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귀환무사 44화>
객잔에서 보았던 남해검문의 고수들이었다.
관산악은 담담히 웃으며 기대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남해검문의 고수들은 길목을 막아서는 관산악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빛을 보였다
그때 선두에서 이동하던 중년인의 표정이 급변했다.
“흑영대주 관산악!”
“용케도 알아보는군.”
관산악의 정체를 알아본 남해검문의 고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챙!
관산악도 무기를 뽑았다.
그를 마교 최고의 싸움꾼으로 만들어 준 엄청난 크기의 대도가 햇빛에 번뜩이며 위용을 드러내었다.
보는 것만으로 질리게 만드는 관산악의 대도가 햇빛을 받아 번뜩이자 모두의 낯빛에 긴장감이 어린다.
“화산으로 가는 길인가?”
“네놈과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 어찌 묻는 게냐!”
“상관이 없을 수가 있나. 내게 화산은 꽤나 특별한 곳이거든.”
“……!”
씨익!
“미안하지만 네놈들은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관산악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뒤이어 섬광이 일었다.
번쩍!
“으악!”
비명과 함께 잘린 머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뒤이어 죽은 자의 옆에 섰던 인물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퍽!
“끄으!”
“쳐라!”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남해검문의 고수들은 일제히 관산악을 향해 달려들었다.
쐐액!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은 검 하나가 관산악의 머리 위를 베고 지나갔다. 검을 휘두른 자는 그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관산악의 대도가 그의 허리를 무참히 잘라 낸 것이다.
“그분의 심기를 거스른 죄,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후후후!”
싸움은 그저 도륙에 불과했다.
* * *
맹호도 팽린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전방을 주시했다.
곳곳에 죽어 나간 무사들의 시신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악독하게도 당가의 고수들은 부상을 입고 신음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있었다.
“작전은 좋았다만 그걸 뒷받침할 실력이 없었군. 허접한 놈들 같으니. 후후후.”
적수가 될 만한 자가 없어 보이자 팽린은 긴장이 풀어졌다.
“팽린! 이놈!”
팽린을 노려보는 진호의 두 눈에 살광이 일렁거렸다.
벌써 팽린의 손에 죽어 나간 질풍각의 제자들은 다섯에 이르렀다. 하지만 자신들이 죽인 적들의 숫자는 고작 둘, 그것도 가장 약해 보이는 당가의 인물들이었다.
정예를 뽑아서 왔는지 팽가의 고수들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들은 진호와 질풍각의 고수들이 빠져나갈 퇴로마저 차단한 채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질풍각주께서 여기 계셨군. 후후후.”
“남의 싸움에 개입을 하다니. 녹수가 흐르고 청산이 변하지 않는 한, 화산은 너희 팽가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매화무적을 불러오는 것이 좋을 텐데. 그가 온다고 해서 별수야 있겠냐만 그래도 살아날 확률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을까?”
“닥쳐라! 네놈은 내가 상대해 준다!”
진호는 두 손으로 검을 비껴 잡으며 싸늘히 외쳤다. 팽린은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쾅!
그들의 옆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당가의 고수들과 격전을 벌이는 진청과 진명이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며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백을 넘어가던 당가와 오대세가의 고수들은 고작 이십여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는 일차 저지선을 무시하고 본관으로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본관에 입성을 하진 못했다.
이차 저지선을 지키고 있던 매화무적 진유자에 막혔기 때문이었다.
까가강!
“크악!”
“감히 화산을 넘보다니!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 주마!”
진유자의 노호성이 화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는 팽린과 진호의 귓속에도 선명하게 흘러들었다.
그야말로 화산의 산문을 향하는 능선 전체가 피의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저만치 위에서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진유자를 본 팽린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복하고 무릎을 꿇어라. 그럼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다.”
“너희 팽가는 그렇게 하나 보지.”
“대세를 모르는 무모한 놈들.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들어줄 수밖에.”
팽린의 대도에 시퍼런 강기가 맺혔다.
과거였다면 제풀에 기가 죽을 진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옥 수련을 거치면서 강해진 스스로의 힘을 믿었고 저승사자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지녔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해 볼 만하다.’
진호는 극한의 투지를 불살랐다.
그때 진호의 귓속으로 전음성이 파고들었다.
[본관으로 물러나라! 가서 장문 사형을 지켜 드려라! 어서!]
“……!”
진유의 것이었다.
진호는 아쉬움에 눈빛을 떨었다. 팽린이라는 엄청난 적을 앞에 두고 아쉬움을 드러내다니. 어쩌면 그 자체로 대단한 변화라 할 수 있었다.
“질풍각은 본관으로 퇴각하라!”
“어림없다!”
팽린의 대도가 진호의 허리를 향해 날아갔다. 진호는 피하지 않고 되레 검을 들어 올려 일도양단의 수법을 펼쳤다.
순간 팽린이 두 눈을 부릅떴다.
“동귀어진!”
팽린의 눈에는 진호의 움직임이 그렇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의 대도가 허리를 노리고 있음에도 피할 생각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지 않는가.
동귀어진은 팽린에게 있어 개죽음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팽린은 대도의 방향을 틀어 땅을 후려치고는 반탄력을 이용해 뒤쪽으로 몸을 뺐다.
슈아악!
간발의 차이로 진호의 검이 팽린의 머리 위 허공을 베고 지나갔다.
“위에서 보자! 팽린!”
“이런…….”
팽린은 황당함에 진호를 쫓을 생각도 못했다.
한 수 아래, 아니 두 수 아래쯤으로 여겼던 진호의 투기에 스스로 물러선 꼴이 되어 버렸다.
“감히 질풍각주 따위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팽린의 얼굴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화산의 장문인 태허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녕 화산의 멸망을 원하고 있더냐?’
당가와 오대세가의 연합군이 진정으로 화산의 멸문을 노리고 왔다면 그것을 막아 낼 방법이 없다.
당초 전면전을 선포하고 고수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던 당가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펼쳐 오고 있었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사람들처럼 무자비한 도륙전을 전개하면서.
‘사숙! 당신이 이렇게 만든 것이오?’
이런 사태가 올 때까지 화산은 당가와 칼질 한 번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시를 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십지문을 방문했던 진청이 혁련천후와 동행으로 엮이면서 사건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은 당가와 팽가의 화산침공이었다.
태허로서는 혁련천후가 일부러 당가에게 전쟁의 명분을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문에 대한 복수심이 누구보다 강할 테니까.
‘허어…….’
탄식을 한 태허는 뒤를 돌아보았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는 제자들이 비수처럼 눈을 찌르며 들어왔다.
이제 저들마저 무너지면 화산은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통함에 눈물이 올라오려 했지만 이를 악물어 참고는 장삼을 벗었다. 그리고 한동안 뽑지 않았던 장문인의 검을 뽑았다.
스르릉!
“죽음으로써 선조들께 용서를 빌 수밖에.”
휘이잉!
펄럭!
벗어 버린 장삼이 바람에 날려 청명과 청진에게 떨어졌다.
장삼을 받아 쥔 청명은 장문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눈빛을 떨었다.
“장문 사형…….”
눈시울을 붉히며 태허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청진이 돌연 검을 뽑으며 외쳤다.
챙!
“목숨으로 사문을 수호하자!”
채채채챙!
“우와아아아!”
미약하기 그지없는 사대제자들의 함성이 화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장문 사형!”
진호와 질풍각의 검수들이 올라섰다.
피투성이가 된 그들을 보자 태허는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2차 저지선까지 돌파를 당했느냐!”
“아닙니다. 대사형께서 그곳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허면 너희들은 왜 이리로 물러섰단 말이냐!”
“장문 사형을 지켜 드리라는 대사형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태허의 부릅뜬 두 눈이 붉게 충혈이 되었다.
이 와중에도 진유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는 명령을 내렸다.
“가서 네 사형을 돕거라! 어서!”
“장문 사형…….”
“놈! 감히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냉큼 돌아가서 진유를 도우라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허면 부디 조심하십시오, 장문 사형!”
진호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제8장 정도맹의 중재안
전쟁은 혈전이었다.
쉽게 본관을 점령할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당가와 팽가의 연합군은 반나절이 지날 때까지 본관에 이르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화산의 검수들은 그들의 예상을 상회하는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야 하는 지리적은 불리함도 한몫 작용하는 바람에 꽤 많은 세가의 고수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당효와 팽린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화산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미 죽은 검수들의 수는 백 명을 넘어갔다. 그래도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맹렬히 저항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버티면 적들도 어쩔 수 없이 능선 아래로 다시 물러서게 될 것이다. 하니 물러서지 맞서 싸워라!”
진유는 저지선이 돌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결과 해가 떨어질 때까지 결국 저지선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일찍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하자 맹공을 펼치던 당가와 팽가의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교전을 중단하고 능선 아래로 물러서야 했다.
야간 전투는 피아간에 위험천만한 것이다.
최소한의 피해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당가주 당효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구대문파라 이건가…….”
화산의 본관을 올려다보는 당효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쉽게 끝장을 볼 거라 여겼는데 맹렬한 저항 때문에 생각지도 못했던 피해까지 입으며 결국 내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분노와 더불어 화산의 저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문성과 장로 당곽이 다가왔다. 당곽이 대뜸 격한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가주! 독을 쓰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그랬다.
당효는 교전이 벌어지기 전에 독의 사용을 금한다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 독만 사용했더라면 벌써 승리를 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곽이 따지고 드는 것도 다 그런 생각에서였다.
“독공을 썼다면 진즉에 끝났을 전쟁입니다!”
당문성이 당곽을 거들고 나섰다.
둘의 거친 요구에 당효는 고개를 저었다.
“독이 아니라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그것이 세가를 위한 것이니 장로께서는 그만하십시오.”
“세가를 위하다니요? 대체 그건 또 어인 말씀이시오. 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