽에서는 누가 왔느냐?”
“마교에서는 장로 두 명과 청년 둘이 왔고 사련에서는 열 명 정도가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서 넙죽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왕전이 히죽거리며 놀리듯 말하자 관산악이 젓가락으로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눈을 부라린다.
그때 왕전이 진유를 보며 물었다.
“네가 화산에서 제일 강하다며?”
젓가락을 집어 돼지고기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가던 진유는 자칫 목에 사레가 들 뻔했다.
왕전의 눈빛이 지나치게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급히 물을 마신 진유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저 소문일 뿐입니다.”
“그 나이에 벌써 초절정을 밟았다고 하던데. 기회가 되면 나중에 비무라도 한번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옛?”
진유는 화들짝 놀랐다.
감히 누가 전왕과 비무를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왕전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요즘 들어 절정이니 초절정이니 하면서 무공의 수준을 정하려 들던데, 사실 그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흐흐흐.”
관산악이 끼어들었다.
“너를 이기면 뭐로 분류가 되냐?”
“…….”
진유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만약 전왕과 자신이 격돌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