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귀환무사 55화>
‘문파의 영향인가.’
혁련천후는 그들과 화산의 제자들을 비교해 보았다.
일전에 보았던 화산의 제자들은 저렇듯 활기찬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었다.
쇠락한 사문의 영향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화산의 제자들을 떠올리니 기분이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둘은 저잣거리의 끝에 위치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워낙에 사람들이 많아서 빈자리가 있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둘은 구석진 곳에 앉았다.
술과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는 터에 객잔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혁련천후의 눈이 돌연 이채를 발했다.
한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 일전에 십지문에서 본 적이 있었던 모용미가 그곳에 있었다.
관산악이 물었다.
“아시는 사람들입니까?”
“모용세가의 사람들이다.”
“그렇습니까?”
관산악이 모용미와 그 일행들이 앉은 곳을 돌아보고는 히죽 웃었다.
“저 여자가 이번에 최초로 여인의 몸으로 세가의 주인이 되었다는 단승, 그놈의 누이군요. 얼음 자식과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그냥 모른 척해.”
“예? 놈을 찾아 나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알려 줘야지 않습니까?”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단승이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관산악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다시 물으려고 할 때 점원이 주문한 요리와 술을 가져왔다.
“강해질 때까지는 절대 세가로 돌아갈 놈이 아니다. 놈에게도 저들을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괜히 심란해져서 수련에 방해만 될 테니까.”
“예.”
둘은 서둘러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었다.
한참 먹을 때 관산악이 혁련천후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금옥장의 장주라는 놈은 가만히 내버려 두실 생각입니까? 소문에 놈이 끊임없이 검후께 혼사를 청하고 있다던데 말입니다.”
“죽이기라도 하자는 말이냐?”
“당연히 그래야지 않겠습니까? 감히 돈벌레 따위가 누굴 넘봐. 망할 새끼 같으니!”
당장에 달려갈 것처럼 들썩거리는 관산악. 혁련천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청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죄라면 세상에 남아날 사내가 몇이나 되겠느냐.”
“…….”
“다 먹었으면 그만 움직이자.”
혁련천후가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관산악은 그런 혁련천후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남은 술병을 품속에 갈무리하고 뒤를 따랐다.
반나절이 지났을 때, 혁련천후는 왕팔의 객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면서 이곳에 검후가 머물렀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관산악이 행적을 알아볼 요량으로 객잔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관산악이 밖으로 나섰다.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사흘 전에 객잔을 나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싸움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
아쉬움이 올라온다.
사흘 전에 떠났다면 이미 상당히 먼 곳까지 떠나 버렸을 것이다.
소문을 조금만 일찍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에 혁련천후는 좀처럼 돌아서지 못했다.
“개방의 지부를 찾아봐야겠다.”
“그들이 과연 그분의 행적을 알고 있을까요?”
“답답하니 기대를 해 볼 수밖에.”
“제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관산악은 다시 저잣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한 식경 정도가 지났을 때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개방의 지부가 있다고 합니다.”
“가지.”
휘익!
둘은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마침 주변을 걸어가던 상인 몇 명이 귀신을 보았다며 거품을 물었다.
* * *
따각! 따각!
제법 큼지막한 마차의 마부석에 십지신검 독고무와 신비 청년이 나란히 전방을 응시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약선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기별을 통해 그를 불렀으나 꽤 먼 곳에 위치한 고을에 있다는 답을 듣고는 재빨리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독고무는 말을 모는 청년에게 궁금한 점이 꽤 많았다.
“사문이 어찌 되시는가?”
“비밀입니다!”
“…….”
“하하하! 내세울 만큼 대단한 곳이 아니라서 이러는 것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독고무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젊은 나이에 꽤나 강한 무공을 지닌 듯했고 거기에 대단한 의술까지 지녔다면 필시 보통 청년이 아닐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제 이름은 왜 묻지 않으십니까?”
“…….”
“사공진무! 이게 제 이름입니다. 앞으로는 진무라고 부르십시오. 하하하!”
“얼굴만큼이나 멋진 이름이군.”
“제가 그런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허허허!”
청년의 해맑은 태도에 독고무가 크게 웃었다.
언제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 청년이 독고무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더불어 처음 보는 자신을 도와주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저기를 좀 보십시오.”
“…….”
독고무의 눈빛이 슬쩍 가라앉았다.
일단의 무리들이 관도의 가운데를 막아서는 것이 보였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독고무의 경지로는 얼굴의 점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공진무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표정이 변했다.
“느낌이 좋지 않는 자들입니다.”
독고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와 무리들 간의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무리의 맨 앞에 서 있던 자가 앞으로 나서며 싸늘히 물었다.
“십지신검 독고무가 맞느냐!”
천하의 독고무에게 물어오는 태도가 당당하기 짝이 없다.
“나를 알고서 막아섰다면 평범한 자들은 아닐 터,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그건 죽어 지옥에 가서 물어보거라.”
“……!”
독고무와 사공진무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스르릉!
독고무의 손에 그를 천하오객의 반열에 올려 준 애검이 쥐어졌다.
“나를 노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 역시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제가 알려 줄 것이다.”
싸늘히 받아친 인물이 손을 들자 관도 좌우에서도 꽤 많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우웅!
독고무의 검이 공명을 일으켰다.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솟아나며 일렁거리고 있었는데, 그냥 보면 검기로 보일 수도 있는 그것은 십지신검이란 명성을 안겨 준 그만의 절기를 펼칠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차 안의 독고혜 때문에 처음부터 절기를 펼치기로 작정을 한 것인데, 그때 사공진무가 전음으로 물었다.
[그냥 뚫고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세. 놈들은 내가 맡을 테니 그대는 마차를 모는 것에만 집중하시게.]
[알겠습니다.]
사공진무가 대답을 하자 독고무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느 정도 숫자를 줄여 놓고 마차를 따라갈 심산이었다. 물론 다른 자들이 마차를 노릴 수도 있겠지만 사공진무가 어느 정도는 막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치르륵!
독고무의 검이 기어코 시퍼런 강기를 발산했다.
“왜 나를 막아섰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겠다.”
“귀에 뭘 처박았나. 죽어 지옥에 가서 물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쳐라!”
명령이 떨어지자 좌우를 둘러섰던 자들이 일제히 독고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독고무의 두 눈이 살광을 폭사했다.
퍼퍼퍽!
“크아악!”
일검에 둘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독고무는 일부러 괴한들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검을 크게 휘두르자 또다시 세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짧은 시간에 독고무는 피에 젖어 버렸다.
중원을 누비며 수많은 생사박투를 펼칠 때의 강력했던 파괴력, 세상은 그런 그를 십지신검이라 칭송했고 그들의 칭송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지금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소문보다 더 강한 놈이었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절정 고수들만을 상대하기 위해 수많은 날을 수련시켰던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보자 가슴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왜 우리를 노렸는지 말해라.”
독고무는 수장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앞을 막아서는 자들은 그의 검이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크아악!”
관도는 이미 한 폭의 지옥도로 변해 가고 있었다.
“여기서 힘을 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독고무의 고개가 빠르게 마차를 향해 돌아갔다.
질풍처럼 달려가는 마차의 좌우에서 복면을 한 자들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더 생각할 것이 없었던 독고무는 바닥을 차고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과분한 여동생을 둔 것이 네가 죽어야 할 이유다. 독고무.”
퍼퍼퍽!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자들이 피를 뿌리며 곤두박질쳤다. 그런 그들의 미간에는 아주 작은 바늘 같은 것이 꽂혀 있었다.
사공진무가 던진 암기였다.
두두두!
사공진무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면서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연신 팔을 휘둘렀다.
슈슈슉!
파공성이 일면 어김없이 두 세 명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쐐애액!
뒤쪽에서 강력한 기운이 날아들자 사공진무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간발의 차이로 빗나간 기운이 마차와 말을 묶어 둔 끈 하나를 끊어버리자 일순 마차가 크게 휘청거렸다.
“이크!”
재빨리 마차의 균형을 되찾은 사공진무는 뒤를 돌아보았다.
허공에 뜬 채 날아드는 자들. 하나하나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유자들이었다.
‘예사로운 놈들이 아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당하고 만다.’
사공진무는 독고무를 찾았다.
때마침 독고무가 바람처럼 달려와 맨 뒤쪽의 괴한들을 죽이고 있었다.
“크악!”
독고무가 달려들자 사공진무를 노리던 자들이 좌우로 빠르게 흩어졌다.
그때를 이용해 독고무는 사공진무의 옆에 내려설 수 있었다.
사공진무가 재빨리 전음을 날렸다.
[저놈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검후님을 모시고 가까운 정도맹으로 가십시오. 일단은 그곳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혼자서는 무리네.]
[제게 다 방법이 있으니 어서 자리를 바꾸십시오. 혹시라도 몇 놈이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 그놈들은 손수 처리하십시오.]
사공진무는 독고무가 미처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걸세!]
[은혜가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다 알게 될 겁니다. 하하하!]
두두두!
마차는 빠르게 관도를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