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귀환무사 34화>
당가의 장로가 피를 쏟으며 아귀처럼 울부짖었다.
혁련천후는 그런 그를 향해 싸늘히 웃어 주었다.
“우린 신마성(神魔城)의 사람들이다.”
신마성.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화산의 검수들과 모용단승 등도 의아한 얼굴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그들의 그러한 반응은 당연했다.
신마성은 강호로 돌아오기 전에 혁련천후가 구상했던 문파의 이름이었는데, 왕전조차도 지금 처음 들었다.
당연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가서 정도맹에 전해라.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주겠다. 단! 앞으로 또다시 우리를 귀찮게 하려 든다면 신마성은 가장 먼저 정도맹을 향해 검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뒈지기 싫으면 냉큼 꺼지는 게 좋을 텐데?”
“내 반드시 네놈의 살을 찢어 젓을 담그고야 말리라! 부디 죽지 말고 기다려라. 이놈들!”
왕전이 으름장을 놓자 당가의 장로는 저주를 퍼부으며 저잣거리를 빠져나갔다.
나웅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혁련천후는 사라져 가는 자들을 응시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문파를 세운 뒤에 밝히려 했는데…….’
왕전이 히죽 웃으며 전음을 날렸다.
[문파 이름 한번 죽입니다. 흐흐흐!]
그때였다.
왕전의 앞에 떠났던 영호민이 내려섰다. 그는 격돌의 현장을 둘러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깝죽거리는 놈들이 있어서 박살을 내 줬지. 한데 왜 돌아왔느냐?”
“아! 그게 시간이 며칠 남은 걸 깜박했지 뭡니까.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다시 돌아왔지요.”
왕전이 눈을 부라린다.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냐?”
“……신경 좀 끕시다. 예?”
짐짓 눈을 부라린 영호민은 혁련천후의 곁으로 횅하니 뛰어갔다.
제4장 작지만 큰 시작
모용단승은 갑자기 삶이 즐거워졌다.
강해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희망에서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제부터 몇 명의 가슴속에 태산처럼 자리 잡은 왕전은 지금 자신이 가져온 황금이며 전표 같은 것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왕전과는 달리 함께 돈을 세고 있던 진호와 진명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이 정도면 제법 큰 장원도 구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도 남겠는데요!”
객실의 한쪽에서 느긋하게 눈을 감고 있던 혁련천후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모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계속해.”
그가 객실을 나가자 왕전이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바람 쐬러.”
“저도 가겠습니다.”
“너는 돈이나 마저 세라.”
쿵!
휘이잉!
밖은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요!”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영호민이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숨기지 않기로 했어요.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제 목소리를 내니 참으로 아름다운 음성이다. 이미 전부터 그가 남장 여인임을 알고 있었던 혁련천후는 그저 묵묵히 걸었다.
“하! 공기가 너무 좋다. 그렇죠?”
“떨어져서 걸어라.”
“쳇! 근데 어딜 가시는 거죠?”
“머물 곳을 보러 간다.”
“문파명이 신마성임을 감안하면 굉장히 큰 장원을 사야 할 텐데…… 흠! 재밌겠다. 흥정할 때 제가 깎아 줄게요. 후훗! 믿어 보세요.”
여성으로 돌아오니 말의 양과 속도가 두 배는 많아진 영호민이다. 물론 영호민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지만 그녀는 본명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물어보는 이도 없었다.
현재까지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혁련천후와 왕전뿐이다.
둘은 계속해서 걸었다. 가는 도중에 영호민은 끝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열 번 물으면 혁련천후는 한 번을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제법 커다란 장원이 있는 한적한 곳에 이르러 둘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머! 진짜 큰 장원이네?”
꽤 큰 규모의 장원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 곳곳에 부러진 나무들과 파손된 건물의 흔적들이 보였고 대문은 낡을 대로 낡아 반쯤 부숴져 있었다.
“폐장원이군요. 어째 좀 으스스하네요.”
장원의 음습한 분위기에 영호민은 어깨를 움츠리며 곳곳을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혁련천후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혁련천후는 장원보다는 주변을 살폈다.
뒤쪽엔 제법 높은 산이 자리했고 왼쪽으로는 강이라고 할 수 없지만 꽤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하천이 있었다.
‘그럭저럭 쓸 만하겠군.’
혁련천후는 장원 주변의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연무장까지 있었고 곳곳에 무기를 놓아두는 거치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장원은 무가(武家)였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무사들의 한이 서린 곳이군.’
상당수의 무사들이 한때는 이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을 했을 것이다.
저마다의 꿈을 갖고 고수가 되기 위해 그들은 삶을 이곳에 바쳤을 것이고 문파는 그런 무사들을 보호하며 함께했을 것이다.
‘지켜 주지 못하면 서로 죽는 수밖에…….’
문파는 품은 무사들을 보호하고 무사들은 문파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폐장원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멸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수리만 하면 꽤 쓸 만하겠어요. 규모도 큰 데다 하천까지 있고, 인근에 대도시까지 있으니 문파를 세우기엔 최적의 장소인 것 같아요.”
혁련천후도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조건은 화산파와 가깝다는 점이었다.
“이곳을 구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관에가서 토지의 주인이 누군지부터 알아봐야죠.”
“수고를 좀 해 줘야겠다.”
“쳇! 그럴 줄 알았어요. 좋아요. 시간이 며칠 있으니 그 전에 제가 해결을 해 주죠. 대신 나중에 수고비는 쳐줘야 해요? 알았죠?”
혁련천후는 말없이 돌아섰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고 가요. 배도 고프고 술도 고픈데…….”
“객잔에 가면 술 많다.”
“쳇!”
영호민은 혁련천후의 널찍한 등판을 보며 눈빛을 지그시 가라앉혔다.
‘멋져.’
자신의 방심을 흔들어 버린 사내는 태어나서 그가 처음이다. 비록 정체 모를 신비에 싸인 사람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야릇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눈을 빛낸 그녀는 재빨리 그를 따라붙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제가 여자라는 걸 비밀로 해 주세요. 그 산적 아저씨 빼고…….”
“그러지.”
둘은 일행들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걸음을 돌렸다.
두근두근!
영호민, 아니 세상이 백선녀 영호수란이라 부르는 그녀는 뛰는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 * *
나웅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정도맹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신마성이라는 처음 들어 보는 문파에 대해 하루라도 빨리 맹에 알려야 했다. 더불어 왕전과 혁련천후의 무공이 상상 이상인 것 역시 알려야 했다.
나웅의 눈에 둘은 초절정은 훌쩍 뛰어넘은, 절대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었다. 그런 고수들이 나타나면 당연히 맹에 전해서 비영단으로 하여금 그들의 신상을 면밀하게 조사하게 해야 한다.
‘신마성이라는 곳에 그자들만큼 강한 고수들이 더 있다면 이거야말로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천하고수들이 집결한 정도맹에서도 왕전 정도의 고수는 몇 명밖에 없다.
더 놀라운 것은 혁련천후가 그런 왕전을 수하로 부린다는 점이었다. 무력이 서열을 정하는 강호임을 생각하면 최소한 왕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 둘 정도에 버금가는 고수가 두서넛만 더 있다면 작금의 강호에 판도의 변화까지 가져올 수 있는 전력이 되고도 남는다.
‘조속히 그들에 대해 조사를 해 봐야 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아니 신마성이라는 곳이 사파나 마도의 문파라면 정도맹으로서는 엄청난 적을 새로 맞게 되는 셈이다.’
나웅의 낯빛이 절로 굳어졌다.
‘화산의 인물들이 함께하는 것으로 보아 마도나 사파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확실히 알기 전에는 결코 속단할 수 없다.’
휘이익!
나웅은 한 마리 새처럼 관도 위를 질주했다. 산 하나를 넘어가자 꽤 넓은 목초지대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곳에 나웅을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가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저자는?’
섬서의 초입에서 그와 부딪혔던 청룡언월도를 쓰던 장수였다.
나웅은 재빨리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말을 몰아오는 장수를 살폈다.
장수는 투구를 벗은 상태였다.
‘저렇게 젊었다니.’
전에는 햇빛을 등지고 있었던 터라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던 나웅은 장수가 의외로 젊어 보이자 내심 놀랐다.
‘나를 공격했던 수준을 감안하면 내공으로 인해 젊어 보이는 거겠지.’
지난번, 가공했던 장수의 공격을 떠올린 나웅은 내공을 끌어 올려 피부의 호흡까지 죽이고는 장수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장수는 나웅이 몸을 숨긴 곳을 지나쳤다.
안전한 거리가 되었다고 판단을 한 나웅은 숲을 나서다가 흠칫 놀랐다.
등이 축축했다.
‘내가 식은땀을…….’
당가의 고수들은 부상당한 장로와 고수를 들것에 태우고 이동하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할 요량으로 인근에서 유명한 약가촌을 향하는 중인데, 남해검문의 고수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동료들을 잃은 것 때문에 모두가 침통한 표정이었다.
쉽게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결과는 압도적인 패배로 끝났다.
팔 하나를 잃어버리는 중상을 당한 당가의 장로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여전히 불신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를 좀 보십시오!”
남해검문의 고수 하나가 전방을 보며 외쳤다.
갑주를 걸친 장수가 전마에 몸을 싣고서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어고 있었다.
순간 당가의 고수들이 일제히 눈빛을 내며 전마와 장수를 주시했다.
“말에다 들것을 묶어 끌게 하면 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습니다.”
부상자들이 있었던 그들은 말이 있다면 훨씬 빨리 약가촌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을 빼앗을 생각을 했다.
관의 장수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그들에겐 없었다. 보는 이가 없으니 죽이고 떠나면 그뿐이라 여겼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장로가 옆의 인물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저자를 따르는 군병들이 없는지 살펴보아라.”
“예!”
당가의 고수 하나가 재빨리 사방을 살펴보았다.
“없습니다.”
당가의 장로가 남해검문의 고수들을 향해 말했다.
“이 일은 검문의 고수들도 함구해 주시기 바라오.”
“알겠소이다. 장로.”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한 남해검문의 고수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당가의 장로가 명령을 내렸다.