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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사-46화 (4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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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사 46화>

정찰조의 보고에 화산의 수뇌부는 언제 급습을 해 올지 모르니 방심하지 말고 단단히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 오후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뜻밖의 손님이 화산을 찾아왔는데, 정도맹에서 보낸 사자였다. 일행에는 맹주 나백의 손자인 나웅도 끼어 있었다.

화산의 검수들은 혹시라도 정도맹이 중재를 하러 온 것은 아닐까, 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모두의 이목이 맹의 사자가 들어간 태청관을 향해 있을 때, 당가와 팽가의 연합군이 머물고 있는 능선에도 정도맹에서 보낸 사자가 찾아왔다.

수석호법 영호찬이 난데없이 찾아들자 당가와 팽가의 연합군은 화산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휩싸였다.

혹시라도 정도맹이 중재를 자처하고 나서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영호찬이 당가주의 천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맹호도 팽린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재수 없는 양반이 왔군.”

영호찬은 팽린이 상당히 싫어하는 인물이다.

영호세가주의 동생이자 알아주는 고수인 그는 성정이 바르고 강직하기로 유명하다.

평소 정도맹의 소녀들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던 팽린은 그에게 자주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이 영호찬에 필적하는 고수로 성장했기 때문에 별다른 일을 없었지만 성정이 소심한 팽린은 지난날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혹시 전쟁을 중단하라는 말을 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요?”

팽가의 고수 하나가 물었다. 팽린은 어림도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 시점에서 중재는 무슨, 하라고 해도 할 내가 아니다. 당가주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냥 술이나 마시자.”

“술을 드신단 말입니까?”

“어차피 오늘은 싸움이 없으니 괜찮다. 가서 몰래 몇 병 들고 오너라.”

“예. 대공자.”

팽린은 술을 가져오라 말하고서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싸움을 하루 미룬다는 결정에 불만을 보였던 당가와 오대세가의 고수들은 정도맹의 사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 * *

나웅은 자신의 앞에 줄을 지어 늘어선 화산 제자들의 기대 어린 시선에 내심 당황했다.

맹의 사신단으로 화산을 찾은 그는 조금 전 장문인과 밀담을 끝내고 맹으로 돌아가기 위해 태청각을 빠져나왔다.

그런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수많은 화산 제자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었다.

나웅은 그들의 눈빛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싸움의 끝!

그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하긴 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나웅은 불현듯 동정심이 일었다. 차마 그냥 지나치기 뭐했던 그는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게 잘될 테니 너무 걱정들 마십시오.”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산문 앞까지 걸음을 옮긴 나웅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무사들을 보다가 흠칫했다.

‘엇!’

혹시 잘못 보았나 싶어서 안력을 돋우고 다시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씨익 웃는 자가 있었다.

짧은 머리에 강인한 체격, 거기에 화산이 검수들이 입는 무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는 당가와 남해검문의 고수들을 무참히 도륙했던 왕전과 닮아도 너무 닮아 있었다.

‘아니다. 그자가 왜 화산파에 있단 말인가.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겠지.’

고개를 저은 나웅은 이내 화산의 산문을 빠져나갔다. 그는 능선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 당가와 팽가의 연합군에게 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영호찬과 만나 다시 올라올 예정이었다.

한편, 산문을 넘어가는 나웅을 보며 중얼거리는 검수들이 있었다.

“중재는 개뿔. 그럼 우리가 올라온 의미가 없잖아. 애송이. 흐흐흐.”

“근질근질하면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면 될 것을 뭘 그리 쫑알대는 것이냐.”

“나도 그러고 싶다만 주공께서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어쩌겠냐.”

화산의 검수들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그들은 세 명이었다.

그날 밤, 나웅은 영호찬과 함께 다시 화산의 산문을 넘어왔다.

그 전에 와 있었던 다른 이들과 합류를 한 정도맹의 사신단은 장문인 태허와 밤새도록 밀담을 나누었다. 그러고는 해가 뜨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화산을 내려갔다.

정도맹의 사신단으로 인해 혈전은 이틀 동안 중단이 되었다.

* * *

태청각에 화산의 수뇌부가 모였다.

진유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모두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문을 닫은 채, 침묵에 휩싸였다. 정적을 깬 이는 진유였다.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장로 태홍이 고개를 저으며 답하고 나섰다.

“섣불리 판단할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면 제자들의 목숨은 구할 수 있다만 패배는 불을 보듯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래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도 좋지만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두 죽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끝장입니다.”

진유의 단호한 어조에 좌중이 일순 술렁거렸다. 태홍이 다시 말을 이었다.

“패배의 치욕을 덮어쓰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바에야 차라리 장렬히 산화하는 것이 낫다. 우리 화산이 어찌 저런 무뢰배들한테 치욕을 당할 수 있겠느냐!”

“장로님! 이렇게 화산이 멸문을 할 순 없습니다! 잠깐의 치욕은 먼 훗날 언제든 되갚아 주면 되는 것입니다!”

진유는 점점 더 격앙되어 갔다.

그때까지 침묵을 보이던 장문인 태허가 나섰다.

“진유의 말이 옳습니다. 비록 봉문을 당하더라도 훗날을 도모할 제자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들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장문인!”

장로들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태허는 보다 단호한 태도로 나섰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이니 장로님들은 그만 물러들 나십시오.”

“허어!”

장로들이 탄식을 쏟아 내며 고개를 숙였다. 진유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장문인을 향했다.

“장문 사형께서도 함께하시겠습니까?”

“내 비록 검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었다만 사문을 구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아야지 않겠느냐.”

진유의 시선이 장로들을 향했다.

가장 배분이 낮고 나이도 어렸지만 좌중의 분위기는 그가 주도하고 있었다.

진유는 태홍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래도 장로님께서 함께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내 하나 죽는 것이야 문제 될 것이 없다만 나로 인해 사문의 치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선뜻 내키질 않는구나. 허나 그나마 내가 조금 더 칼을 잘 쓴다면 어쩔 수 없이 나서야겠지. 허어…….”

대답하는 태홍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진유의 눈시울 또한 붉어졌다. 이를 악다문 진유가 좌중을 돌아보며 비장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결판이 나게 되었습니다. 제자 진유 태청동을 열어 제(際)를 올리고 싶으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마치 죽음을 앞둔 자의 비장함마저 풍기는 진유에게 모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문의 어른으로서 오늘날의 사태를 막지 못한 것이 그저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이었다.

태허가 몸을 일으켰다.

“가자꾸나! 이 몸도 마지막으로 선조들께 불충과 용서를 빌어야겠구나.”

“같이 가십시다.”

태홍도 몸을 세웠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셋을 바라본다. 걸음을 옮기는 셋의 어깨에는 사문의 치욕을 감내할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태허가 막 태청각의 문고리를 잡아 갈 때였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태청각을 흔들었다.

“그 죄는 내게 빌어라!”

“누구냐?”

모두의 고개가 소리가 난 곳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 지켜보던 태홍자가 두 눈을 부릅뜨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흔들리는 동공에 혁련천후의 차디찬 얼굴이 맺혔다.

챙!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온 것이냐?”

진유가 검을 뽑으며 막아섰다.

그때 태허의 목소리가 울렸다.

“진유는 검을 거두고 예를 갖추어라!”

장문인 태허의 호통소리에 진유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진유를 뒤로 물리친 태허가 천천히 혁련천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무릎을 꿇었다.

“태허가 사숙을 뵙습니다.”

“……!”

태허의 행동에 진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사숙이라니.

사문에 장문인이 사숙이라 부르는 이가 있었단 말인가.

“뭣들 하십니까? 예를 취하지 않고!”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는 장로들에게 태허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제야 태홍과 태송이 태허의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진유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당가와 팽가의 공격만큼이나 놀라운 광경이었다.

태허의 호통이 이어졌다.

“네게는 사숙조가 되신다. 냉큼 예를 갖추지 못할까!”

진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문에 사숙조가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거니와 눈앞의 혁련천후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 이놈! 감히 불경을 저지를 셈이냐!”

태허의 호통이 다시 한 번 떨어지고서야 진유는 혁련천후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진유가 사숙조를 뵙습니다.”

쿵!

바닥에 머리를 찧는 진유. 그 소리가 혁련천후의 가슴속에서는 천둥소리보다 크게 울렸다.

그는 머리를 조아린 진유를 내려다보았다.

쇠락한 사문을 홀로 지탱해 온 그의 어깨가 비수처럼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끝까지 사문의 멸문을 막으려 장로들에게 소리를 외치던 그를 보고 있자니 사문을 향해 들끓던 증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너 혼자 짊어지기엔 그 짐이 너무 무거웠을 것이다. 허나 이젠 너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일어서서 나를 향해 웃어 보거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태허에게 시선을 돌렸다.

“싸울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 모두 일어서시오.”

진유로 인해 증오가 가셔서일까?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태허를 비롯한 장로 둘이 그제야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진유도 일어섰다.

혁련천후는 다시 진유를 응시했다. 진유는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네 어깨에 짊어졌던 짐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그 짐은 내가 대신 짊어져 주마.”

“……!”

“사숙!”

태허와 장로들이 격동에 몸을 떨었다.

혁련천후의 입술을 뚫고 흘러나온 목소리에 모두는 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시는 그 누구도 이곳을 넘보지 못하게 해 줄 것이다. 내가…….”

날이 밝았다.

중재안의 내용이 밝혀지자 일말의 기대감을 보였던 화산의 제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참담함에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 태허가 밝힌 중재안에 따르면 당가와 오대세가는 화산과의 전면전을 철회한다고 했다.

그것만 보면 화산이 침통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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