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귀환무사 52화>
악승의 얼굴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청년이 그런 악승을 가늘게 노려보며 혀를 찬다.
“이럴 땐 영락없는 그놈을 닮았군. 힘만 강한 무식한 인간. 딱 그런 부류라니까. 쯧쯧.”
“패배를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물론 도망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지요.”
다분히 비꼬는 어조에 청년은 피식 웃었다.
“그놈들 돈을 몽땅 털어 왔는데 두들겨 패기까지 하면 되겠냐? 그건 강도지, 강도.”
“도둑이나 강도나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악승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금발 청년이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악승에게 던졌다. 사련의 분타에서 털어 온 은자가 담긴 주머니였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이 돈으로 단체로 옷이나 바꿔. 마교에서 왔소! 하며 소문 낼 일 있냐! 너희들 때문에 마음 편히 이동을 할 수가 없잖아!”
“…….”
“심심해서 같이 가려고 했더니 아주 귀찮아 죽겠네. 젠장! 빨리 가자. 배고파 죽겠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금발 사내.
돈주머니와 청년을 번갈아 응시하던 악승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이었던 대주의 벗이라서 함께는 했는데, 어째 행동부터 말투 하나하나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가자.”
* * *
사련(邪聯).
련주인 암흑대제 갈무극이 지배하는 그곳은 정파의 정도맹, 마도의 마교와 더불어 강호를 삼분하고 있는 사파의 결집체다.
전력으로 따져 보면 결코 마교에 뒤지지 않는 사련은 백 년 전에 창설되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파와 전면전을 벌인 적이 없다.
원대한 야망을 꿈꾸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키워 온 그들이라 축적된 그들의 힘은 천하를 넘볼 만하다고 세인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천하 정세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그들이 천하를 넘볼 만한 힘을 지녔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정도맹과 마교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힘의 구도상 어느 한쪽이 함부로 나섰다가는 남은 두 세력의 동맹을 불러오고 그것은 곧 멸망을 부르는 지름길이기에 세 곳 모두는 백 년간 서로를 견제하며 몸집 불리기에만 총력을 기울이는 실정이었다.
그러한 사련의 주인 암흑대제 갈무극이 꽤나 분노하고 있었다.
쾅!
“마교 놈들이 감히 본 련의 분타를 털었단 말이냐?”
거대한 대전에 찬 바람이 몰아친다.
머리를 조아린 자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갈무극의 노화를 온몸으로 받아 내었다.
갈무극의 옆에 서 있던 왜소한 체구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고수들을 풀어 두었으니 조만간에 놈들의 목을 가져올 것입니다.”
“감히 놈들이 대놓고 그런 짓을 벌이다니, 이는 감히 본좌를 능멸하려는 짓거리가 아니더냐! 내 이번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대제시여! 고정하십시오! 지금 이 시점에서 마교와 충돌을 하면 정파만 좋은 일을 시켜주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간곡히 만류하는 인물은 사련의 두뇌로 불리는 귀낭(鬼囊) 사요승이란 자다.
사련의 군사라는 막중한 자리에 올라 있는 그는 갈무극의 심복이자 사련의 이인자이며, 한 번 입을 놀리면 수천 명을 죽일 수 있다는 계략과 책략의 달인으로 유명하다.
사요승의 간곡한 청에도 갈무극은 전혀 그럴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깟 분타 하나가 털렸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지금껏 마교가 본련을 향해 얼마나 많은 도발을 해 왔느냐! 헌데도 본좌는 대업을 생각해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응하지 않았다. 허나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구나!”
갈무극이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자 사요승은 대전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간곡히 말렸다.
“지금 그들과 다툼이 일어나면 본련의 백 년 대업에 크나큰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속하가 대제의 위엄을 해치지 않게 할 방도를 찾아내겠습니다. 대제!”
분노로 인해 붉어진 갈무극의 눈동자가 사요승을 향했다.
사요승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상황을 보다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마교가 무도한 놈들이라고는 하나 감히 중원의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본련과 마교를 이간질하려는 정도맹의 수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갈무극의 낯빛이 조금은 제 빛을 되찾았다.
사요승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나백이 그런 얄팍한 수법을 쓰리라 생각하느냐? 비록 우리와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적이라지만 그런 짓을 할 만큼 옹졸한 자가 아니다!”
“대제! 지금 정도맹은 나백의 것이 아닙니다. 그는 허울뿐인 맹주, 실질적으로 그들을 끌어가는 자들은 사천왕과 다른 세력들이옵니다.”
갈무극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도 그 점은 익히 알고 있었다.
사요승이 말을 이었다.
“무당과 구파의 일부 세력들이 암중에서 막강한 권한 행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오대세가의 일부 세력들도 나백의 영향권 밖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나백의 허락이 없이도 충분히 일을 꾸밀 수 있고도 남을 자들입니다.”
“흠!”
비로소 진정을 했는지 갈무극은 냉수를 한 그릇 마시고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성정이 불처럼 뜨겁고 급한 그의 면모를 잘 보여 준 대목이었다. 그가 화를 누그러뜨린 것으로 보이자 지금껏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섰던 중년인이 나섰다.
“대제시여! 추살전(追殺殿), 전원이 보고도 없이 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뭐라! 보고도 없이 빠져나가!”
갈무극의 두 눈이 다시 도끼눈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에 점검을 해 본 결과 며칠 전에 놈들이 중원으로 나선 것으로 파악이 되었습니다!”
갈무극의 시선이 다시 사요승을 향해 돌아갔다.
“잘 돌아간다. 네놈들이 요즘, 기강이 빠질 대로 빠졌다고 소문이 돌더니 거짓이 아니었군. 감히 성을 빠져나가면서도 본좌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니, 정녕 네놈들이 죽고 싶은 것이냐!”
쾅!
갈무극의 옆에 놓였던 탁자가 박살이 나며 그 파편이 사요승의 전신을 덮었다.
갈무극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군사!”
“예, 대제.”
“단주급 이상 전 간부를 지금 당장 암흑대전으로 모이게 하라! 가장 늦는 놈은 본좌가 직접 목을 잘라 줄 것이다!”
갈무극이 몸을 일으켜 거처를 빠져나갔다.
동시에 모든 인물들이 황급히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자신들의 주인은 한다면 하는 인물이다. 늦으면 사요승조차도 목이 달아난다. 갈무극은 그런 인물이었다.
* * *
혁련천후와 관산악은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경공을 중단하고 걸었다.
“주공. 문파를 제대로 만들려면 지금의 장원으로는 좁지 않겠습니까? 기왕이면 크고 화려하게 하시는 것이…….”
“크고 화려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내실이 중요하지만 외형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눈으로 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대륙인들의 특성을 감안하면 적어도 구파의 하나 정도는 되어야 문도들이 끓고 천하가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
관산악의 말은 옳았다.
적어도 천하에 인정받는 문파로 성장하려면 그 규모 또한 절대적인 요소였다. 대부분의 문파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것은 모두가 그러한 점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하면 저희들이 벌어 오겠습니다. 까짓것! 살인 청부 몇 번만 받아 주면 어지간한 문파 하나 정도 세울 자금은 금방 마련할 수 있습니다.”
“살인 청부?”
“건문제와 연왕이 황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상대방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고자 난리도 아니라고 하니 청부 몇 건이면 은자 수만 냥은 장난 아니겠습니까?”
혁련천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관산악을 돌아봤다.
자금을 벌기 위해 황제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자들에게 개입을 하겠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관산악. 혁련천후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얼마 걷지 못하고 혁련천후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방의 숲 속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명천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손에 투박한 척도를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산적이나 화적쯤으로 보였다.
“가진 것을 몽땅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움직이면 죽이겠다!”
투박한 칼을 들이대며 고함을 질러 대는 자들을 보며 관산악은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관산악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혁련천후가 그를 제지했다.
혁련천후는 말없이 척도를 겨누고 있는 둘을 응시했다. 기본조차 닦아지지 않는 어설픈 자세였다.
저 정도면 소를 잡기도 힘들어 보인다. 게다가 칼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초짜임에 분명했다.
“은자 있으면 내놔 봐.”
“……예?”
“어서.”
짤랑!
혁련천후의 손바닥에 은자 두 냥이 쥐어졌다.
관산악은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도적들을 노려봤다. 한 명이 재빨리 혁련천후의 손에서 은자를 채어 갔다.
은자를 집어 가는 손길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혁련천후는 내심 씁쓸했다.
이들은 분명 도적이 아니다.
가난에 찌들어 삶이 힘들어진 평범한 백성들이라 짐작했다. 천하를 광란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는 황권 다툼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돈이면 두 가족이 일 년은 굶지 않아도 될 것이오. 하니 다시는 이런 행동은 하지 말도록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혁련천후는 돌아섰다.
관산악은 슬그머니 주먹을 들어 올리려다 혁련천후의 부름을 받고는 돌아섰다.
둘이 약 십 장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이보시오!”
다소 떨리는 음성이 둘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은자를 채어 갔던 사람이 그들에게로 뛰어왔다. 그 사람이 손을 쑥 내밀었다.
삶의 고단함이 여실하게 드러난 투박한 손에 은자 한 냥이 쥐어져 있었다.
“한 냥이면 충분하니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뭐야? 지금 장난 치냐?”
혁련천후는 말없이 돈을 내민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지 못해 시선을 밑으로 깔아 버린 사람은 돈을 바닥에 던지고는 재빨리 동료에게로 뛰어갔다.
그런데 뒤쪽에 섰던 다른 사람과 뭐라 말을 주고받더니 다시 돌아왔다.
“보아하니 당신들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우리가 사람을 잘못 택한 것 같소. 이것도 마저 가지고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