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귀환무사 43화>
“찢어죽일 놈들! 일거에 놈들을 쓸어버려라!”
명령이 떨어지자 당가의 고수들이 일제히 경공을 펼쳐 능선을 향해 뛰어올랐다.
슈숙!
허공에 뜬 그들을 향해 또다시 화살들이 쏘아졌지만 더 이상의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쓸어 주마!”
가장 먼저 매복선에 내려선 팽린은 대도를 뽑아 들며 주변을 쓸어 보았다.
그러나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저쪽일세.”
당효의 손가락이 위쪽을 가리켰다.
십여 장 위쪽에 화산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자 팽린의 두 눈이 불꽃을 일으켰다.
“어디 다시 한 번 도망쳐 보시지!”
팟!
팽린은 누구보다 먼저 바닥을 차고 산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며 혁련천후 일행들과 헤어진 영호민, 그러니까 백선녀 영호수란은 정도맹이 한눈에 보이는 객잔에서 조부와 오라버니를 만나고 있었다.
개인적인 볼일을 끝내고 혁련천후가 머무는 장원으로 돌아가던 그녀는 당가가 화산파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문을 접하고는 생각을 바꿔 조부 영호도성에게 먼저 소식을 전했다.
다행히 개방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영호도성에게 청한 부탁은 다름 아닌 화산파를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들어주실 거죠?”
“너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부탁을 하는 것이냐!”
영호진이 그녀를 나무라고 나섰다.
영호수란은 샐쭉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오라버니야말로 그게 무슨 말이야?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달라는 게 왜 말이 안 돼!”
“개인 간의 싸움도 아니고 문파 간 분쟁에 우리가 왜 개입을 하느냐 그 말이다. 철이 없는 것인지 식언이 모자라는 것인지. 쯧쯧쯧.”
영호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영호수란의 하얀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그러더니 빽 하고 소리친다.
“그럼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어야 철이 든 거야? 그 사람들, 정말 아무 죄도 없단 말이야!”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객잔의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주목했다.
영호도성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씩씩거리며 영호진을 노려본 영호수란이 다시 애원조로 매달린다.
“할아버지는 당가의 공격을 막아 줄 수 있잖아요. 그러니 제발 좀 말려 주세요. 네?”
“허허허! 이놈아, 그자들이 이 할아비의 말을 들을 작자들이냐? 내가 무슨 재주로 그것을 말린단 말이냐?”
“맹주님께선 할아버지 말씀이라면 잘 듣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니 그분께 부탁하면 되잖아요. 아니면 다른 구파의 장문들께 말씀이라도 해 주세요.”
“허어, 그놈 참…….”
난감한 표정을 짓는 영호도성. 그때 영호진이 다시 물었다.
“네가 그토록 화산을 구하려는 연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그들이 아무 죄가 없다는 건 어떤 뜻에서 하는 말이지?”
“죄 없는 사람들을 구해 주자는데 따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야, 인마! 화산이 당문칠기를 죽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죄가 없긴 왜 없어? 게다가 이차로 보낸 장로와 고수들까지 모조리 다 죽여 버렸다지 않느냐!”
“죽이긴 누가 누굴 죽였다고 그래!”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른 영호수란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그녀가 눈물을 보이자 영호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울긴 왜 울어. 그건 그렇고, 넌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화산이 당가의 고수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하지? 네가 그들이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어떻게 아냐고?”
“내가 그들과 함께 있었으니까!”
“……뭐?”
영호수란의 대답에 묵묵히 차를 기울이던 영호도성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혼자 유람을 다니다가 우연히 그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어요. 객잔에서 당문성이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그땐 그 사람이 그저 가볍게 한 대 때린 게 전부란 말이에요. 그리고 뒤늦게 충돌했던 당가와 남해검문은 그들이 먼저 살초를 펼쳐서 벌어진 일이니 그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할아버지.”
주르륵!
영호수란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야, 인마. 그렇다고 울면 어떡해.”
당황해하는 영호진에 반해 영호도성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네가 말한 그 사람이 누구지?”
“그 사람은…….”
영호수란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혁련천후가 누구라는 걸 말하려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그저 그의 이름밖에 아는 게 없지 않은가.
“좋은 사람이에요.”
나온 대답이 그거였다.
“허어, 참.”
영호도성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이리도 간곡히 부탁을 하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 맹으로 달려가서 중재를 요청해도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냥 좋은 사람이라니.
“오냐! 일단은 이 할아비가 맹주를 한번 만나는 보도록 하마. 허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대신 네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절대로 타인에게 해서는 안 될 게야. 알겠느냐?”
“알았으니까 빨리 맹으로 가세요.”
“허허! 이놈아, 술은 마저 마시고 가야지 않느냐?”
“술은 다음에 제가 실컷 사 드릴게요. 그러니 어서 맹주님부터 만나세요.”
자신의 등을 떠미는 손녀를 보며 영호도성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대신 또 몰래 도망가기 없는 거다. 알겠느냐?”
“알았으니까 어서 가세요, 할아버지!”
영호수란은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 * *
자신의 주인을 찾아 나선 마교의 흑영대주 관산악은 이름 모를 한 객잔에 들러 만두를 시켰다가 엄청난 크기의 만두가 나오자 황당해서 실소를 머금었다.
‘소가 먹어도 다 못 먹겠군.’
장대한 체구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 그리고 어깨에 둘러멘 널찍한 대도는 모든 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만약 그가 마교의 대주라는 것이 알려지면 인근 고을이 들썩거릴 것이다.
왜냐고? 그가 앉은 곳은 정파의 성역이랄 수도 있는 섬서의 한복판이니까.
독한 화주로 피로를 풀던 관산악의 귓전으로 다른 탁자에 앉은 이들의 대화가 흘러들었다.
“이봐, 싸움이 제대로 났다며?”
“그렇다네. 사천당가와 몇몇 문파가 합동으로 화산을 친다고 하네그려. 모르긴 해도 이번 싸움이 끝나면 화산파는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걸세. 가뜩이나 쇠락한 마당에 천하의 사천당가와 전쟁을 벌이면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쯧쯧쯧.”
“어허! 어쩌다가 정파끼리 그런 큰 싸움을 벌인단 말인가? 참으로 해괴한 일일세그려.”
모두가 화산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으로 보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곳에 사는 토착민인 듯싶었다.
‘소문이 돌더니 벌써 붙은 모양이군.’
정파 간의 전면전은 강호의 역사에 그 예가 없었던 까닭에 세인들은 눈과 귀를 온통 화산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문은 화산의 고수들이 당가의 고수들을 죽인 것이 발단이 되어 전면전이 벌어진 것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평소 사천당가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던 까닭에 당가가 억지를 부린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놈들은 여전히 말썽이군. 그러다 하루아침에 피바다가 되고 말지, 쯧쯧쯧.’
독한 화주가 동이 났다.
술이 모자랐던 관산악은, 점원을 불러 술을 가져오라 말을 하려던 차에 객잔으로 들어서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황색 장포에 하나같이 장검을 허리에 찬 그들은 매우 살벌한 기세를 발산하며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남해검문의 복장이라면…….’
관산악은 저들이 화산파로 가려는 남해검문의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경공을 쓰면 두 시진 안에는 도착할 것이니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서둘러 가야 한다.”
“놈들이 과연 우리가 갈 때까지 버텨 낼 수 있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당가가 정예를 보냈으니 어쩌면 그 전에 끝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매화무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맹호도와 당가주가 있으니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러면 우리가 너무 심심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몇 놈의 목 정도는 베어야 사문에 돌아가 면목이라도 세울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남해검문의 고수들은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큰소리로 웃었다.
관산악은 그들을 응시하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자신은 그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다. 이 년 전쯤에 자신의 수하들이 남해검문의 고수들과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었고 그 와중에 남해검문의 고수 여럿이 죽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그때 분노한 남해검문이 마교의 지부 한 곳을 공격했다가 때마침 그곳에 있었던 관산악에 의해 몰살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관산악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다가 들었는데, 본문과 당가의 고수들이 청룡언월도를 쓰는 장수한테 당했다는 말들이 돌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도는 걸까요?”
“와전된 것일 게다. 나라의 장수가 감히 본문의 고수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 괜한 헛소문이니 신경 쓸 거 없다!”
관산악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청룡언월도를 쓰는 장수라면…… 놈이 나보다 먼저 온 모양이군. 이거 이러다가 내가 꼴찌로 도착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관산악은 담대소천을 떠올렸다.
그와 맞닥뜨렸다면 보나 마나 죄다 허리가 잘려 죽었을 것이다.
담대소천은 한번 화가 나면 모조리 그렇게 죽여 버린다.
잠시 후, 남해검문의 고수들이 자리를 떴다. 그들이 객잔을 나설 때, 유독 날카롭게 생긴 자가 관산악을 한번 돌아보았다.
뒤이어 관산악도 객잔을 나섰다.
그는 값을 치르면서 왕팔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두가 너무 짜.”
초대형 만두로 인해 돈방석에 오른 왕팔은 관산악의 말에 초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염려하다가 이내 자신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을 보기에 이르렀다.
* * *
관산악은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나 실상은 평범한 사람이 뛰는 것만큼 빨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려한 산세와 어우러진 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깔깔거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자니 절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좋군.’
마교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휘이잉!
바람을 가르며 이동하던 관산악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주공을 귀찮게 할 놈들이라면 사전에 제거를 해 버리는 게 좋겠지. 후후후.”
그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려 한다.
그때 그가 지나왔던 길에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