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귀환무사 50화>
“부대주님!”
수하들 중 하나가 부르자 방립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부른 자가 사내의 손등을 가리켰다.
“저것을 좀 보십시오.”
“……!”
파르르!
방립인의 눈동자가 파랑을 일으켰다.
이 문신은 나와 죽음을 맹세한 친우들과 함께 새긴 것이다. 만약 강호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나를 대하듯 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가리키며 말하던 대주의 모습이 방립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뒤이어 방립을 벗으며 한쪽 무릎을 땅에 꿇었다.
“흑영대 부대주 악승이 감히 무례를 범했습니다. 죽어야 마땅하나 대주님을 찾아뵈어야 하기에 팔 하나로 죗값을 대신하고자 하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대뜸 칼을 들어 왼팔로 가져가는 방립인.
“어째 성질머리도 그놈을 빼다 박았냐?”
사내는 혀를 차며 손을 휘둘렀다. 눈부신 빛이 일더니 방립인의 검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땅!
방립인의 칼이 저만치 날아가 떨어졌다.
“너희들이 그럼 마교의 흑영대냐?”
“신교라 불러 주십시오.”
“신교는 개뿔. 알았으니 어디 가서 술부터 한잔하자. 너희들한테 쫓긴다고 하루 종일 물도 한 잔 못 마셨더니 돌아가시겠다.”
방립인, 악승이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귀인을 모셔라!”
“귀인은 개뿔. 닭살 돋아나려 하니까 그냥 형님이라 불러라.”
악승이 다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대주님의 의형이신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 일어서라.”
사내는 악승을 보며 혀를 찼다.
확실히 그는 자신의 친구와 닮아 있었다. 아주 징글징글할 정도로.
* * *
천하가 들썩였다.
전왕(戰王) 단리극.
투왕 (鬪王) 담대소천.
고금최강의 자객 살왕(殺王) 흑야.
이들의 출현은 천하를 뒤흔드는 초강력 태풍이 되었다. 오 년 전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던 절대 존재들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그들이 당가와 오대세가로부터 화산을 지켜 주었다는 소문은 바람을 타고 천하를 쓸었다.
무사들의 혼을 불살랐던 전왕과 투왕의 출현에 칼을 든 무사들은 환호성을 보냈고 흑야의 출현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저승사자의 강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하는 화산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쇠락을 길을 걷던 화산이 어떻게 그 같은 존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과연 그들이 화산과 어떤 관계인지를 두고 천하인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누구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곳은 정도맹과 마교, 사련이었다.
셋은 하나같이 정사지간(正邪之間)의 인물들이다. 그들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힘의 균형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도맹이 가장 안도할 수 있었다.
당장은 그들이 연을 맺은 곳이 정파의 한 곳인 화산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화산을 공격했던 당가와 팽가 등이 세인들의 눈총을 받기에 이르렀다.
각설하고.
천하가 주목하고 있거나 말거나 혁련천후와 일행들은 원의 수리에 매달렸다.
느긋하게 그들을 기다렸던 관산악은 제대로 회포를 풀기도 전에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뒷간에 숨었던 끈기의 살수는 밧줄에 묶여 흐르는 강물에 닷새 동안 몸을 담가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살수는 모두가 모인 주방의 한구석에 처박혀 연신 몸을 떨어 댔다.
“천하가 시끄럽습니다.”
관산악의 말에 혁련천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받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문제 될 것도 없고.”
“한데 당가와 팽가는 왜 살려서 보내 주셨습니까? 그냥 싸잡아 목을 따 버렸어야지 않았습니까? 화산의 검수들이 꽤 많이 죽었다던데 말입니다.”
당가와 팽가쯤은 지나가는 개보다 못하다는 듯 말하는 관산악.
왕전이 히죽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크게 먹자는 거지. 당가 정도의 조무래기들을 죽여 봤자 손만 더러워질 뿐이다. 놈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신분을 감추고 그냥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돌려서 말했냐?”
관산악의 매서운 눈초리에 왕전은 도끼눈으로 응답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 갔다.
“주공께선 천하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에 때를 봐서 정식으로 개파를 할 복안을 갖고 계신다. 그래야 파급 효과가 더 커지지 않겠냐.”
“그거하고 놈들을 살려준 것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개파를 하기도 전에 괜한 공포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지. 대충 그렇게 알고 그냥 술이나 처먹어라. 귀찮아 죽겠다. 망할 놈아.”
관산악은 여전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흑야가 담대소천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그더러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해 주라는 시늉이었다.
“하여간에 힘만 셌지, 당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놈들이라니…….”
혼잣말로 중얼거린 담대소천이 입을 열었다.
“완벽하게 천하 위에 군림을 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굴복시켜야 한다. 고금을 통틀어 무력만을 앞세워 그것을 이루어 낸 집단은 한 번도 없었음을 모르느냐.”
관산악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대뜸 혁련천후에게 물었다.
“주공! 개파를 하시려면 최소한의 무사들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설마 이 숫자로 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대답은 담대소천이 대신했다.
“그래서 화산에서 겁만 줘서 물리친 것이 아니냐?”
“이 자식이! 좀 쉽게 말하라니까!”
버럭 성지를 내는 관산악. 담대소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바탕 싸울 것처럼 하더니 이내 말을 대답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속한 문파가 개파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당연히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들 몰려들게 되겠지. 절대 고수가 있는 문파와 그렇지 못한 문파 간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화산에서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최소한 스스로를 정파라 여기는 무사들은 당연히 등을 돌리게 되겠지. 주공께서는 이념을 떠나 모두를 아우르고 싶어 하신다.”
“흠!”
관산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전이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살수를 돌아본다.
“저놈은 근데 왜 살려 둔 거냐?”
삶은 닭다리 하나를 뜯어 가던 살수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화들짝 놀라며 닭다리를 놓치고 말았다.
관산악이 피식 웃더니 대답한다.
“냄새만 없어지면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볼 생각이다.”
“너 미친 거 아니냐? 주공을 암살하러 온 놈을 수하로 삼겠다니. 신강에서 뭘 잘못 처먹었구나, 이놈이.”
모두가 왕전과 같은 마음이었다.
혁련천후까지 자신을 쳐다보자 관산악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들어 보니 그곳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놈이더라고. 딴마음을 먹으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리면 그뿐이니 내게 맡겨 둬라.”
찌릿! 찌릿!
살수는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그에게 모두는 하나같이 저승사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때 관산악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고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을 해야 했다.
“이봐, 흑야. 네가 한번 가르쳐 볼 생각은 없냐? 이놈이 이래 봬도 뒷간에서 일주일을 버틴 끈기를 지녔거든.”
“냄새부터 없애라.”
* * *
탁철과 모용단승은 빠르게 장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혁련천후의 지시로 모종의 장소를 다녀오는 중인 그들은 시장기가 돌자 객잔을 찾았다.
“저기 있군.”
마침 지난날에 들렀던 왕팔의 객잔이 눈에 들어오자 둘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객잔 안은 한산했다. 마침 계산대에 나와 있던 왕팔은 탁철을 보고서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자신을 돈방석에 올려 준 사람들 중 한 명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왕팔은 초대형 만두와 술을 공짜로 내주었다.
졸지에 공짜 술과 공짜 밥을 먹게 된 탁철과 모용단승은 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잘생긴 청년이 객잔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양손 가득 풀뿌리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청년에게서는 약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독고혜 때문에 혁련천후에게로 가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청년이었다.
객잔의 위층으로 올라가는 청년을 탁철과 모용단승은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둘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년의 기운이 상당히 익숙했던 까닭이었다.
“언제 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착각이겠지요.”
“그렇지? 내 성격에 저렇게 뺀질거리게 생긴 사람은 사귄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르는 사람일 거다.”
모용단승도 이하동문이었다.
둘은 다시 만두와 술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만두가 반쯤 사라졌을 때, 객잔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덜컹!
둘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말라붙은 핏빛을 연상시키는 적색 장포를 걸치고 어깨에 기다란 창을 둘러멘, 조금은 말라 보이는 사내가 객잔을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모용단승의 시선과 마주쳤다.
저벅! 저벅!
사내는 모용단승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사내가 대뜸 다가오자 모용단승은 자신도 모르게 검파에 손을 가져갔다.
탁철은 이미 대도를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검과 대도를 뽑지 않았다.
사내는 둘의 바로 옆 탁자에 앉았다.
“뭘 드릴깝셔!”
점원들이 다 퇴근을 한 까닭에 왕팔이 직접 사내를 맞았다.
“술하고 삶은 닭 한 마리.”
“아, 예.”
지극히 냉랭한 태도에 왕팔은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탁철과 모용단승에게로 다가왔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아낌없이 다 드리겠습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이거 원 부담스러워서…….”
“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귀인들 덕분에 돈방석에 앉았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하하하!”
왕팔의 지나친 환대에 탁철과 모용단승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왕팔이 말을 이었다.
“세상에 그분들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들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천하에 그분들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주인장도 들었소? 하여간에 소문 한번 참 빠르다니까.”
왕팔이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전왕과 투왕이라니요. 제가 비록 강호의 무사는 아니지만 그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분들의 주인이 되시는 분께서 저희 객잔에 들르셨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입지요. 하하하!”
그때였다.
모용단승과 탁철이 검을 뽑아 들며 벌떡 일어섰다.
난데없는 상황에 왕팔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빠졌다.
옆 탁자에 앉았던 사내가 어느새 그들의 곁에 다가와 서 있었다.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