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귀환무사 58화>
“주모님 때문에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이시는데…….”
“그러게 말이다. 참, 내가 목숨처럼 여기고 따르는 분이시다만 당최 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나 같으면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분부터 찾아갔을 텐데 말이다.”
모두가 수긍했다.
누구라도 혁련천후와 같은 처지라면 사랑하는 여인부터 찾아갔을 것이다. 하물며 보통 여인이 아닌 천하제일 미녀가 아닌가.
담대소천이 청룡언월도를 손에 쥐면서 일어섰다.
“우리하고는 생각부터가 다른 분이시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이놈들 수련이나 시키자.”
“다 먹었으면 다시 죽어 봐야지?”
“예!”
대답을 하는 모두의 얼굴에서 결기가 넘쳤다.
영웅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 *
천하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무림맹 주변의 모든 도시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평소엔 손님을 잡기가 어려웠던 어수룩한 객잔들도 방이 없어 임시로 천막을 치고 손님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각파의 출전자들은 이미 정도맹에 마련된 숙소에 든 상태였고 대부분은 마지막 수련을 통한 기의 조절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는데, 진호를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정도맹 인근의 작은 객잔에 모두 모여 있었다.
셋은 잔뜩 굳은 채였다.
영웅 대회가 당장 내일로 다가오자 지금까지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긴장감에 입맛조차 뚝 떨어졌다.
왕전이 그들을 보며 히죽거렸다.
“자식들! 제대로 얼었군.”
혁련천후를 비롯한 일행들 모두는 변장을 하고 있었다.
화산의 검수들이 입는 무복에다 장포를 걸치고 있어서 누구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장문 사형께서 서찰을 주셨습니다.”
청진이 객잔을 들어서며 혁련천후에게 서찰을 건넸다.
[객실을 두 개밖에 얻어 내질 못했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오늘 밤부터 객실을 이용하실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무당과 다른 문파들의 농간으로 조 추첨이 어쩌면 어렵게 놓일 수도 있겠습니다. 힘은 써 보겠지만 아마 어려울 듯합니다. 저희들은 본관 뒤쪽에 마련된 구파의 숙소에 머무르고 있으니 맹으로 들어오시면 곧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태허.]
서찰의 내용을 읽은 혁련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당의 농간이라는 문구가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슬쩍 서찰을 훔쳐 본 왕전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다.
“하여간에 저것들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니까. 나중에 당가 말고 무당부터 박살을 내 버려야겠습니다.”
“보나 마나 화산에 감정이 좋지 않는 놈들과 한 조에 넣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다. 그래도 정작 현실로 다가오니 진청을 비롯한 셋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졌다.
담대소천이 그들을 보며 특유의 묵직한 어조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놈들이다. 차라리 초장에 만나 꺾어 버리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구파와 오대세가의 출전자들은 역사상 최강의 진용을 꾸렸다고 했다.
특출 난 강자들은 모조리 개인전에 몰리는 바람에 단체전에만 출전하는 화산파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놈이 늦습니다. 이러다가 출전 못하는 것 아닙니까?”
탁철과 모용단승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영웅 대회 출전에 강한 열망을 지닌 모용단승임을 생각하면 뭔가 사고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전에 등록을 해야만 출전이 가능한데 지금껏 나타나질 않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다.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기다려 보자. 곧 오겠지.”
“그래. 기어서라도 올 놈이지 않느냐.”
담대소천과 흑야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빛이다.
그들은 모용단승의 집념을 믿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팔짱을 하고 눈을 감았다.
‘오겠지.’
그는 모용단승의 눈빛을 떠올렸다.
언제나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 그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지난날, 자신 또한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올 것이다.
눈을 감았지만 화산 제자들의 뛰는 심장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사문을 위해 좋은 성적을 내고자, 의지를 불사르는 저들이 좋았다.
창밖을 보니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지.”
혁련천후가 일어섰다.
화산의 검수들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정도맹에 입성한다.
꿈에 그렸던 영웅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
* * *
홍무는 혼자서 장원을 지켰다.
자신도 일행들을 따라 영웅 대회를 가고 싶었지만 찾아올 사람들이 있다며 남아 있으라는 관산악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 장원을 지켜야 했다.
홍무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봤다.
살문으로 돌아가지 않은 자신의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자신이 삶의 목표로 삶았던 우상, 흑야가 이곳에 있으니까.
그와 함께라면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었다.
“……!”
홍무의 눈이 번뜩였다.
밖에서 흘러든 기척에 살수 본연의 습성대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장원의 어두운 곳에 몸을 은신한 홍무는 소리 없이 검을 뽑아 들고는 눈빛을 번뜩였다.
어둠이 내린 연무장으로 그림자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어서 홍무의 능력으로는 성별조차 가늠이 불가능했다.
장원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는 셋을 지켜보던 홍무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눈빛이 흔들렸다.
‘고수다.’
맨 뒤쪽에서 걸어오는 인물.
그에게서 발산되는 기운은 어제까지 이곳에서 함께 지냈던 괴물 같은 존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적이라면 자신은 죽는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자신은 발각되었을 수도 있다. 반응이 늦었으니까.
‘하필이면 이럴 때…….’
위기감에 입술을 지그시 깨문 홍무는 여차하면 달려들 준비를 마쳤다. 도주가 불가능하다면 싸우다가 죽을 결심을 했다.
그때였다.
장원을 향하던 셋이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홍무는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는 절망했다.
‘빌어먹을!’
걸린 것이다.
“나오너라.”
차가운 목소리가 홍무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내공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상대는 예상보다 더한 고수였다.
홍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뉘시기에 남의 집을 함부로 침입한 것이오!”
스슥!
홍무는 눈앞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림자는 코앞에 나타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뻗었다.
깡!
홍무의 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살수 나부랭이였군.”
척!
홍무의 목에 싸늘한 뭔가가 닿았다. 애써 눈을 내리깔아 보니, 보기에도 섬뜩한 창이 목젖을 누르고 있었다.
“누군데 여기 있는 거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갔소?”
뒤쪽에 섰던 둘이 다가왔다.
탁철과 모용단승이었다. 창으로 홍무를 제압한 이는 객잔에서 만난 창잡이 사내였다.
“나, 나도 여기서 사는 사람이오.”
탁철과 모용단승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홍무가 사로잡히기 전에 혁련천후의 심부름을 나섰던 그들이라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홍무가 말을 이었다.
“나는 흑야님의 수하요. 그분들은 지금 영웅 대회 때문에 정도맹에 가셨소. 그러는 당신들이야말로 신분을 밝히시오!”
스슥!
홍무의 목에 닿았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졌다.
탁철이 눈을 부릅뜨며 모용단승을 돌아본다. 모용단승의 얼굴이 휴지처럼 일그러졌다.
그만 영웅 대회를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지금 당장 날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
휘익!
모용단승이 바람처럼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탁철이 그런 모용단승을 보며 혀를 찼다.
“인사라도 하고 가면 어디가 덧나나? 하여간에 성질머리하고는.”
창을 든 사내가 물었다.
“덩치, 너는 참가하지 않느냐?”
“저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굳이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탁철. 홍무는 그런 탁철과 창을 든 사내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때 창을 든 사내가 물었다.
“술 좀 있느냐?”
“아, 예.”
“먹을 것도 좀 가져와라.”
“그런데 누구신지…….”
홍무의 물음에 탁철이 대신 대답했다.
“창왕 조윤 대협이오!”
“힉!”
홍무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창왕(槍王) 조윤(趙倫).
누가 그 이름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혁련천후의 다섯 번째 수하였다.
* * *
정도맹이 화산에 배정한 거처는 다른 곳에 비해 턱도 없이 좁았다.
다른 구파나 오대세가에게 배정된 객실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화산의 입지가 보잘것없음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진호를 비롯한 제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렇게 열악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객잔에 투숙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제자들의 속내를 짐작한 혁련천후가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왕전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러질 못했다. 자신들이야 상관없었지만 혁련천후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사실 배분을 따져 보면 정도맹주가 맨발로 뛰어나와 자신의 거처를 내놓아도 시원찮을 자신들의 주인이다.
“무조건 우승해라. 그래야 이런 푸대접이 없을 것 아니냐?”
왕전의 말에 진청 등은 머리를 숙였다.
사실 혁련천후를 비롯한 왕전 등은 맹 내의 거처를 사용할 수 없는 자격으로 봐야 한다.
그들이 신분을 밝혔다면 물론 귀빈 대접을 받았겠지만 화산의 속가제자들로 등록했으니 일반 무사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사문이 힘이 있었더라면…….”
진호는 송구함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너희는 젊다. 시간이 많으니 다시는 사문의 힘을 탓하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담대소천이 나섰다.
“호칭을 바꿔야 합니다. 사숙조라고 하면 모두가 주공을 쳐다보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신분을 감추어야 했으니 호칭 또한 바꾸어야 한다.
혁련천후처럼 어린 사람을 사숙조라고 부르면 대번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된다.
“사형이라고 불러라.”
“알겠습니다, 사형!”
왕전이 히죽거리며 대뜸 사형이라 불러본다.
하긴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그렇게 불러 보겠는가.
화산 제자들은 내심 신이 났다. 사형이면 화산의 신분임을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와 같은 사문임을 새삼 느낀 그들은 괜히 움츠렸던 마음이 살아나는 느낌마저 받았다.
진청이 조심스럽게 묻고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