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귀환무사 48화>
‘대체 저들이 얼마나 강하기에 사숙조께서 이토록 자신만만해하신단 말인가.’
진유만큼이나 화산의 검수들도 술렁거렸다.
“뭐 하는 거지?”
“왜 저분들만 나서는 걸까?”
“그런데 모두 처음 보는 분들인데, 누구지?”
혁련천후에게서 수련을 받았던 다섯 명과 질풍각의 일부 검수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술렁거림은 당연했다.
“저기를 좀 보십시오.”
당가의 고수 하나가 그들을 가리켰다.
작전을 짜던 당효 등이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닐 테지?”
“이젠 바꿔도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쓸어버리면 그뿐이 아니겠습니까?”
팽린은 여전히 강경하게 나왔다.
당효도 그와 생각이 같았기에 연무장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왕전 등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당곽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하고 나섰다.
“어쩌면 저들 중에 간밤에 문성이를 그 지경으로 만든 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소. 화산이 중재안을 거부한 것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겠소.”
당곽의 말에 일리가 있어서일까?
당효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러나 팽린만은 예외였다.
“지나친 걱정이십니다. 여차하면 당문이 자랑하는 독공을 쓰면 되지 않습니까?”
당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다가 이내 눈빛을 번뜩였다.
“만약에 장로의 말씀대로라면 독공을 쓸 수밖에.”
“수하들을 죽이기 싫으면 너희 대가리들만 덤벼!”
그때였다.
왕전과 흑야가 걸음을 멈추었다. 반면 담대소천은 십 장 정도를 더 걸은 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쿵!
그는 청룡언월도를 땅에 깊숙이 박고는 뒤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외쳤다.
“투구를 가져오너라.”
진유가 투구를 가져다주자 담대소천은 화산의 무복을 벗어 버렸다.
그러자 갑주가 드러났다. 태양에 반사된 갑주가 빛을 번뜩이자 당효를 비롯한 모두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담대소천을 주목했다.
그러다가 일순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천하에 저런 모습을 한 사내가 있었다.
싸움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 투왕(鬪王) 담대소천.
한 자루 청룡언월도로 십팔만 리 대륙을 가르며 전승의 신화를 일구어 낸 무적의 싸움꾼이 당효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와 눈앞의 담대소천은 어디 하나 틀린 곳 없이 똑같았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부르짖음이 울렸다.
“투왕! 담대소천!”
“뭣이!”
그때였다.
담대소천이 땅에 박아두었던 청룡언월도를 뽑아 당효와 팽가의 연합군을 향해 나지막이 외쳤다.
“나 담대소천을 넘을 자, 앞으로 나서라!”
우우웅!
청룡언월도에서 공명이 일었다. 뒤이어 거센 흙먼지가 당효 등을 향해 밀려 갔다.
콰아아!
“저, 저자가 왜 화산에 있단 말인가?”
당효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때 왕전이 나섰다.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군. 저런 칼잡이를 보고 벌벌 떨다니 말이야. 흐흐흐!”
쾅!
왕전이 칼로 땅을 후려치자 이번에도 거대한 흙먼지가 당효 등을 향해 폭풍처럼 밀려갔다.
“나하고 놀 사람 어디 없느냐! 나 전왕 단리극이 몸이 근질근질해서 죽을 맛이거든! 흐흐흐!”
딸랑딸랑!
그의 귀에서 울린 방울 소리가 모두의 귓속에 천둥소리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흙먼지와는 비교할 수없는 거대한 충격파가 당가와 오대세가의 고수들을 휩쓸었다.
“저, 전왕이다!”
“으으…….”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당가의 장로 당곽이 부르짖는다.
사납기로는 투왕보다 더하다는 전왕(戰王)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은 저절로 흑야을 향했다.
팔짱을 하고서 오연히 자신들을 노려보고 선 그가 뒤로 한발 물러서고 있었다.
“난 빠져 주지. 대신 나중에 개인적으로 찾아갈 거다. 나 흑야는 이런 식보다는 소리 없이 찾아가 목을 따 버리는 것을 좋아하거든.”
쿠웅!
무심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내공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당효를 비롯한 모두의 귓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껏 객기를 부렸던 팽린이 기어코 부르짖는다.
“사, 살왕까지 있었다니…….”
밤의 제왕이라 불리는 공포의 대살수 살왕(殺王) 흑야(黑夜)까지 확인하자 당가와 팽가의 연합군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당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셋 모두는 오 년 전까지 당대 최강을 논하던 무적의 고수들이다.
그 하나만으로 거대 문파 하나에 버금간다는 존재가 셋이나 한꺼번에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들의 적이 되어서.
그때 혁련천후의 목소리가 줄을 놓아버리려던 당효의 정신을 일깨웠다.
[일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효.]
당효는 그제야 혁린천후의 경고를 떠올렸다.
- 너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각이다. 그 안에 뜻을 정확하게 전하지 않으면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너희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당효의 고개가 벼락처럼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그들만큼이나 놀란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영호찬과 나웅이 있었다.
“무, 물러가겠소!”
화산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당가와 팽가, 그리고 단리세가의 고수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화산을 내려갔다.
그들은 산을 내려가기 전에 혁련천후의 경고를 들어야 했다.
“오늘 살아서 돌아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손에 죽어 간 화산의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조만간에 내가 직접 너희들을 찾아갈 것이니, 그때는 감히 살 생각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휘이잉!
거센 바람이 화산을 덮었던 피 냄새를 쓸고 지나갔다.
승리의 환호성이 화산을 뒤흔들 때, 당효를 비롯한 모두는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졌다.
* * *
살수(殺手)는 인내와 끈기 그리고 일격필살의 살초를 지녀야 한다.
그 세 가지를 지니면 자신보다 강한 상대도 거뜬히 죽일 수 있다.
대가를 받고 청부 대상을 죽이며 살아가는 그들은 강호에서 이단아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 검에 더 강한 고수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짜릿한 쾌감과 성취감은 그들로 하여금 살수의 길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혁련천후가 사들인 장원에 그러한 살수가 찾아온 것은 모두가 화산으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장으로부터 혁련천후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온 살수는 가장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공간을 택해 그곳에 몸을 숨기고는 기회를 엿보았다.
죽여야 할 대상은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 말고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낭인과 비슷했다.
‘나를 뭘로 보고 이런 놈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지?’
살수는 청부 대상이 너무 약하자 하늘과도 같은 주인을 향해 원망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살수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죽여야 할 대상의 주변을 맴도는 기운, 자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그 기운은 언제나 자신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기운의 주인을 찾아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도저히 찾아낼 방도가 없었던 그는 사흘이 지나고서 사람들이 가장 안심하는 장소인 뒷간을 기회의 장소로 택했다.
살수는 자신을 방해했던 은밀한 기운을 죽일 대상의 호위라고 여겼다. 그래서 뒷간을 택한 것이다.
제 아무리 호위라도 이곳까지 따라 들어오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이틀이 지나갔다.
오물을 뒤집어쓴 살수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정도 끈기는 그에게 기본이었다.
‘분명 뒷간은 여기 하나뿐, 그런데 이틀 동안 뒷간을 찾지 않다니 혹시 변비라도 걸린 것일까?’
사람이라면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뒷간을 찾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죽일 대상은 사흘 동안 단 한 번도 뒷간을 찾지 않았다.
‘변비가 걸렸더라도 한 번은 오게 되어 있다. 참고 기다리자.’
살수의 집념은 끝이 없었다.
이틀이 더 지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뒷간을 찾지 않았다.
‘지독한 변비에 걸린 모양이군. 불쌍한 놈.’
시원하게 배설을 못하는 그 고통을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살수란 직업이 좀 신경 쓰이는 직업인가. 힘든 청부를 맡고 나면 자신도 어김없이 변비에 걸리곤 했었다.
그때의 고통이란.
그때였다.
‘기척!’
뒷간의 발판을 흔드는 미세한 기척이 느껴지자 살수는 두 눈만 남겨 두고 모조리 똥통에 담그며 기척을 숨겼다.
톡톡!
위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온다. 살수는 발걸음이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했다.
‘뭐야? 뒷간을 올 때에도 신법을 펼치나?’
지나치게 빠르고 지나치게 가볍다.
천하 고수라도 저러지는 않을 텐데.
그때였다.
퐁!
오물 속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은근한 살기마저 품은 사내의 눈동자는 자신의 코앞을 향해 모아졌다.
익사 직전의 상태로 숨을 헐떡이는 쥐 새끼가 사내의 눈에 보였다.
‘……씨팔.’
다시 오 일이 지났다.
살수의 끈기와 인내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똥통에 빠졌다가 자신의 눈빛을 받고 죽어 간 쥐만 해도 세 마리. 여전히 죽일 대상은 뒷간을 찾아오지 않았다.
‘설마 황제처럼 방에서 똥을 처싸는 것은 아니겠지.’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기척.
살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척의 주인이 뭔지 알기 때문이었다.
퐁당!
네 번째 쥐가 떨어졌다.
* * *
장원에 들어선 관산악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미간을 찡그렸다.
“왜 이런 곳에 머물고 계신 건지 알 수가 없군.”
장원은 지나치게 낡아 있었다.
곳곳이 파손되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다만 손을 본 흔적과 깨끗하게 정돈이 된 것이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먹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를 간 거지? 화산으로 갔나?”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하나 없자 관산악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원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전각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며 술병을 꺼냈다.
벌컥!
“크! 좋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그는 뒤로 벌렁 누웠다.
천성이 서두르는 법이 없는 그는 주인과 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한잠 자기로 마음먹었다.
“응?”
뒤로 누워 가던 관산악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장원 안쪽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빛을 발했다.
‘사람이 있었군.’
미세하게 느껴지는 기척은 보통 고수라면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산악은 보통의 범주를 벗어난 고수, 몸을 일으킨 관산악은 느릿하게 장원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살수?’
자신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기운이 응축되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