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귀환무사 38화>
“검을 손에서 놓는 순간, 너는 화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으드득!
진청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알았다. 알았다고, 빌어먹을 인간아!’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킨 진청은 휘적거리는 몸으로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가 더 지났을까?
휘청!
검의 무게를 못 이겨 신형을 휘청거린 진청이 기어코 바닥으로 쓰러졌다. 대자로 뻗어 하늘을 보며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진청은 자신의 얼굴을 덮어 오는 그늘을 보았다.
뒤이어 혁련천후보다 더 차가운 얼굴이 두 눈을 가득 채우며 들어왔다.
“일 각만 쉬고 다시 시작하겠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진청은 바람처럼 강으로 달려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
첨벙!
연무장의 구석진 곳에서 커다란 돼지 한 마리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가고 있었다.
수련에 지친 모두는 해초처럼 축 처진 채 침만 꼴깍 삼켜 댔다.
혁련천후는 녹초가 되어 버린 모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재주가 있는 놈들입니다.]
왕전의 전음에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흑야를 돌아보았다.
진청을 힐끗 쳐다본 흑야가 전음을 보내온다.
[더러운 성깔 때문에라도 성공을 할 놈입니다.]
[기초부터 다질 시간이 없다. 가급적이면 속성으로 하도록 해.]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는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맞은편에 담대소천이 앉아 있었다. 혁련천후는 그를 향해 담담히 웃어 주었다.
“잘 어울리는군.”
그러고 보니 담대소천은 갑주가 아닌 흑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유난히 검은 그 색이 그의 강인한 분위기와 꽤나 잘 어울렸다.
“다음에 갑주 벗고 다시 떠 보자!”
왕전의 으름장에 담대소천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깨는 괜찮냐?”
왕전의 얼굴이 벌게진다. 일전에 대결을 벌였을 때 그에게 어깨를 한 방 맞았다.
“요즘 숟가락이 무겁지?”
이번에는 담대소천의 얼굴이 실룩인다.
그 역시 왕전에게 손목을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았다. 흑야가 둘을 비웃었다.
“애들이 본다.”
“고기가 다 익었습니다.”
청명의 목소리에 축 늘어졌던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모두는 돼지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담대소천이 혁련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천이나 북해에 있는 놈들이 많이 늦는 것 같습니다.”
“날아와도 한 달은 걸릴 거리다.”
혁련천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흑야가 조심스레 묻는다.
“더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느냐?”
“이제는 경지를 아예 초월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글쎄. 한번 시험해 보겠나?”
“괜찮습니다.”
흑야는 혁련천후에게서 재빨리 시선을 돌려 버렸다. 왕전과 담대소천의 비웃음이 흑야에게 쏟아졌다.
진호가 조심스럽게 묻고 나선다.
“한 달을 수련해서 과연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그것을 묻기 위해 진호는 며칠을 고민했었다. 수련을 받는 모두가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그들도 그것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공은 어쩔 수 없겠지.”
말이 짧으니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주시했다. 당연히 뒷말을 기대하는 눈치다.
“저들과 한 달을 수련하면 십 년 동안 실전을 한 것과 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모두의 눈이 커지며 입이 벌어진다.
십 년 동안의 실전 경험과 같은 결과라니? 모두의 눈이 이내 단호한 결의 같은 빛으로 채워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의 말은 무조건 믿는 그들이다.
“내일부터는 수련의 강도를 높이도록 해.”
혁련천후는 그 말을 남기고 장원으로 들어갔다.
눈에 힘을 줘 가면서 단호한 결의를 보였던 모두의 눈동자가 일순 초점 없이 흐려졌다.
‘젠장! 죽었다.’
모두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은 진호는 살점이라곤 없는 돼지 뼈를 씹으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 *
정체불명의 독에 중독을 당한 독고혜는 며칠이 지나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독고무는 개방지부의 도움을 받아 십지문으로 전서를 보내 호북성의 명의라 불리는 활인당의 당주 약선(藥仙) 포중삭을 데려오라 지시하고는 독고혜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의술에 조예가 없는 그로서는 강대한 진기를 이용하여 독이 심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서기가 무섭게 암습을 해 왔다면 계획적으로 우리를 노린 놈들의 소행이다.’
독고무는 그 며칠 동안 흉수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의심이 가는 곳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과 원한을 진 사파와 마도의 무리들이 어디 한둘인가.
정도맹의 비영단주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움직일 수가 없는 독고혜 때문에 그럴 수도 없어서 더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독고무는 죽은 듯 누워 있는 동생을 응시했다.
아름다웠던 얼굴이 중독으로 인해 푸르죽죽한 빛으로 변한 것을 보자 가슴이 메어졌다.
독고무의 속내가 숯처럼 검게 타들어 갈 때, 그들이 머물고 있는 객잔의 일 층에서는 매우 살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의장삼을 입은 미청년을 앞에 두고 험상궂게 생긴 장한 몇 명이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장한들 앞에서도 미청년은 담담하게 술잔을 기울이기만 했다.
상황을 돌아보면 장한들은 사파의 최강 단체인 사련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모종의 임무를 받고 목적지로 향하던 중에 술 한잔을 할 요량으로 객잔에 들어서다가 미소년의 발에 걸려 한 명이 자빠지면서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밥 좀 먹고 싸우는 게 어때?”
청년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장한들의 눈썹이 역팔 자로 휘어졌다.
“여기서 뒈질 테냐, 아니면 나가서 뒈질 테냐! 냉큼 일어서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자르겠다.”
장한들의 살벌한 태도에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사련에 하나같이 잡놈들뿐이라더니 확실히 소문이 사실이었군.”
“뭐, 뭣이!”
장한들이 일제히 놀랐다.
사련의 사자도 입에 담지 않았는데 청년이 자신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뒈져랏!”
장한 하나가 주먹을 날렸다.
워낙에 짧은 거리여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 보였다. 장한의 주먹이 턱에 이르렀을 때, 청년이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쭉 밀려났다.
그러자 주먹을 뻗었던 장한이 무게중심을 잃어버리고서 앞으로 엎어지며 청년이 먹던 음식을 죄다 뒤집어썼다.
우당탕탕!
“믿는 구석이 있었군. 허나 우리를 알아본 이상 네놈은 이 자리에서 뒈질 수밖에 없다.”
“니들이 뒈질 거라는 생각은 못하나 보지?”
일 장 가까이 뒤로 물러난 청년이 능글맞게 나오자 장한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달려들었다.
콰지직!
청년이 섰던 곳의 탁자에 검이 떨어질 때, 그는 이미 객잔 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놈을 잡아라!”
장한들이 재빨리 청년을 쫓아 몸을 날렸다.
“그래 가지고 돼지나 잡을 수 있겠냐?”
저잣거리에 내려선 청년은 달려드는 장한들을 보며 싸늘히 비웃어 주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한들은 청년이 사라진 곳으로 일제히 몸을 날려 추격해 갔다.
난데없는 소란에 삼 층 난간으로 나왔던 독고무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청년을 응시하며 눈빛을 발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경공을 지녔군.’
확실히 청년의 경공은 그가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독고무의 미간에 돌연 주름이 잡혔다.
‘그나저나 사련의 놈들이 감히 섬서성에서 활개를 치다니.’
사련은 정도맹, 마교와 더불어 천하삼세(天下三勢)로 불린다.
그들이 비록 천하 각지에 거점을 두었다지만 정도맹의 본 단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곳에서 저런 식으로 싸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다.
자칫 잘못하면 도발로 여겨져 두 세력 간에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장악 지역에서는 소란을 피하는 실정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독고무가 이내 눈빛을 발했다.
사련의 무리들을 피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청년이 휘적휘적 돌아오고 있었다.
‘재밌는 친구로군.’
독고무는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청년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괴상한 눈빛을 지녔구나.’
독고무가 내심 가볍게 놀랐다.
청년의 눈동자가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도 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시오?”
청년이 넉살좋게 물어 온다.
“그렇게 보이시오?”
“고수가 표정이 어두우니 당연히 그렇게 볼 수밖에요.”
‘뭣?’
독고무는 다시 놀랐다.
‘난 지금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청년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란 생각이 들자 독고무는 정색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어찌 처음 보는 내게 그런 말을 하시오? 혹 점괘를 짚는 사람인 게요?”
“하하하! 점까지는 아니고 그저 하늘의 이치를 조금 깨우친 정도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무슨 걱정인지 말씀이라도 해 보시오. 혹시 아오? 내가 도움이 될지.”
낭랑한 웃음을 터트리는 청년, 독고무는 두 눈에 내공을 끌어 담고 청년의 전신을 살폈다.
그러나 잡혀 드는 기운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좀 전에 분명 경공을 펼쳤다. 헌데 지금은 아무런 기운이 없다. 설마 저 나이에 내공을 갈무리하는 수준이란 말인가.’
내공을 갈무리하는 수준이라면 적어도 초절정이란 소리다. 고작해야 서른이 안 되어 보이는 청년의 나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반로환동을 한 절대 고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독고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고수는 세상을 통틀어야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이보시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이오? 왜 아무런 말이 없소.”
어느새 청년은 독고무의 바로 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독고무는 청년이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확신하고서 눈빛을 냈다.
왠지 모르게 청년에게 호감이 갔다.
“올라오시오. 내 술 한잔 하면서 근심을 털어놓겠소.”
“하하하! 그거 좋지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청년은 독고무의 옆에 서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가 따로 없을 정도의 대단한 신법이었다.
독고무는 청년을 실내로 안내했다. 뒤를 따라 들어서던 청년이 돌연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다.
“신강에 있어야 할 독물이 어찌 이곳에서 냄새를 풍기는 거지? 거참 요상한 일도 다 있구나.”
순간 독고무의 신형이 벼락처럼 돌아섰다.
“독을 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