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귀환무사 57화>
뒤를 돌아보니 복면인이 보이지 않았다.
숲이 우거진 까닭에 그를 따돌린 모양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사공진무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얼마를 더 달렸을까?
“뭐지?”
전방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흠칫 놀라며 속도를 줄였다.
그때였다.
협곡의 끝머리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공진무의 낯빛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둘 다 엄청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고수다. 멈추면 당한다.’
청년 하나와 초로의 노인이었다.
특히 쇠꼬챙이처럼 말라비틀어진 노인은 마치 잘 벼려 놓은 칼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정상적인 상태라도 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사공진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보시오, 부처님. 제발 검후님을 무사히 정도맹으로 가게 해 주시오. 아니면 내 주인이 당신을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오.’
사공진무는 남은 내공을 모조리 다 끌어 올렸다.
그리고 품속에서 몇 개의 구슬을 꺼내 들고는 벼락 같이 손을 뻗었다.
‘고수라면 피하지 않을 거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청년과 노인은 빛살처럼 날아가는 구슬들을 보면서도 피할 생각이 없는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펑!
날아가던 구슬이 둘의 근처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시뻘건 연기가 순식간에 협곡을 가득 채우며 피어올랐다.
동시에 사공진무는 막대기 몇 개를 던졌다.
주변이 일렁거리며 협곡이 전혀 다른 환경으로 바뀌어갔다.
“요상한 재주를 부리는군.”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강력한 강기가 환경이 바뀐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사공진무를 향해 벼락처럼 날아갔다.
사공진무의 등이 사라질 즈음에 강기가 폭발을 일으켰다.
쾅!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 현상과 함께 바뀌었던 환경이 원래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공진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준수하기 짝이 없는 청년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후후! 천하에 내 손을 벗어날 자가 있을 줄은 몰랐소. 사부!”
“지금이라도 쫓으면 잡을 수 있소이다. 소성주.”
쇠를 긁는 듯 거슬리는 목소리가 노인에게서 흘러나왔다.
노인의 시선은 북쪽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
청년도 같은 곳을 쳐다보며 갈등하는 기색을 비쳤다.
“늦으면 더 이상 방법이 없소, 소성주.”
“그만 돌아가시지요, 사부.”
“검후를 원한다고 하지 않으셨소?”
“놈의 경공이라면 우리가 따라잡기 전에 정도맹의 권역에 들어설 겁니다. 여인 때문에 정도맹과 전쟁을 치를 순 없지 않겠습니까.”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노인은 그런 청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조윤을 찾지 않고 그냥 돌아갈 요량이시오?”
“이 넓은 세상에서 그를 어떻게 찾겠습니까? 인연이 된다면 나중에 또 보게 되겠지요.”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외다. 하늘같은 성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떠난 놈을 어찌 인연이라 하시오?”
“인연과 악연이 차이가 커 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저 마음먹기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사부.”
노인은 더 말하지 못했다.
제자이되 미래의 주인이 될 청년은 한번 고집을 부리면 하늘조차 꺾지 못한다.
그때였다.
둘의 앞에 복면인이 내려섰다. 사공진무를 쫓아왔던 바로 그 복면인이었다.
“소종사!”
복면인은 청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노인의 두 눈에 살광이 번뜩였다.
“그 많은 놈들로 먹잇감을 이곳까지 오게 만들다니.”
“하하하. 그만하십시오. 저와 사부의 손을 빠져나간 놈을 저들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청년이 말리고 나서자 복면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니었더라면 노인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노인은 무서운 존재였다.
청년이 복면인을 향해 말했다.
“실패했으니 뒤처리나 잘하시오.”
“금옥장이 뒤집어쓰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종사.”
복면인이 조아렸던 머리를 들었을 땐 이미 둘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휘이잉!
복면인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잠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 *
독고혜의 행적을 쫓아 정도맹을 향해 움직이던 혁련천후와 관산악은 백아산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던 까닭에 관산악은 혁련천후의 속내를 헤아려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물었다.
혁련천후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가(人家)라고는 하나 없는 외진 곳이었다. 그저 무성한 갈대숲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휘이잉!
강가라서 그런지 바람이 꽤나 거세다.
잠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섰던 혁련천후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관산악이 조심스레 묻는다.
“어디로 가시려고…….”
“장원으로 돌아간다.”
“예? 그럼 검후님은 어쩌시고…….”
혁련천후는 놀라는 관산악을 뒤로하고 걸음을 디뎠다.
관산악이 뒤를 따르며 그를 불렀다.
“주공.”
“정도맹으로 들어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서 그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가서 뵈어야지 않겠습니까?”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영웅 대회가 열리면 어차피 정도맹으로 가야 한다. 그때 봐도 늦지 않다.”
“…….”
관산악은 더 나서지 못했다.
말은 저렇게 담담하게 해도 그 속이 어떨지는 능히 짐작이 갔다.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따르던 관산악은 갈대밭을 헤치며 이동하는 자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를 좀 보십시오.”
혁련천후는 관산악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갈대밭의 옆에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청년과 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자들에게 물어볼까요?”
“뭘 말이냐?”
“혹시 검후님이 탄 마차를 봤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차가 관도를 놔두고 왜 저리로 가겠느냐. 그만하고 장원으로 돌아간다.”
휘익!
혁련천후가 경공을 펼쳐 까마득히 날아가자 관산악은 청년과 노인을 돌아보고는 이내 혁련천후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둘이 사라지는 것을 본 노인과 청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단한 경공입니다.”
“…….”
“하하하. 확실히 중원은 재밌는 곳입니다. 이런 외진 곳에서 벌써 세 명의 만만치 않은 고수들을 보게 되다니 말입니다.”
청년은 특유의 웃음을 터트렸지만 노인은 이미 까만 점이 되어 버린 혁련천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 *
장원의 마당에 모두가 모였다.
검후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 혁련천후 때문에 분위기는 제법 무거웠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무겁다는 것을 깨달은 혁련천후는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멀었습니다. 수십 년을 묵은 뒷간의 독을 빼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합니다.”
“키워 볼 생각이냐?”
혁련천후는 흑야를 보며 물었다.
차를 입으로 가져가던 흑야가 대답을 하려다 뜨거운 차에 입술을 데었다.
“저거 살수 맞냐?”
“그러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모두가 쳐다보자 그가 모두를 싸늘하게 노려본 후 대답했다.
“골격이나 눈빛, 그리고 인내심이 꽤나 괜찮은 놈입니다. 어차피 문파를 세우면 험한 일을 할 놈이 필요하니 제대로 한번 키워 볼 생각입니다.”
“살막이라는 곳에서 왔다고?”
“그곳에서는 알아주는 살수였답니다. 청부를 한 놈들을 물었으나 그것까지는 모르는 듯했습니다.”
“화산을 노렸겠군.”
자신을 노렸을 리 없었다.
돌아온 자신을 알아볼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얼굴을 바꾸었으니 당연했다.
혁련천후는 화산의 검수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련의 성과는 좀 있느냐?”
“조금 강해진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영웅 대회는 천하가 지켜보는 자리다. 사문의 명예가 너희들의 손에 달렸으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
고기를 씹던 왕전이 검수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문제는 내공입니다.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대결을 벌인다면 속전속결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혁련천후도 사실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공은 단기간에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담대소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금옥장이라는 곳을 한번 털어야겠군.”
“그거 묘안이다. 소문에 황궁 보고만큼이나 귀한 것들이 많다고 하던데, 영단쯤이야 넘쳐 나겠지.”
왕전이 눈빛으로 담대소천의 말에 응했다.
“도둑질로 강해질 수는 없다. 남은 기간 동안 부족한 내공을 대신할 만한 방법을 찾아봐.”
흑야가 대답을 하고 나섰다.
“이미 방법을 찾아 놓았습니다. 다만 저놈들이 견뎌 낼 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그의 말에 모두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강해진다는데 힘든 것이 문제일까. 어차피 지금까지의 수련도 참아 내었지 않은가.
진청이 대뜸 대답하고 나섰다.
“무조건 견딜 수 있습니다!”
“저도 견딜 수 있습니다!”
차례로 답을 하고 나서는 검수들에게 왕전이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흐흐! 좋았어. 저녁 먹고 바로 시작할 것이니 준비들 하고 있어.”
혁련천후는 그들이 찾아낸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왕전과 담대소천, 흑야 등을 믿었다.
타고난 전귀(戰鬼)에다 싸움꾼들이니 필시 적절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담대소천이 다른 말을 꺼냈다.
“이번 대회에는 마교와 사련의 인물들이 초청을 받아 참석한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거물급들이 참석할 테니 그중 하나를 잡아서 정보를 얻어 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괜찮겠지. 어차피 겨루어야 할 상대들이니 사전에 정보 정도는 얻어 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
“대회가 끝나고 놈들이 돌아갈 때 한 놈씩 잡아 오겠습니다.”
마교나 사련의 고수들을 지나가는 개쯤으로 여기는 태도에 화산의 검수들과 모용단승 등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가 일어섰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거처로 돌아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흑야가 중얼거리듯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