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귀환무사 42화>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소?”
“추측을 해 보자면 문주님이나 검후께서 놈들이 원하는 뭔가를 지녔다고 볼 수밖에요. 단순히 원한 때문에 벌인 짓이라면 그냥 단숨에 죽였을…….”
청년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차마 뒷말을 할 순 없었다.
“내가 지닌 것이라고는 십지문밖에는 없소. 누군가 탐을 낼 만한 보물이나 보검 따윈 없다오.”
“굳이 보물이 아니라도 원하는 것은 충분히 많을 겁니다. 십지문의 강력한 힘이라든가, 아니면 대협의 비전절예, 뭐 그런 것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청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팍!
독고무의 손에 쥐어졌던 술잔이 가루로 화해 흩날렸다.
‘설마!’
불현듯 금옥장이 떠올랐다.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동생을 원했던 금옥장주 금치문. 독고무는 금치문이 이 순간 왜 떠오르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습니까?”
독고무의 표정을 살피던 청년이 눈빛을 발하며 물어 왔다. 독고무가 대답을 않고서 오히려 청년에게 물었다.
“금옥장을 아시오?”
“천하에 그곳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헌데 그곳은 왜 물으십니까?”
“그곳이라면 혹시 만년삼왕이 있지 않겠소? 황궁 보고에 버금간다고 알려진 곳이 아니오.”
“천하에 그것을 지닐 만한 곳이라야 황제가 있는 황궁 보고 아니면 금옥장의 보물 창고가 제일 유력한 곳이긴 합니다만, 가서 물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지요. 한데 갑자기 그곳은 왜…….”
독고무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곳의 주인 되는 자가 동생을 원하고 있었소. 수차례에 걸쳐 청혼을 요구해 왔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하고 돌려보냈었소. 귀하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그자들이 의심이 들어서…….”
“놈이 검후님께 청혼을 했단 말입니까? 그 돈벌레가 말이지요!”
어째 청년의 목소리에 분노가 깃들어 있다.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한 독고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머금더니 슬쩍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며 중얼거렸다.
“검후님을 원한 금옥장주가 만년삼왕 말고는 치료가 불가능한 독을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습니다. 검후님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대협께서 찾아올 것을 바라고 말이지요.”
“그렇소.”
그저 막연한 의심이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그래서일까?
독고무의 눈빛이 전에 없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그때 청년이 일어섰다.
“잠시 뭘 좀 사 올 것이 있어서 다녀와야겠습니다.”
“……?”
“하하! 평소에 존경했던 검후께서 저 지경이 되셨는데 어찌 그냥 보고만 있겠습니까? 반 시진 정도 지나면 돌아올 테니 술상이나 한 상 부탁드립니다.”
독고무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중요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뭘 사 오겠다니.
“검후께 도움이 될 일이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하!”
소년처럼 해맑게 웃어 보인 청년이 부리나케 객실을 빠져나갔다.
“쩝! 이러다가 꼴찌를 하면 그 인간한테 작살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거리로 나선 청년은 왕전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뭐, 미래의 주모님이 되실 분을 돕다가 늦었다고 하면 다른 형님들이 말려 주시겠지. 그나저나 약방이 어디에 있나?”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약방을 찾았다.
비록 독고혜의 상태가 죽지는 않는다곤 하나 그래도 임시 처방을 해 두는 것이 나중에 만년삼왕을 찾았을 때 도움이 되기에 그때까지 상태의 악화를 막아 줄 약을 만들어야 했다.
그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옳거니! 저기 있구나.”
저만치에 약방이 보이자 청년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했다. 좌우를 둘러싸며 다가드는 장한들, 지난밤 객잔에서 시비를 일으켰던 사련의 무사들이었다.
청년을 발견한 그들은 대번에 살기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쥐새끼! 여기 있었군.”
“아직 여기 있었냐?”
“미친 새끼! 오늘도 어디 꽁무니를 빼 보시지.”
“어쩌나 어제는 그냥 싸우기가 싫어서 도망을 갔다만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었는데.”
“미친 새끼! 언제까지 그 주둥이를 놀릴 수 있는지 보자!”
청년은 장포를 허리 뒤로 말아 넘기며 빙그레 웃었다.
“당연히 더는 못 보지. 이제 곧 너희들을 뭉개 버릴 거니까.”
“……뭐?”
청년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환영을 남기고 미끄러지듯 장한들에게 다가가더니 맨 앞에 섰던 장한의 복부에 일 권을 내질렀다.
퍽!
“끄악!”
돼지 멱을 따는 소리와 함께 장한이 저만치 날아가 꼬꾸라졌다.
퍽! 퍽! 퍽!
둔탁한 소리 세 번으로 싸움은 끝났다.
다른 셋도 입에 거품을 문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철전 하나가 떨어졌다.
짤랑!
“그런 눈으로 강호를 살아가려 하다니. 그러다 제명에 못 죽지. 옜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해라.”
* * *
당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쐐액!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화살 몇 발이 질풍각이 매복을 하고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숙여라!”
날카로운 외침에 이어 금속성이 울렸다.
따다당!
검수들을 노리고 날아든 화살을 쳐 낸 진호는 화살이 날아온 곳을 주시했다.
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는 무리들이 그의 눈에 보였다. 선두에 선 누군가가 이쪽을 쳐다보며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저 정도의 거리에서 이토록 강력한 화살이라니?’
놀라웠다.
무리들과 자신들의 거리는 어림잡아 오십여 장 정도였다. 비록 화살이 백 장 이상을 날려 보낼 수 있는 장거리 무기였지만 좀 전의 화살이 보였던 위력은 손목이 쩌릿할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적들이 올라오고 있다! 질풍각은 전투태세를 갖춰라!”
진호의 명령에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며 화산의 검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이 매화 검수들로 이루어진 질풍각은 화산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무력 부대다. 하나같이 사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긴장한 빛이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놈들의 진격을 늦춰야 한다.’
진호는 난전을 펼치기로 작정했다.
사문의 존망과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그야말로 생사대전이다.
고상한 무사의 멋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었기에 진호는 진흙탕처럼 끈적거리는 싸움으로 적들의 기세를 최대한 누그러뜨릴 작정이었다.
그래서 준비를 해 둔 것도 있었다.
“준비해라!”
나지막한 명령에 미리 준비한 듯 질풍각의 무사들이 하나같이 허리춤에서 작은 도자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엔 석궁을 축소시킨 듯한 작은 무기가 들려 있었다.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시작해라!”
“예!”
당가와 오대세가의 고수들이 올라오는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자신감에 넘친 그들은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 여유롭게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지켜보는 진호의 눈빛이 매서운 살기를 품었다.
‘우리 정도는 그냥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빌어먹을 새끼들아!’
그때 뒤에서 진청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진호가 놀라 물었다.
“본관이 있어야지 이곳엔 왜 왔느냐?”
“본관이나 여기나 위험하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냥 같이 싸우려고 왔습니다.”
진청은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진호는 어이가 없었다.
“하여튼 못 말릴 놈이다, 네놈은.”
“천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히죽 웃어 보인 진청은 산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백여 명이라고 들었는데, 반 정도는 다른 곳으로 간 모양입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즉시 본관으로 물러나야 한다. 알겠느냐!”
“걱정 마십시오. 저도 제 목숨 소중한 건 아는 놈입니다.”
진청은 애써 담담하게 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진호이기에 진청이 기특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저 새끼도 왔네.”
진청은 당문성을 보았다.
진호는 당문성의 좌우에 선 당효와 당가의 장로들을 발견하고는 낯빛을 굳혔다.
진청이 싸늘히 읊조렸다.
“저 새끼만큼은 죽여 버립시다, 사형.”
당가의 고수들과 함께 선두에서 올라가던 맹호도 팽린이 돌연 이채를 머금었다.
“놀라 내뺄 줄 알았더니 꽤 당당하게 나오는데?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당문성이 말을 받는다.
“놈들이 믿을 구석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정도맹까지 중립을 표방한 마당에 놈들은 철저히 고립된 상태입니다. 그냥 허세를 부리는 겁니다!”
“하긴,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구대문파의 한 곳이니 최소한 저 정도의 기백은 있어야겠지. 그럼 슬슬 시작을 해 볼까?”
당문성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그는 오직 혁련천후 말고는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그가 이곳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지를 잘라 벌레처럼 기어 다니게 만들어 주마.’
사사삭!
당가와 팽가의 고수들이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얼마를 오르니 질풍각의 매복선과 이십 장 거리까지 좁혀졌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암기다!”
“흥! 고작 저따위를 암기라고 할 수 있겠느냐!”
산 위에서 수십 개의 물체들이 날아왔다. 하나같이 고수들로만 추려서 온 까닭에 대부분이 코웃음을 치며 검으로 날아든 물체를 쳐 냈다.
펑!
퍽!
검이 쳐 낸 물체들이 일제히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순간 당가와 오대세가의 고수들은 독을 의심하고는 호흡을 멈추며 그 자리에 섰다.
“독이 아니다!”
“연막탄이다. 무시하고 올라간다.”
독을 의심했던 그들은 연기가 시야를 가릴 목적의 연막탄임을 간파하고는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팽린이 비웃음을 날렸다.
“시간을 벌 수작이군. 그러나 과연 얼마나 벌 수 있을까? 후후후.”
연막탄은 군부의 병사들이 쓰거나 강호의 하류잡배들이 간혹 쓰는 것으로 명문 정파인 화산이 그것을 쓰자 팽린은 비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맞바람이 불고 있었던 까닭에 당가와 팽가의 고수들 앞에 자욱한 연기가 깔렸다.
그때였다.
쐐액!
슈악!
난데없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악!”
“크윽!”
“강전이다! 모두 엎드려라!”
평소라면 제아무리 빠른 강전이라도 피하거나 쳐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시야를 가린 연기 때문에 몇 명이 피를 뿌리며 꼬꾸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피해를 본 당가주 당효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