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59화 (59/425)

# 59

<귀환무사 59화>

“대전 순서는 어떻게 합니까?”

단체전은 승자연전 방식이다.

관산악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으로 셋을 일일이 가리켰다.

“너! 너! 너!”

진청과 진명, 진호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단체전은 순서도 제법 중요했다. 가급적 가장 강한 고수가 뒤쪽에 배치되는 것이 옳았다. 당연히 진호가 셋 중 가장 강했기에 마무리로 결정되었다.

밖에 서 있었던 청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장문 사형과 장로님들이 오십니다.”

곧이어 태허와 장로들이 들어섰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혁련천후는 앉은 자세로 그들의 예를 받았다. 왕전을 비롯한 이들에게도 가볍게 예를 취한 그들은 자리에 앉으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거처가 너무 좁고 누추해 송구합니다.”

“한번 장원으로 찾아뵌다는 것이 대회 준비 때문에 미처 그러질 못했습니다, 사숙.”

모두가 혁련천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진유는 오지 않았소?”

그러고 보니 매화무적 진유가 보이지 않았다.

“진유는 지금 조를 추첨하는 곳에 갔습니다. 끝나는 대로 곧장 달려올 것입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신분은 속가제자로 할 것이니 내일부터는 머리를 숙이지 말고 하대로 나를 대하시오.”

태허가 눈을 동그랗게 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왕전이 두 주먹을 잡아 보이며 허리를 숙였다.

“왕전이 장문 사형을 뵙습니다. 뭐, 이렇게 하면 되는 거요?”

“아, 예.”

태허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태허를 비롯한 장로들은 가슴이 뿌듯했다.

천하를 떨어 울리는 존재들, 그들이 화산과 함께하고 있었다.

덜컥!

“술과 음식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청명이 양손에 술과 음식을 가득 들고서 나타났다.

술을 본 왕전과 관산악의 눈이 초롱초롱 빛을 발한다.

잠시 후, 진유가 들어섰다.

꾸벅 머리를 조아리는 진유의 표정이 썩 밝지가 못했다.

왕전이 슬쩍 물었다.

“조 배정이 지랄같이 나온 모양이군. 그런 거냐?”

“……최악의 조에 들었습니다.”

“최악의 조라니?”

진유가 냉수를 한 그릇 마시고는 분을 삭이며 말을 이었다.

“황보세가와 형산파, 그리고 남해검문이 우리 조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무당이나 다른 오대세가들보다는 쉬운 곳이잖아. 그런데 왜 최악의 조라고 호들갑을 떠는 거냐?”

진유의 말이 이어졌다.

“첫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그다음이 문젭니다. 반대편에서 올라올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 단리세가인 데다, 그다음은 또 사천당가와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화산파의 모두가 낯빛이 굳어졌다.

혁련천후가 물었다.

“당문까지 넘는다면?”

그것까지 생각조차 안 했던 진유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이변이 없는 한, 소림사가 될 것 같습니다.”

소림사라는 말에 모두가 다시 굳어졌다.

구대문파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모두에게 중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별히 나쁠 것도 없으니 다를 쉬도록 해.”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옆방으로 건너갔다.

왕전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옆방으로 건너가자 진유는 잔뜩 굳어 버린 사제들을 돌아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차피 쉬운 상대는 없다. 차라리 우리와 견원지간인 그들을 꺾는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지 않겠느냐! 하니 다들 힘을 내자꾸나.”

셋은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셋의 어깨를 두들겨 준 진유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한 분은 처음 뵙는 분이던데?”

관산악을 두고 물어본 것이다.

진호가 대답했다.

“얼마 전에 사숙조를 찾아오신 관산악이라는 분이십니다. 저희들도 그 이상은 잘 모릅니다.”

진호는 차마 그가 마교의 흑영대주임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산악이라는 이름은 그보다 진유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흑영대주!”

놀라기는 장문인 태허를 비롯한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관산악은 정도맹이 요주의 인물로 꼽는 적들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혁련천후와 함께하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유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더 놀라야 하는 건지.”

“헤헤! 굉장히 재밌고 좋은 분이십니다. 저희들에게 무척 잘해 주시는걸요.”

청명이 해맑게 웃는다.

태허가 신중한 어조로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그저 사숙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니 신분이 밝혀지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혼란이 생길 것이니 그 점만 유의토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의를 시킨 태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나같이 거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한 명만도 화산 전체와 맞먹는 존재들, 태허는 그들이 과연 화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우당탕탕!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문짝이 뜯겨 날아갔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설 때, 누군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모용단승이었다.

“헉! 헉! 등록하러 왔소!”

제4장 첫 번째 복수

광활한 규모를 자랑하는 정도맹의 북쪽.

다른 곳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그곳은 정도맹에서도 수뇌부들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휘이잉!

전각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바람 소리가 음산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 달빛을 받은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졌다.

북쪽 전각을 향해 걸어가는 그림자는 바로 혁련천후였다.

도대체 어디를 왜 가는 것일까?

살기마저 머금은 두 눈은 북쪽 전각의 맨 위층, 불이 켜진 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발, 두 발, 걸을 때마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변해 갔다. 그렇게 전각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뺨을 깊숙이 파고든 검흔(劍痕)을 만지작거리며 싸늘히 중얼거렸다.

“결코 잊지 않았다. 내게 첫 번째 검을 날렸던 당신을……. 그래서 당신이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이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지금 그는 첫 번째 복수를 하려 하고 있다.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살아서 돌아간 아홉 명의 고수들.

그중의 한 명이 바로 저 불이 켜진 방 안에 머물고 있다. 그가 영웅 대회 때문에 이곳을 찾는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부터 이날만을 기다려 왔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을 찾는 것조차 미루고 정도맹으로 입성했다.

죽여야 할 대상은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배경에 강한 무공을 지녔다. 거기에 위선으로 무장된 인격까지 갖추고 있어 맹주 나백보다 더한 존경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휘이잉!

잠잠했던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떨어진 낙엽이 회오리처럼 허공으로 치솟을 때, 혁련천후도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차의 향을 음미하는 노인의 얼굴이 매우 평화로워 보인다.

보기 좋게 생겨난 주름은 인생의 연륜이 그대로 묻어났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에 눈보다 더 흰 백발은 탄탄대로를 달려온 노인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맞은편에 앉은 날카로운 눈매의 청년이 빈 찻잔에 뜨거운 물을 따르며 공손히 입을 열자 노인의 입가에 한없이 따뜻한 미소가 걸린다.

“허허! 그렇게 보였느냐?”

“요즘 들어 부쩍 그렇게 보이십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지요.”

“내 나이 칠십을 넘었으니 피곤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나저나 출전 준비는 잘했느냐?”

“오늘 오전에 등록을 마쳤습니다. 다행히 조 편성이 좋아 초반 대진은 쉽게 풀어 갈 수 있을 듯합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어쨌든 크게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그저 수련이라 여기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예, 사부님.”

노인은 청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줘 버린 제자를 볼 때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오순이 넘어서 거둔 제자였지만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하게 성장을 해 준 덕분에 인생의 황혼이 너무나도 행복할 뿐이었다.

더 오랫동안 제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럴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노인은 가슴이 저렸다.

“오늘 여러 사람을 만났더니 피곤하구나. 허니 너도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여라.”

“허면 제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사부님!”

청년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피곤하다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걸어 두었던 검을 손에 쥐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노인의 뇌리에는 처절한 미소를 머금으며 절벽으로 추락하던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파르르…….

눈이 내려앉은 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진정 살아서 돌아왔단 말인가.”

노인은 며칠 전에 누군가가 보낸 한 장의 서찰을 받았다.

-놈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소.

전서의 내용은 지극히 짤막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저승사자의 사망 선고만큼이나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결코 살아서 돌아오면 안 되는 존재, 그의 귀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휘이잉!

바람에 의해 흔들린 창문에서 딸깍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노인의 눈동자에 섬광이 맺히고 뒤이어 찻잔에 담겼던 물이 동그랗게 응축이 되더니 그대로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깡!

금속음이 울렸다.

물방울과 검이 부딪히며 만들어 낸 소리였다.

“오랜만이오.”

싸늘한 음성이 노인의 뒤에서 흘러나왔다.

혁련천후의 얼굴을 확인한 노인은 뜻밖에도 담담함을 유지했다. 그러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서가 경고했던 그가 기어코 자신의 앞에 나타나고야 말았다.

“역시 살아 있었군.”

“죽을 수가 없었지. 당신들 때문에…….”

가늘게 흔들리던 노인의 눈빛이 천천히 본연의 깊이를 회복하였다.

“살아 있다면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었네.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 늘 생각하며 십 년을 살아왔지.”

스르릉!

검이 뽑아지며 서늘한 광채가 실내를 비추었다.

자신의 검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에 짙은 회한이 어렸다.

“후회했었지. 실패한 인간 사냥을…….”

싸아아!

실내에 싸늘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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