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귀환무사 36화>
“쳇!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하시네.”
“그러게. 좀 나아진다 싶더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셨어. 에휴!”
청명과 청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연신 투덜거리기 바빴다. 조금 전까지 진청의 짜증을 다 받아 낸 그들은 이제야 그에게서 벗어나 밖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게 뭐냐? 남들은 수련을 받으며 고수의 꿈을 키우는데 우린 저 성질 더러운 사숙의 짜증이나 받아야 하니 말이다.”
“참아라. 그분께서 우리도 곧 수련에 들어간다고 하셨으니 기다리면 될 거야.”
청명이 돌연 좌측으로 길을 틀었다. 청진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딜 가려고?”
“대협 식사 챙겨 드려야지.”
“아! 맞다. 빨리 가자.”
둘은 재빨리 주방이 있는 전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청명과 청진이 음식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을 때, 수련을 마친 사람들은 곳곳에 드러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돌아 버리겠네.”
어지간한 탁철마저도 대자로 누워 연신 가쁜 숨을 토해 냈다.
“하여간에 저런 약골들은 처음 봅니다.”
왕전의 시큰둥한 말에 혁련천후는 그저 담담히 웃었다.
담대소천이 왕전을 보며 한마디 던졌다.
“가르치는 놈이 잘 가르쳐야지.”
“지랄하네. 저놈 상태나 보고 그런 말을 해라. 무식한 칼잡이 놈아.”
왕전이 탁철을 가리키며 고리눈을 하자 담대소천은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도 저놈은 말이라도 하지 않느냐?”
그의 말에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진호가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이내 오금이 풀려 버리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저런 놈이 각주라니, 쯧쯧! 벌떡 일어서지 못하겠냐!”
왕전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화산의 검수들은 힘겹게 일어섰다.
“사람 괴롭히는 취미가 늘었나 보군.”
담대소천이 중얼거리자 왕전은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때 청진과 청명이 큼지막한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먹음직스럽게 삶아진 고기가 담겨 있었다.
모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섰다.
“주공! 술은 없습니까?’
탁철이 큰 소리로 물었다.
대형에서 주공으로 호칭이 바뀐 것은 순전히 왕전의 협박 때문이었다. 탁철이 대형이라고 부르면 왕전이나 담대소천보다 탁철이 더 높은 위치가 되기 때문에 강제로 바꿔 버린 것이었다.
“수련 기간 동안 금주라는 것을 잊었느냐.”
단호한 혁련천후의 대답에 모두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왕전과 담대소천이 더 아쉬워하는 빛을 보였다.
혁련천후는 담대소천의 전신을 쓸어 보고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선 좀 벗지그래.”
“습관이 돼서…….”
“괜히 이목을 끌 필요는 없으니 무복으로 갈아입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주공.”
혁련천후의 말이 이어졌다.
“둘이 붙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뜬금없는 물음에 담대소천은 왕전을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싸울 가치를 못 느껴 기억조차 없습니다.”
“어쭈? 니가 그렇게 씨부린다 이거지?”
왕전이 벌떡 일어서며 담대소천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시늉을 한다.
“다치면 쟤들은 누가 가르치느냐?”
“네 걱정이나 하세요, 무식한 칼잡이 놈아!”
둘이 밖으로 나가자 모두는 먹던 고기를 내려놓고 우르르 몰려 나갔다.
다만 진청만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혁련천후가 그런 진청을 힐끗 보며 물었다.
“고수들의 결투는 수련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한데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
“싫습니다. 그냥 잠이나 자러 가야겠습니다.”
진청이 몸을 일으켜 거처로 돌아가려고 하자 혁련천후의 눈가에 주름이 잡힌다.
“넌 저들보다 훨씬 힘든 수련을 받게 될 것이다. 당장 수련을 받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거다.”
“…….”
진청이 돌아섰다.
“너를 가르칠 사람은 한 분야에서만큼은 이 세상에서 최강이다. 성격도 저들보다 더 무섭고…….”
“……정말입니까?”
진청은 우울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한 분야에서 이 세상 최강이라니. 그런 고수에게 자신이 수련을 받는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 짜증 부리지 나가서 대결을 지켜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말 그대로 용과 호랑이의 싸움을 보듯 둘의 대결은 거칠고 파괴적인, 그리고 승부를 가늠하기 힘든 대접전이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눈과 입을 벌린 채 넋을 놓았다. 자신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무력을 선보인 대결은 한 시진이 지나서 혁련천후로부터 그만하라는 말이 떨어지고서야 끝이 났다.
엄청난 공방을 주고받은 그들이지만 숨소리는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의 그것처럼 고르기 그지없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전과 장수의 대결은 그들에게 확실한 희망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은 곧 쇠락한 사문의 부흥을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어 낼 것이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진호를 바라보는 진명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주 보는 진호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도…… 할 수 있겠지?”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둘은 서로를 보며 굳은 결의를 다졌다.
‘반드시 강해져서 사문의 영광을 우리 손으로 이끌고야 말 것이다. 반드시!’
훗날 화산오검(華山五劍)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구천각의 수장 명수 명수진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앞에 사제 명보진인이 앉아 있었다.
“맹주가 그런 지시를 내릴 줄이야. 이런 고약한 경우가 있나!”
둘은 지금 맹주 나백의 처신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가참살의 흉수로 몰아갔던 화산 제자들에 대한 철회령은 그들로서는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격이 되어 버렸다.
명보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철회령도 철회령이지만 만약 그자가 십 년 전의 그자가 맞으면 그땐 어찌하겠습니까?”
“네가 아마 착각을 한 것일 게다. 그자는 절대 살아날 수 없는 곳에 떨어졌다. 그것도 온몸에 칼을 맞고 말이지.”
“허면 그 매화 향은…….”
“경황이 없다 보면 착각을 할 수도 있으니 더 이상은 그자를 거론하지 말거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자이니까…….”
명수진인의 말에 명보진인이 다시 물었다.
“허면 그자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요?”
“맹주의 권한으로 철회령이 내려진 마당에 놈들을 죽여 봤자 득 될 것이 없다. 당초 목표는 놈들을 이용해 화산을 정도맹과 구파에서 축출하려고 했다만, 이 시점에서 섣불리 나섰다가는 되레 일을 망칠 수도 있으니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지.”
“당가와 오대세가를 이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당히 쑤시면 벌 떼처럼 화산으로 몰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들이야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일 자들이 아니냐.”
명보진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철회령이 내려졌다고는 하지만 당가와 단리세가, 남해검문 등은 여전히 화산의 제자들에 대한 앙심이 대단했다.
명보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의미심장한 빛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도 이번 영웅 대회에 참가를 한다고 들었는데, 차라리 그때를 노려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영웅 대회를 노려 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당가나 남해검문의 고수들이 출전하는 조에다 화산의 출전자를 배정하면 간단하게 끝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앙심을 품은 그들이니 당연히 비무대 위에서 죽이려고 들 테니까요.”
“오호! 듣고 보니 그럴듯하구나.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놈들을 자극해서 스스로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이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물론 살수를 펼쳤다고 해서 말들이 나올 수는 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무마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탁!
명수진인은 탁자를 내리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명보진인의 말대로만 된다면 그야말로 합법적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둘은 달이 하늘의 한가운데에 떠오를 때까지 은밀한 대화를 이어 갔다.
제5장 검후, 위기에 놓이다
독고혜를 태운 마차는 천천히 섬서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모처럼 강호로 나서는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마차는 독고무가 직접 몰았다.
그는 일부러 호위 무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가급적 동생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독고무는 고을이 나타나자 마차를 저잣거리로 몰았다. 잠시 후, 적당한 곳을 찾은 그들은 간단한 식사를 할 요량으로 객잔을 들어섰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커다란 글씨로 ‘초대형 만두 전문’ 이라는 글귀가 그들을 맞이했다.
시비 취앵이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놀라워한다.
“어머! 저 만두 좀 보세요. 진짜 커요!”
말 그대로 만두의 크기는 초대형이었다.
객잔 안의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 만두를 먹는 것으로 보아 객잔은 초대형 만두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뭘 먹겠느냐?”
독고무가 물어 오자 입맛이 없었던 독고혜는 간단한 요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취앵이를 생각해 만두를 먹자고 했다.
크게 기뻐하는 취앵을 보며 미소를 지었던 그녀는 객잔 안을 둘러보며 음식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
제법 규모가 큰 객잔은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장소가 섬서인지라 대부분은 칼을 찬 무림인들이었고 그중엔 구파의 복장을 한 무사들도 더러 보였다.
독고무는 따뜻한 어조로 물었다.
“피곤하지 않느냐?”
“편하게 앉아서 왔는데 피곤은요. 괜히 저 때문에 오라버니만…….”
“무슨 소리냐. 덕분에 나 역시 유람이라는 것을 모처럼 하고 있지 않느냐. 허허허.”
독고무가 웃자 독고혜도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독고무는 객잔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탁자에 이르러 눈빛을 발했다.
창가의 탁자에 아름다운 여인과 그 일행들이 앉아 있었는데, 독고무도 안면이 있던 여인이었다.
‘모용세가의 여식…… 가주 아닌가?’
여인은 바로 모용세가의 모용미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해서일까? 이제는 한 세가의 가주 직을 맡은 그녀라 전과 다르게 위엄이 넘치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청년들 또한 비범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는데, 마침 독고무를 발견한 모용미가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올 것 같은 태도를 취하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볍게 목례를 취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녀의 안색은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지 못한 이유는 독고무의 전음 때문이었다.
[미안하오, 모용 가주. 사정이 있어 지금은 인사를 나눌 수가 없을 같소. 내 다음에 정식으로 사죄를 드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